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현대아산에 다니는 후배를 만났다.  
제집처럼 금강산을 드나들던 놈인데 두 가지 단언을 한다.    
"다시 남북교류는 되겠지만 그 주체는 더 이상 '현대'는 아니다"라는 것과 
"서해교전 형태의 국지전은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아래 기사를 보니 정말 평화가 전경 앞에 촛불이다.
더 이상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없다고 하지만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도 한국의 주가는 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저녁 대신으로 안동찜닭을 시켜먹으며 마눌님과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마눌님 왈, 

"진짜 전쟁이 나면 우린 어떻하지? 부여로 가서 숨을까?" 
(부여는 처가집이다.)
"나는 마흔이 아직 안 되어서 아마 징집영장이 나올껄"
(몇 해 전에 전시에 어디로 모이라는 모의 영장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럼 갈꺼야? 도망가자. 부여는 금방 잡으러 올라나?"
"교통통제가 될 거니까 자전거나 스쿠터를 한 대 사놓을까?" 

엿 같은 국가들의 전쟁에 총을 들고 참여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병역 기피자 생활도 만만해보이지는 않는다.

내일은 퀴어퍼래이드가 있는 날이다.    
이 정부 들어서 두 번째이지만 경찰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안 된다.  
(집회신고는 불허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엠비 아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들렸다가 어디 평화 캠페인 하는 곳이라도 찾아봐야 겠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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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정말....겁나는 '한반도 음모론'  
<뷰스칼럼> "한반도에서 전쟁 나면 전세계가 기립박수 칠 것"

"어떠한 작전을 수행할 의사가 있음을 암시할만한 북한군 동향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규모 병력 이동을 포함해 특정국가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정황은 없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매우 예측 불허이기 때문에 (보복 위협을) 상투적 수사로 치부하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간과할 수 없고 예의주시해야 한다."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 11일(현지시간) NATO국방장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브뤼셀을 찾은 자리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한 답이다.

지금 당장 전쟁이 발발할 것 같지는 않으나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6.25 발발 58년만에 또다시 '제2의 한국전' 발발 가능성이 국제사회에서 공개리에 언급되기 시작한 심각한 상황전개다.

재계에 나도는 '겁나는 음모론'

요즘 재계 사람들을 만나보면 "뒤숭숭하다"고 한다. 국내 정치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남북관계도 그렇고, 모든 게 불안하다는 거다. 특히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남북관계'다. 공개석상에서는 까놓고 얘기 못한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걱정들을 정말 많이 한다.

한 대그룹 산하 경제연구소의 고위관계자는 "남북간 긴장이 이렇게 높아지다가 정말 무력충돌이 발생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그러다 잘못되면 외국계 바람대로 한국경제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재계 등지에 나돌아온 하나의 '음모론'을 소개했다.

지금 세계경제는 준공황 상태다. 각국이 엄청난 재정을 쏟아붓고 제로금리 정책을 취해 간신히 공황적 붕괴 상황은 막았으나, '과잉공급' 문제는 거의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GM, 크라이슬러 등 간판기업들이 속속 쓰러지고, 일본의 IT기업 등도 극한 위기를 겪고 있다. 문제는 '과잉공급'이 빠른 시간내 해소될 가능성은 전무하며, 해소 과정도 대단히 고통스러울 것이란 점이다. 경제전문가들이 최악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U자형 또는 L자형 장기불황을 전망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준공황 상태에서 하루바삐 벗어날 수 있는 '절묘한 해법'이 나타나기를 갈망한다. 가장 좋은 해법은 '전쟁'이다. 30년대 세계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루스벨트의 뉴딜은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을뿐, 2차 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공황 탈출은 힘들었을 것이란 게 경제사가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같은 세계대전은 꿈꿀 수도 없는 상황이다. 강대국끼리 붙었다간 곧바로 핵전쟁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한반도'가 위험하다는 게 경제연구소 관계자의 지적이었다.

한국은 세계의 주요 '생산기지'중 하나다. 반도체는 세계최대 생산국이고, 조선도 그렇고, 자동차도 세계 빅5에 속한다. 만약 이들 한국 기간산업이 전쟁 발발로 초토화되거나 생산시설이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된다면, 그날부터 세계경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세계주가 역시 수직폭등할 것이다.

이 관계자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월가를 비롯한 전세계가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칠 것"이란 비유까지 썼다.

재계 "전쟁은 공멸"

또다른 대기업의 임원도 마찬가지 우려를 했다.

그는 "한 예로 경기도 기흥의 삼성전자 공장은 북한의 장사포 사정권 안에 놓여 있다"며 "장치 고장으로 생산라인이 잠시 멈춰도 반도체값이 폭등하는 마당에 전쟁이 발발해 삼성전자 공장이 타격을 입는다면 세계 반도체값은 수직폭등하며 미국,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한순간에 벌떡 일어설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재계가 평소 보수적인 것으로 보이나, 남북관계에 관한 한 기본생각은 절대 '전쟁 불가'"라며 "이는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 지난 수십년간 일궈온 기업과 국가의 모든 부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기업 프렌들리'의 위험한 '전쟁 통일론'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발하면 즉시 북을 격퇴시키고 통일을 이룩하는 강력한 대응 태세를 갖춰야 한다"며 "도발하면 북한은 망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호전적 주장을 펴, 민주당으로부터 "웬 북침통일 주장이냐"고 융단폭격을 받은 바 있다.

김 지사는 평소 기업활동에 저해가 되는 모든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자타가 공인하는 '기업 프렌들리'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접한 대기업들은 펄쩍 뛰었다. 앞에서 말한 이유에서였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친기업적 입장을 표명해온 김 지사답지 않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라며 "그런 식으로 한번 붙자는 식으로 나가다간 전쟁 발발 며칠 사이에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는 것은 물론, 기간산업이 치명타를 입으면서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방후 항간에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아무도 믿지 말라는 얘기가 나돌았듯, 지금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북한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라며 "자칫 아차 실수했다간 주변강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말리면서 우리 기업과 민족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한 원로 외교관의 경고

수십년간 외교관 생활을 해온 한 외교전문가는 "남북 모두 오바마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취임초부터 최우선 외교순위를 아프가니스탄에 두고 있다. 전투병력을 증파하고 있고, 한국 등 우방들에게도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맨해튼 쌍둥이빌딩을 공격한 빈 라덴이 아프간에 숨어있기 때문일까. 한 요인은 되겠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아프간은 탈레반이 80~90%를 장악한 상태다. 그냥 두면 곧 탈레반 수중에 들어갈 판이다. 아프간이 무너지면 다음 위험한 나라가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 내에 탈레반 지지기반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파키스탄에 핵무기 200개가 있다는 점이다. 파키스탄이 무너지면 200개의 핵무기가 탈레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미국으로선 생각도 하기 싫은 최악의 악몽이다. 오바마가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아프간 방어를 설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미국은 이처럼 핵무기에 관한 한, '관용은 없다'이다"라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대미협상용이라면 대화를 할 것이나, '핵 보유국'을 지향하는 게 분명하다면 아무리 대화를 중시하는 오바마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벼랑끝 전술을 쓰는 북한은 이런 오바마의 생각을 잘 읽어야 하고, 전쟁이 나면 모든 게 잿더미가 될 우리도 감성에 흐르지 말고 전쟁을 막기 위한 고도의 이성적 외교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험악해지는 상황...'핫라인' 부재

지금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 북한은 개성공단 임금을 4배 올리고 토지사용료는 31배를 올리라고 요구했다. 사실상의 공단 폐쇄 위기다. 마지막 남북 평화지대의 소멸이다.

특히 큰 위기는 남북간 대화 창구가 꽉 막혀있다는 점이다. 서해교전때는 양측 모두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나, 양국 지도자간 '핫라인'이 있어 전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 무렵 자주 방북했던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회장은 얼마 전 사석에서 "당시 우리군도 6명이 사망했지만 북한군은 200여명이나 죽어, 북한군부가 보복을 가하자고 강력주장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를 막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핫라인'도 없어, 자그마한 충돌도 걷잡을 수 없는 위기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다. 남북 지도자 모두 민족적 관점, 역사적 관점에서 한반도의 위기를 관리하며, 특단의 '대화 결단'을 내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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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계에서라도 빨리 평화운동이 일어나고 정권비판하면 명박이가 정신 차릴라나...ㅎㅎ 골통이라 정신 차릴런지...그나저나 김문수가 대표적인 기업 프랜들리를 외치는걸 보면..세상은 살아봐야 안다는거죠..

나무처럼 2009-06-13 18:59   좋아요 0 | URL
친재벌은 있어도 친기업은 없는게 한국인 거 같아요. 전경련 같은 경제단체도 들여다보면 사돈팔촌으로 이어진 재벌들이 좌지우지하는 거 같고...하여튼 자전거는 심각하게 고민중이랍니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알리바이라면 우리 시대의 시민들도 모두 갖고 있다. (...) 1984년 7월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어와 들여다보며 우리 시대의 이 완벽한 알리바이를 생각하고 또 그것을 슬퍼했다." 

소설가 조세희는 사북사태가 있은 지 몇 년 뒤 사북을 다녀와서 <침묵의 뿌리>에 이렇게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죄와 우리의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치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죄'와 '책임'을 구별해야 된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 죄가 있다"라는 호소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죄'는 법적 개념이기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인 또는 인류에게는)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누구나 짊어져야 할 '집단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지난 노무현의 죽음에서 나는 어떤 집단적 죄의식과 그에 대한 속죄의 행렬을 본 듯 하다. 나 또한도 어느정도의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또 다른 희생자, 이를테면 노무현이 "죽음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갔다"고 선언했음에도 이미 죽어버린 한진중공업 김주익, 홍콩에서 자결한 농민 이경해, 이라크에서의 김선일, 대추리의 주민들, 부안과 새만금... 이런 이들에 대한 집단적 책임의식과 겹치면서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다.

벌써 많이 잊혀진,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아직 장례조차 치루지 못한 용산참사, 대한통운 택배노동자 투쟁에서 목숨을 내놓은 박종태. 그리고 기륭전자와 쌍용자동차. 이런 사건에 대한 집단적 책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꽤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최소한 이 나라에서는.  

그 노력의 하나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읽어볼 참이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1985년 나온 <침묵의 뿌리>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는 이미 그 후 20년을 알고 있다.
하지만 2009년, 그리고 다가올 2010년대 어떤 진행을 맞게 될지 알지 못한다.
'침묵의 뿌리'를 찾아 캐내고 싶다.  

 
<한겨레 서평>-----------------------------------

인권침해 감추는 ‘3가지 끔찍한 논리’ 
 

“용산참사 과잉진압 안해” 문자적 부인
“정당한 공무집행”
해석적 부인
“체제전복 시도 말라”
함축적 부인
피해자도 침묵하게 하는 메커니즘 고발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 교수가 쓴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States of Denial)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20세기 이후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의 메커니즘과 이를 방관한 대중심리의 속살을 사회학과 심리학, 인식론의 틀을 통해 파헤치고 있는 저작이다.

지은이 코언은 유대인으로서 1990년 이스라엘 인권단체의 일원으로 이스라엘 당국이 상습적으로 팔레스타인 구금자를 고문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가 이른바 ‘부인의 정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새빨간 부인에서, 그가 속한 인권단체가 애당초 편향적이며 배후세력에 속아 넘어갔다는 흠집내기,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나 그것을 고문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호칭 변경 등 정당화 논리가 동원됐다. 이른바 이스라엘 현실에서 인권침해는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어쨌든 이런 문제를 계속 듣고 싶지 않다는 ‘암묵적 카르텔’ 속에서 그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속했다고 믿었던 진보 그룹마저 고문사건에 침묵하는 데 더 충격을 받았다. 


»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작은 공감과 비인간성에 대한 작은 저항이 세상을 바꾼다. 오른쪽 사진은 용산참사 현장에서 희생자 영정을 들고 묵념중인 유가족. 왼쪽은 1969년 비아프라 내전 당시 굶주려 아사 직전에 놓인 아이의 모습.  

이 경험은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코언이 인권침해와 이로 인한 인간의 고통을 분석하는 틀은 ‘부인’(Denial)이라는 개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코언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한다고 말한다.

인권침해를 부인하는 메커니즘은 문자 그대로 사실을 부인하는 ‘문자적 부인’, 사실은 인정하지만 다른 해석을 갖다 대는 ‘해석적 부인’, 사실과 그 해석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함축적 부인’으로 나뉜다.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국가권력은 “학살은 없었다”(문자적 부인)고 사실 자체를 공식 부인한다. 다음은 완곡어법이나 초점을 흐리는 용어를 써서 “실제론 그렇지 않다”(해석적 부인)고 주장한다. 인종청소를 인구교체로, 학살을 부수적 피해로 표현하는 식이다. 영국군은 북아일랜드에서 ‘고문’을 자행한 뒤에 이를 ‘집중 심문’이라고 표현했다. 인권침해 증거가 너무 많거나 여론의 향배에 따라 “그 사건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함축적 부인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올해 초 일어난 용산참사에서는 3가지 부인논리가 다 동원됐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없었다.”(문자적 부인) “사망자 발생은 사실이지만 정당한 공무집행중 일어난 것으로 인권침해라 할 수 없다.”(해석적 부인)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세력의 체제전복 시도다.”(함축적 부인)

코언은 이 책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에서부터,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집시 대학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주민 탄압, 소련 스탈린의 인권유린,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아르헨티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 동티모르·르완다 학살,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민간인 학살 등 20세기 이후 발생한 다양한 역사적 인권침해 사건들을 종횡하고 있다. 권위적 국가권력의 인명학살과 인권유린은 이를 바라만 보는 방관국가들에 의해 더욱 악화됐다. 1992년 뼈만 남은 보스니아 무슬림 주민들의 이미지와 함께 세르비아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폭로되었을 때 미국 정부는 아는 바 없다고 잡아떼다 결국 처음부터 알았다고 인정했다. 참상을 알고도 모른 척 부인했던 것이다.

코언이 이스라엘에서 몸소 체험했다시피 ‘부인’이 일부 우익세력이나 권위주의 국가권력 혹은 가해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도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려 들지 않았다. 스탈린이 고문과 자의적 구금을 자행하고 굴락 강제수용소를 설치하던 시점에 소련을 방문했던 그들은 문제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긴 했지만 자기가 본 것에 담긴 의미를 부인했다. 코언은 그런 태도가 공산주의 평등사회라는 대의명분에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꼬집는다.

코언은 인권침해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 제도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 인권침해 감추는 ‘3가지 끔찍한 논리’
 
코언은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자기기만은 인간 존재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코언은 왜 그 사건에 침묵하고 부인하는지 묻기보다 대다수가 부인하지만 왜 어떤 이들은 이를 ‘시인’하고 인권단체에 가입하며 행동에 나서는가, 왜 어떤 사람은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이타적 인간들이 더욱 많아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을 양성하고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을 옮긴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는 “코언의 작업은 지금까지 인권침해 연구와 인권운동이 상정해온 ‘사실→진상규명→처벌·제재→재발방지’라는 문제 해결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한다”며 “기존 관점은 인권침해 사실이 폭로되어도 왜 가해자는 끝까지 부인하기 십상이고 왜 관찰자들은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눈을 감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코언은 오랫동안 방치돼온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 곧 현실의 부인 메커니즘을 해부함으로써 21세기 인권운동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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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타인 고통에 대한 공감과 정치적 연대”
‘잔인한 국가…’ 저자 코언 교수
 
 


» 스탠리 코언(67) 영국 런던정경대학 명예교수

20세기 인권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온 인물. 인권과 일탈사회학·범죄사회학 분야의 독보적인 학자. 지행합일의 행동하는 지식인.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쓴 스탠리 코언(67·사진) 영국 런던정경대학 명예교수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권침해와 인간 고통이라는 주제를 평생 탐구해온 학자이자 인권운동에 매진해온 운동가이다. 유대인인 그는 남아공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이스라엘로 ‘귀향’해 18년을 살다가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흔치 않은 궤적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1942년 요하네스버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학생 시절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분리정책) 반대운동에 투신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타향살이를 해온 부모와 유대인 동포사회의 영향 아래 사회주의적 청년 시온주의 운동에 빠져들었다.

그 자신이 회고하는바 유년기에 겪었던 경험은 그의 평생의 학문세계와 삶을 규정하는 원초적 밑불을 이룬다. “1950년대 요하네스버그의 한겨울밤. 남아공 여느 중산층 집처럼 우리 집도 아버지 출장 때면 야경꾼을 부르곤 했는데, 줄루족 출신의 야경꾼 노인이 외투 깃을 올리고 웅크린 채 숯불 곁에서 손을 비비는 것을 창 너머로 보았다. 오리털 이불이 선사하는 포근한 잠자리에 들다가 나는 퍼뜩 왜 저 노인은 밖에 있고 나는 안에 있는가 생각했다. … 왜 그들은 나를 주인나리라고 부르는 걸까. … 훗날 아파르트헤이트, 곧 인종차별과 특권, 불의 등을 사회학적으로 고민할 때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던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코언의 학문은 범죄·일탈 사회학 시기와 인권의 시기로 나뉘는데, 1972년 런던에서 출간된 <대중의 적과 도덕적 공황>은 지금까지도 범죄사회학 분야의 손꼽히는 저작으로 알려졌다. 코언의 인권사상은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권은 ‘인간’과 ‘권리’로 이뤄진 개념이고 권리 담론의 바탕에는 인도적 휴머니즘이 깔려 있어야 하며, 다른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를 정치적 연대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의 깊은 의미라고 코언은 말한다.

영국 에식스대학에서 촉망받는 교수생활을 하던 1980년 그는 이스라엘 헤브루대학의 초청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향’을 결행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 이스라엘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헤브루대학에서 이스라엘 범죄 현황을 연구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운동으로 나아간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 노엄 촘스키와 교분을 맺게 된다. 1987년 팔레스타인 주민의 봉기(인티파다) 직후 이스라엘 당국의 구타·고문·살상·추방 등의 실상이 인권단체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지만 진보 자유주의자들조차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데 그는 절망했다. 결국 그는 98년 ‘이향’을 결행한다.

코언은 현재 파킨슨병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라고 한다. 그는 촘스키가 가장 존경하는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촘스키는 코언 기념논총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우리 미래에 희망이 있다면 코언이 용기있고 헌신적이고 정직하게 걸어간 길을 다른 사람들도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리라.”  

허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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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9-06-07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처럼님 안녕하세요. 오래 전 조세희의 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서경식과 코언의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맥락을 잘 짚으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무처럼 2009-06-07 12:16   좋아요 0 | URL
네.. 반가와요. 죄의식과 책임에 대해 조세희의 글이 깊다면 서경식은 그 깊이를 확장시키는 것 같아요. 코언은 우선 매우 두꺼울 듯 하군요^^

머큐리 2009-06-07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찜해두고 있어요...나중에 나무처럼님이 리뷰해 주시겠죠 ??

나무처럼 2009-06-07 19:52   좋아요 0 | URL
제 리뷰가 워낙 시원치 않아서^^;
 

"고통은 계량되지 않는다"
- 고통을 수치로 환산하고 계량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상화, 타자화를 경계할 것인가

또한 '증언의 도구화'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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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고 듣는다는 것
(정유진 / 오키나와대학 특별연구원 , yujinblue@yahoo.co.kr> )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을 둘러싼 어떤 정치

기지촌 여성운동단체인 두레방,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그들의 편>에 서서 일한다고 간주되는 내가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괴감같은 것이었다. 그런 시달림은, 정도는 달라졌지만, 2007년 현재 일본 교토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도 문득문득 나를 덮치곤 한다. 이 글은 NHK히로시마 방송국이 지난 1974년과 75년에 거쳐, 원자폭탄의 참화를 그림으로서 남겨 두고자하는 취지로 기획한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市民が描いた原爆の繪)>에 관한 이야기를, 고통 담론을 둘러싼 문제의식(혹은 나의 자괴감)에 비추어 본 소고이다.

어떤 전제 -고통은, 당사자 밖에 이해할 수 없다?

"원자폭탄 피해자들은 상상의 너머에서 서성거리며 이야기 하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다 아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피폭자들이 그린 <지옥화>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원자폭탄 체험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위와 같은 말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어떤 암묵적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감정이나 체험이라는 것이, 개개인의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단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단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은 “피해자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자 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의 문제제기는 타인의 고통이 내 몸 안에 있을 가능성, 나의 고통이 타인의 몸 안에 있을 가능성, 혹은 서로의 몸과 몸사이에 고통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단언은, 고통을 계량의 문제로서 다루려고 하는 시선의 결과이기도 하다. 고통을 계량의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과 관련한 고통이기때문이야말로, 오히려 “혹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희망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어떤 도박과 같은 것일지라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고통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는 식으로 설정되어 버릴 때, 결국 피해자의 경험은, 고통은, 대상화, 타자화, 본질되는 경향성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감정은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처한 여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안에 가두어 고정시키려는 본질화된 시선은 피해자의 역사성을 억압한다.
군 위안부 여성이 어린 나이에 강제연행되어 겪었던 성폭력의 고통, 간신히 살아돌아왔지만 ‘몸이 망가져 정상적인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느꼈던 고통, 증언대에 서서 본인의 체험을 이야기할 때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시선에 의한 고통은 모두 제각각 다른 성격의 고통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강제연행되어 겪었던 성폭력의 고통’ 만이 반복될 때 그들의 체험은 ‘식민지치하에서’라는 식으로 현재와는 단절된 과거의 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그러한 의미화 과정이 피해자를 억압하는 것과 맞물리게 된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 줄 아느냐"라는 고발의 정치. 혹은 고통의 비참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민족의, 여중생의, 할머니의, 대추리주민의’라는 식으로 ‘피해자의’라는 소유격을 절대화하면 할 수록 피해를 받았다고 간주되는 그들의 고통은 영구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시선은, 결국(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관계라는 것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고통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피해자를 규정지으려는 논의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 간주되는 그들과 나와의 거리(차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떠한 맥락에서 그것이 의미화되고 있는지 되묻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정치공간은 생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 당사자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유동적 개념이다. 정치적 이해관계(利害關係)를 논의할 수 있는 장(자리)가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서의 논의를 통해 이해(利害)라는 것은 상황에 의해, 맥락에 의해 변화될 수 있음을, 관계(關係) 역시 다르게 구성될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물철학자인 하러웨이(Donna J. Haraway)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라 부분적이며 상황적 지식에 천착했던 것은 이해관계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통찰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증언을 듣는다는 것

“우리들이 원자폭탄의 참화를 경험하는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원자폭탄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체험을 증언하는 것이다”
“원자폭탄의 피해자들은 피해의 실상뿐만아니라, 핵근절을 호소하고 있다”
“원자폭탄 피해자들은 스스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찝찝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은) 원자폭탄 피해라는 직접 체험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다음 세대에 계승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NHK히로시마 방송국이 지난 1974-1975년에 기획한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에 대한 “평가(의미부여)”들이다.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이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는가. 증언이라는 일은 왜 중요시되고 있는가. <전쟁체험을 계승하기 위해(핵근절을 위해서>라는 식의 해석에 대하여 나는 저항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정치를 둘러싼 위계관계, 즉 큰 정치와 작은 정치라고 간주되는 위계적 구분에 관한 것이다.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체험을 말한다는 것이, 마치 <핵근절의 호소>와<전쟁체험의 계승>을 위한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이것은 개개의 고통이 역사라는 것을 보충하기 위한 재료, 하나의 도구로서 취급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라는 것은 큰 정치이고, 개인의 것으로 간주되는 고통은 작은 정치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때의 역사라는 것은 무엇을 위한 누구의 역사인가?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역사기술자라는 개인과 고통받은 개인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 개인들인가?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두 번째는 <대의를 위한 올바른 증언>이라는 식의, 증언자에게 부여된 ‘주체화’의 문제일 것이다. 주체성이 부여된 것에 의해 위축되는 정치의 영역이란 무엇인가. 혹은 증언자에게 주체성을 담보시킴으로서 획득되는 정치의 영역이란 어떤 것인가. 원자폭탄의 피해자는 스스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찝찝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려서는 안되는 것일까. 고통과 피해의 실상만을 그려서는 안되는 것일까. 고통은 아프다는 감정 그 자체로만은 무언가 부족한 것, 불충분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왜...

이러한 논의에는 감정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항적인 정치의 구분과 고통을 타자화하려는 시선이 뒤얽혀 있다. 이 시선은 고통받는 몸을 억압하고, 몸과 몸사이의 엉겨있는 말들을 억압하고, 고통받는 몸들의 연대를 억압한다. <참의 고통>을 요구하고 <올바른 증언>을 전유하려는 시선은 수단로서의 고통을 요구하는 욕망의 시선이기도 하다.

피해자의 체험이 <핵근절을 위한 호소>로서, <계승해야하는 전쟁체험>으로서 의미화되는 것은 증언자와 청자 사이에서 일어난 우연한 결과일 뿐, 증언이라는 것이 핵근절을 위해서, 전쟁체험 계승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목적으로 상정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원폭체험이란, 계승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처해있던 시간과 청자가 존재하는 현재라는 공간을 들락날락하면서 개입적으로 사고해야만 하는 어떤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에 얽혀있는 내러티브는 미완의 것이고 미정(未定)인 것이며, 그들의 목소리는 미지의 관계로서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시민이 그리는원자폭탄 그림>을 표본적 기억으로서, ‘성스런’ 기록으로서 피해자의 소유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자기와 타인의 고통을 규정하거나 고발하기 보다는, 아프다고하는 신체감각을 관계적인 감정으로, 관계성으로 사고하려는 노력과 시도들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성(삶의 가능성)으로서의 “여성주의 평화”의 전망을 일구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군 위안부 여성”, “기지촌 매춘여성”, 성매매산업에 합법적으로 종사할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 성폭력 ‘피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혹은 병역기피자, 군의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혹은 그들의 침묵은 한국사회에 어떤 메아리로 남아있는가. 또한 어떤 울림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는가. <시민이 그리는 원자폭탄 그림>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림출처>
http://www.pcf.city.hiroshima.jp/virtual/VirtualMuseum_j/visit/art/art00.html#

다음은 그림을 그린 분들의 설명입니다.
1.<쫓아오는 불을 피해 강에 뛰어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떠내려갔다>,菅 葉子, 원폭 투하 당시 14세, 그림 그린 때 43세
2.<수십 명의 승객과 함께 타버린 시내전차와 바깥에 쓰러진 희생자>,橫山 正 ,원폭 투하 당시 36세, 그림 그린 때 66세
3.<거대한 불기둥>, 松室 一雄, 원폭 투하 당시 32세 그림 그린 때 61세
4.<건물에 깔려서 화염에 싸인 사람을 구하지못하고 그저 바라볼 뿐>, 宮地 臣子, 원폭 투하 당시 34세, 그림 그린 때 64세


*글을 퍼 가실 때에는 출처를 꼭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www.unninet.co.kr) 2007년 8월 특집 '전쟁에 관한 그녀들의 기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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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________________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많은 기쁨이 있지만 많은 슬픔도 있다. 그래도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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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다마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 서정춘 '죽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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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영결실... 다만 술을 많이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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