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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 전12권 ㅣ 황석영 대하소설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나와 황석영
황석영의 <장길산> - 이번에 내가 읽은 건, 2003년 6월에 초판 26쇄 발행된 것이다. 이것은 구판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학교 도서실에 있어 빌려볼 수 있었다. - 을 다 읽었다. 3주라는 짧지 않은 시일이 걸렸다. 다른 책을 조금 집적이기도 했지만, 등장하는 인물이 무척 많고 배경이나 사건이 다종다기해서 흐름을 짚지 않으면 내용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에 조금 신경써서 읽어야 했다.
내가 황석영을 접한 것은 대학에 들고서였다. 고등학교까지는 시키는 공부만 했으니 우리 문학에 관해서는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도 국어교육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입시교육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겠다. 여튼 나는 대학에 들고서 황석영을 알았고, 틈틈이 그의 소설을 읽었다. 모랫말 아이들,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장산곶매, 삼포가는 길... 어느 새 그의 신작 소설이 발표될 때를 기다려 사서 보려고 노력했다. 민중의 삶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던 나에게는 그의 소설이 충격을 넘어 설렘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오래된 정원의 한윤희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본 유토피아 건설의 좌절은 시대의 아픔이자 인간 삶의 아픔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현우와의 사랑 이야기는 긴장과 함께 설레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황석영 소설의 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황석영의 소설을 찾아가며 읽던 내가 어느새 시들해져버렸다. 아마도 <심청>이 마지막이었을 거다. 그 이후로 <바리데기>니 <강남몽>이 나와도 나는 시큰둥했다. 그 전까지 내가 읽었던 황석영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게는 황석영만한 소설가를 찾기가 쉽지 않고 - 조정래나 조세희 선생님같은 분을 절대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황석영이 그전에 보여준 그만의 소설을 쓸 사람이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황석영에 대한 기대 또한 없지 않아서 그의 역작 <장길산>을 펼친 거였다. 물론 국어교사로서 가졌던 부끄러움도 크게 작용했다.
<장길산> VS 장길산
<장길산>의 주인공 장길산은 조선 숙종 임금 당시의 실존 인물이었다.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조선왕조실록 숙종 31권, 1697년 기사
사료에 의하면 장길산은 민심을 흉흉케한 도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황석영은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변용 재창조해낸다. 탐관오리들의 탐욕과 학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민심을 살피지 않았던 양반가의 행태, 송방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초보적 자본 시장의 활성화 - 사실 이 부분은 역사적 맥락과 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 듯하다. 소위 보부상과 시장의 활성화는 영정조 이후에 일어난 일이니 시대적 순서와 맞지 않다 - 등을 배경삼아 의적, 혹은 활빈도 장길산을 그려낸 것이다. 즉, 황석영이 실존 인물 장길산을 모티프로 창작한 역사 소설인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장길산은 역사적 실존 인물의 그가 아니라 소설 <장길산>의 그인 것이다.
<장길산>과 용화세상
장길산은 태생부터가 반체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길산의 생모생부는 노비였다. 아버지는 탈출하여 숨어지내는 처지가 되었고, 길산을 잉태한 어미 역시 사노로서 도망나왔다. 광대패에 속해 있던 장충의 도움으로 길산의 어미는 무사히 추노들을 따돌렸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길산을 낳고서 눈을 감는다. 결국 장충이 길산을 데려다 키우게 된다. 길산은 자라서 광대로서의 삶을 살게 되지만 본성이 원래 의기가 충만해서 부정과 불의를 쉽게 보아 넘기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신분적 한계가 갖는 의미를 깨달은 후로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되고 녹림당을 꾸린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활빈(活貧)의 길로 들어서고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근거지를 확충해간다. 그리고 장길산을 비롯한 활빈당은 활빈을 넘어 세상을 바꿀 꿈을 꾼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꾼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장길산과 함께 활빈 활동을 한 여환 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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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밝아올 미륵의 세계에서는 온갖 악한 것과 욕심 상극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 사이좋게 같이 사는 화평한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재물은 나누어질 것이며 땀흘리고 수고하는 보람도 똑같아질 것입니다. 땅은 기름지고 풍족하며 병고와 가난이 사라져서 계두성에서는 누구나 문물의 혜택을 고루 받게 됩니다 - 중략 - 사람의 마음도 어긋남이 없이 평등하여 만나면 즐거워지고 착하고 고운 말을 주고받을 것이며, 뜻이 틀리거나 어긋나는 말이 없어서 온 세상이 성인의 도를 이룹니다.
-<장길산> 9권, 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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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지금 우리 사는 사회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침 이 권을 읽을 때가 한미 FTA 날치기를 한 날이었으니, 장길산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어쨌든 장길산 일행이 원한 세상은 그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의 모습에 가깝다 하겠다.
그렇다면 정말 그들은 이 세상을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묘옥이 원향에게 오랜 세월이 지나야 새로운 세상이 열릴 텐데, 뭣하러 애를 쓰냐고 묻는데, 원향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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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들어 천리가 적지(赤地)가 되고 나서 소나기는 어째서 오지요? 단비가 내리지 않으면 산천초목이 모두 죽어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비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 땅은 다시 회생하고, 또 가물어 팍팍하고 또 비가 오고…… - <장길산> 9권,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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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진인(眞人)이란 무엇입니까? 진인은 따로이 있는 게 아니라 역병에 쓰러져가는 팔도의 백성들이 다시 살아 환호하며 춤추는 세상에서 서로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이가 진인이지요. 차라리 왕후장상의 씨를 새로이 만들 바에는 북관의 곳곳마다 널려 있는 무인지경으로 들어가 우리끼리 용화세상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 낫겠지요. - <장길산> 10권, 45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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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며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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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저희 활빈도가 백성의 군사임을 알고, 참 용화세상을 이루는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다닐 것입니다. - <장길산> 10권, 4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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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지금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백성을 위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순간까지 백성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애쓰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것은 길산이 살아생전에 용화세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성공에의 욕망보다 뒤이어 올 많은 백성과 민초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읽히며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고야 말리라는 역사적 낙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장길산>의 未濟괘
어쨌든 장길산의 활빈당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운주사 - 원래는 運舟寺였는데, 후에 雲住寺로 되었다고 황석영은 서술하고 있다. 運舟寺의 의미는 만백성을 바닷물 삼아 배(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앞으로 나아간다 것이다. 그러니까 만백성의 나라인 셈이다. 하지만 후에 雲住寺로 된 것은 물이 차오르지 않아 배가 구름처럼 머물렀다는 의미이다. - 천불천탑, 와불 이야기를 하며 아직 미륵의 세상, 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서술자가 소설을 이렇게 끝맺는 데에서 낙관적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
역(易)에 이르기를 미제(未濟)의 뜻이 해가 바닷속에 잠겨 있으므로 장차 밝게 떠오를 것을 안다 하였으매, 티끌처럼 수많은 생령(生靈)들의 뜻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랴. - <장길산> 10권, 469쪽
그런데 신영복 선생님은 책 <강의>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이렇게 풀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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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신영복, <강의>,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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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장길산이나 여환스님, 많은 녹림당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데에 실패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닌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밑거름이 되는 것은 앞에서의 원향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만들고자 한 세상도 완성은 아닐 것이다. 그저 보다 나은 세상의 한 과정일 것이며, 백성의 행복과 용화세상을 위한 한 방편일 뿐.
그러니 여기서도 용기와 겸손의 지혜를 얻게 되는 거다. 민중들의 좌절이 영원한 실패는 아니며 또 사소한 승리가 완성은 아니라는 것. 완성은 오히려 미궁에 가깝고 그저 진리의 편에 가까이 서려는 절제와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
뱀꼬리
묘옥과 길산의 엇갈린 사랑, 이경순의 지순한 사랑,
최형기의 지극히 인간적인 야욕과 좌절,
마감동과 최형기의 칼싸움
그리고 지금은 갈 수 없는 이북의 산세와 지형에 대한 섬세한 묘사
이북이 고향인 작가의 개인적 역량과 경험이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