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죽은 지 딱 100년이 된 날이었다. 그날 난 깜짝 놀랐다. 한국사회가 이토록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사모했었나 싶어서 말이다. 위에 인용문은 내가 안중근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말이다.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던 장지락이란 이름의 조선인. 마침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비밀리에 처형된 뒤 40여 년이 지나서야 중국에서 공산당원 자격이 회복되었던 그이의 삶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김산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만약 김산이 작가였다면 아마도 조지 오웰과 같은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김산이 죽었던 1938년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빅 브라더’를 만들어낸『1984년』의 작가, 스탈린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반공소설’의 대명사가 된『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은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으며 여러 편의 르포르타주를 남긴 르포작가이기도 했다. 몰락한 부르주아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영국의 명문으로 알려진 이튼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경찰시험을 보고 버마로 가서 5년 동안 경찰 노릇을 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제국의 말단 관리로서 느껴야 했던 자괴감은 결국 그를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말이 좋아 전업 작가이지 이십대 후반의 빈털터리였던 그는 2년여 동안 파리의 쪽방촌과 런던의 부랑자 시설을 전전하며 뜨내기 생활을 하게 되고 이때의 경험을 통해 그의 첫 르포작품이자 조지 오웰이란 필명을 최초로 사용했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탄생한다. 언뜻 보면 치기어린 젊은이의 방랑기이자 체험기처럼 보이지만 도시 빈민층의 생활에 대한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지금의 한국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빈곤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 자선이 갖는 위선에 대한 통찰은 그를 주목할 만한 신예작가로 만들었다.

이 작품을 읽고 그를 눈 여겨 보았던 진보적인 독서모임 ‘레프트 북클럽’의 편집자는 그에게 영국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한다.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플,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돌며 탄광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주택문제와 실업의 문제 등을 조사하고 쓴 르포르타주가 바로 올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오웰은 책의 절반을 할애하여 자신을 비롯한 부르주아 지식인에게 얼마나 뿌리 깊은 속물근성이 있는지(“궁극적으로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이른바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이들이 왜 대중들에게 그토록 외면당하는지(“기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홍보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신봉자들인 것이다”)를 조목조목 꼬집으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되려 파시즘을 도와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은 오웰에게 집필을 맡겼던 ‘레프트 북클럽’ 편집자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고, 책은 출간과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정작 오웰은 이 책이 나오기도 전에 파시즘과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스페인 내전은 반파시즘 진영인 좌파 인민전선(공화파) 정부와 가톨릭교회와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 간의 전쟁이었지만 그 실상은 좀 더 복잡했다.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자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던 것은 노동자들, 빈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으며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스탈린주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어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탈로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했던 우파 자유주의 진영과 역시 혁명을 원치 않았던 소련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공산당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마침내 양 측 간에 무력충돌까지 빚어진다. 그 가운데 많은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은 ‘트로츠키주의자’, ‘프랑코의 내부첩자’로 지목되고 경찰이 동원돼 색출작업이 벌어진다.

카탈로니아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아무도 아첨하거나 팁을 받지 않았고 웨이터와 구두닦이가 손님을 똑바로 보며 ‘동지’라고 부르는” 사회분위기에 감동받고 “공동의 품위를 위해” 민병대에 들어갔던 오웰은 애초부터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내전을 승리 뒤 혁명을 할 것이냐, 내전과 혁명을 동시에 할 것이냐 하는 정치적인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총도 없이 전선에 배치되었던 그에게는 더 나은 무기가 언제 보급될 지가 관심사였고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툭툭 치며 담배를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는 평등하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더 믿음직한 군대”가 언제 파시스트와 제대로 싸울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와 공산당의 배신이 무력충돌로까지 이어지자 더 이상 방관자로 남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피와 살을 가진 진짜 노동자들이 그들의 천적인 경찰이 충돌하는 광경을 보니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오웰 또한 프랑코의 첩자인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가까스로 스페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는 끝을 맺는다.

이 세 편의 르포르타주가 씌어진 1930년대는 어떠한 시대였나? 1929년 미국 증시의 폭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극심한 경제난에 봉착했다. 공장마다 실업자가 속출했고 도시마다 부랑인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기계화, 산업화, 생산성 증대만이 진보라며 절대시되었고 우생학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나치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도 정신장애인, 알콜 중독자, 장애인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법들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가 공공연히 자행되던 때였다. 그 가운데 조지 오웰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혁명과 전쟁은 패배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파시즘에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고 『1984년』을 쓴 다음해인 1950년 오웰은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산문의 한 대목이다. 스페인 내전이 아니라 내전 속 또 하나의 내전에 대한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그는 냉소와 환멸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인간의 고상함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카탈로니아는 평택 대추리, 서울 용산, 제주 강정마을에도 있었던 것 아닐까? 도처에 있는 카탈로니아를 위해 더 많은 오웰, 더 많은 르포르타주가 필요하다.

 

 

 

 

 

 

 

 

 

- <인권오름>에 보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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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3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별개로. 고통을 증명한다는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잔손택이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한 질문이다.
<프레시안>이 '이미지 프레시안'(http://www.imagepressian.com/)이란 걸 만들었다.
왜 '포토 프레시안'이 아니라 '이미지 프레시안'인가?
같은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을 위해서 필요한 건 도대체 무엇일까?
사진을 통해 맥락을 드러내는 것, 이야기 하기 혹은 말걸기가 어느 만큼 가능할 것인가?
'이미지 프레시안'은 어떤 이해와 기억을 우리에게 전할 것인가?
아무쪼록 '이미지 프레시안'이 충실한 기록자인 동시에 현실에 관한 탁월한 해석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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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과 없음 -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윤구병 지음 / 보리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여기 그림 하나가 있다.  

있는 것

없는 것

위에 있는 그림 중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실선은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형태로 있을(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


<있음과 없음>은 흔히 '존재와 무'라고 철학에서 일컬어지는 있음과 없음에 대한, 존재론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책을 읽고 3시간 가까운 강의를 들었지만, 감히 존재론에 대해, 윤구병의 존재론에 대해 입을 뻥긋하기도 벅차다. 어쩌면 철학에서 가장 머리 아픈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수학과 자연과학, 불교와 도교, 기독교 등 종교의 영역까지 맞닿아 있는 분야여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존재론은 윤구병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는' 엄밀성을 가져야 한다(그래서 논리학, 수학과 맞닿아 있다. 집합, 직선과 삼각형, 원주율, 적분과 미적분이 등장한다). 다시 그의 말에 따르면 존재론(그리고 철학)의 과제는 "가장 큰 하나인 있는 것과 가장 작은 하나인 그 무엇을 양극단에 두고 이 두 끝, 한계 사이에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이 어떻게 배열되는지, 차례로 하나하나를 겹쳐서 우주의 전체 구조와 그 구조에 따르는 기능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존재론의 과제는 종교와 철학에서 과학으로, 빅뱅이론에서 소립자까지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의 신앙에 가까운 과학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자연과학, 수학은 아직도 원주율(파이)의 어떤 규칙성도 질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직선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법칙을 곡선의 세계, 원에서 찾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윤구병은 농사짓는 철학자이다. 철학과를 나와 한국 잡지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지냈고, 어린이 책으로 유명한 보리출판사름 만들었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1995년 변산에서 공동체 학교를 열고 농사를 짓는 이다. 그래서 그의 존재론, 그리고 철학은 서양철학에도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편 불교, 도교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있는 것과 없는 것보다 있을 것과 없을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세상은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없는" 세상이며 그럴 때 존재론은 객관성이 아닌 당파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존재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가는 선무당이 사람잡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다시 첫번째 질문,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실선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답을 하자면 실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실선이 있는 것이라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나가 되고, 실선이 없는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가면 좀 있는 것, 좀 더 있는 것, 조금 더 더 있는 것...오른 쪽으로 가며 조금 없는 것, 조금 더 없는 것, 조금 더 더 없는 것... 바로 실선, 경계에서 운동이 생겨난다. 실선이 없으면 다 있거나 다 없는 세상이 되고 말기에 실선, 경계야 말로 존재하는 세상을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열쇠이며 운동의 출발점인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만이 아니다.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 해가 뜨고 지는 일까지, 운동에서 관계맺음은 핵심이고 본성이다. 운동은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 본성에 대한 탐구, 경계에 대한 존재론, 존재에 대한 질문, 운동하는 존재의 철학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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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송두율, 이 거대한 질문 / 우석훈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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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난해 어느 다큐 감독으로부터 '송두율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곧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계도시2>라고 했다. 솔직히 <경계도시1>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마치 금기의 언어인 것처럼 내 몸 어딘가를 찌릿하게 했다.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래는 <경계도시2> 공식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SYNOPSIS
2003 년,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37년만의 귀국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는 열흘만에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추락하고, 한국사회는 레드 컴플렉스의 광풍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친구들조차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2003년 그는 스파이였고, 2009년 그는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그의 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DIRECTOR’S NOTE
Dynamic Korea, 한국사회는 여전히 숨 가쁘다. 그렇게 사건으로부터 6년이 흘렀고, 사건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지나버린 과거 사건일 뿐이라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는 그때로부터 과연 얼마나 멀리 왔는가? 송두율 교수 사건을 통과하면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무엇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우리를 움직이는지... 이 영화가 한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거울이 되기를 희망한다.

[출처] [경계도시 2] 작품정보|작성자 bordercity2 


#7.
몇 해 전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를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적 있다. 나였는지, 그 자리에 다른 누구였는지 모르겠지만 후마니타스에서 낸 책들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 무었인지 물었고 그 대답이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라는 책이었다. 첫 장을 펼치자 책은 2003년 여름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가 귀국했을 무렵,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중 '노동당 입당', '북한 정치국 위원'이란 말들이 언론에 등장했을 때, 한 강연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받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한 번 허탈했을 때, 그의 부인과 아들이 구명운동을 하고 다니는 것을 지켜봤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고백하자면 나또한 그와의 '비판적 거리두기'라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그저 광기를 피하고, 혹은 마녀사냥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6.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1부는 구속 이후 심경을 메모형식으로 담고 있는 '한 경계인의 비망록'이며, 그가 한국에 머물렀던 2003년 가을부터 2004년 여름까지 썼던 강연문(그러나 끝내 발표되지 못한 강연문도 포함되어 있다)과 편지글, 재판 과정에서의 최후진술 등을 담은 것이 2부다. 3부는 그가 독일에 돌아온 이후 사회와 철학, 통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이고, 4부는 박상훈 대표와의 대담이다. 

#5.
그리고 부록으로 '사태 전개의 기록'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나는 '송두율 사건'의 이해를 위해 이 부록을 먼저 짧막하게 요약하고 싶다. 

- 송두율 교수는 2003년 9월17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국정원에 자진출두, 이후 네 차례의 조사를 받는다.  
- 9월30일 국회에서 정형근 의원이 송두율 교수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했다고,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이 사건이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 사건'이라고 언론에 공표했다. 
- 10월14일 송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노동당 탈당, 독일국적 포기 등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 10월22일 송 교수는 서울구치소에 입감되었고 2004년 1월까지 그의 스승이자 저명한 철학자 하버마스, 노벨문학상 수상자 권터 그라스 등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 2004년 4월13일 국제엠네스티는 송 교수를 양심수로 지정했다.
- 7월21일 2심판결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며 광주 망월동과 그의 고향 제주를 방문한 뒤 8월5일 독일로 출국했다. 

#4.
그는 국정원 조사를 각오하고 귀국했다고 했다. 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간단하고 형식적인 조사라고 했지만 그러하더라도 이러한 조사를 거부하며 끝내 귀국을 거부했던 윤이상 선생에 비춰 국정원 조사를 받아들인 그에게 나는 약간의 실망감을 가졌다. 그런데 4부 대담을 보면 사실과 다르다.   
"조사에 응하려 했다면 그전에 벌써 한국에 갔겠지요. ... 국정원과 기념사업회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며 입국 시 공황에서 내게 요구했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당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얼마나 그를 모시고 싶었는지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나는 그의 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어쨌든 결코 간단하지도 형식적이지도 않은 국정원의 조사 가운데 그는 1973년 북한 입국 시 노동당에 가입하는 서류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말이 보수 정치인과 언론을 통해 툭 튀어져 나왔다.
이 때부터 과연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 그가 거짓말을 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젊은 날 북한에 입국하며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말을 스스로 밝히지 않은 것의 연장선 상에서 그를 못 믿을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송씨에게 실망... 국민에 보다 진솔해야" , "송씨 친북행위, 민주화운동 욕되게 해"... 보수 정치인의 말이 아니다. 김근태, 장기표의 발언이다. '좌파 지식인의 배신', '사상적 간통'... 물론 보수 언론의 경우 더욱 심했지만 국가보안법을 없애라고 요구해온 이른 바 개혁진영, 진보진영에서의 이같은 태도는 또한 놀라웠다. 이들이야 제도권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 황석영이 그를 찾아가 "공개적으로 전향할 뜻을 발표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고 영구 귀국 의사를 표명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전향공작 전담반이 아니라 한국사회 존경받는 작가가 말이다.
국가보안법 체제,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이 속한 정치조직을 미리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는 사회였다. 형법 어디를 뒤져도 거짓말이 죄라고 써있지 않지만 적어도 북한과 관련되어 거짓말을 한 사람은 죄값을 치뤄야 한다.
결국 재판에서 그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부분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독일국적을 가졌던 그가 북한에 들어간 것도 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단 한 가지, 북한을 좋게 이야기하고 남한을 헐뜯었다는 것. 그건 이미 그의 저술활동을 통해 이미 드러나있던 것이었다.  

#3. 
3부 '다시 경계의 공간을 열며'에서 그는 경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계선은 원래 전투적 개념이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선으로서 공격과 방어를 가르는 배타적 개념이다. ... 그러한 경계가 선이 아니라 면이나 공간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경계면이나 경계공간은 이미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없는 제3의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배타적인 이쪽과 저쪽은 대체로 이러한 제3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들거나 아니면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한다."
"0과 1 사이에는 무수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제3의 무엇을 인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불확실성이나 애매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그것도 당장에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논거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헛소리거나 아니면 중간에서 미적거리는 기회주의자의 억지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경계인'이 때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2.
그는 이 책 서문 말미에 이렇게 썼다.
"야만과 광기가 무섭게 휘몰아쳤던, 너무나도 낯선 땅에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남편과 아버지를 지켜냈던 아내와 두 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1.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송두율 교수가 일상의 철학적 주제를 엮어 만든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고 그에 대한 긴 편지를 받았다.
" (2004년 독일로 돌아간 뒤) 지난 2년 반 동안 선생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송두율 사건'은 선생님의 출국과 더불어 사회적 공론의 의제에서 갑작스럽게 실종되어 버린 겁니다. .. 모든 논의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 결국 2003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약 10개월, 그리고 그 안팎의 시기를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기록'을 다시 접하면서 과연 이 땅에서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여지가 얼마나 남았나 하는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권력의 핵심은 망각하게 하는 것이라며 기억하기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는 그 평범한 진리조차 실천해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이번 책이 '침묵과 망각의 카르텔'이라 부를 만한 그간의 상황에 대해 뭔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0.
며칠 전 윤구병 선생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들었다. 거기서 철학하는 일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묻지 않으면 답할 수 없다고 했다. 혹시 나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대로 된 답만을 구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깨우치기 위해서는 들어야 하고, 듣게 위해서 물어야 하고, 묻기 위해 제대로 된 물음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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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3-1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개봉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ㅎㅎ
 

정기구독자가 좀처럼 늘고 있지 않다. 아니 줄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 편집자의 게으름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도 한 번 올려본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 좀 더 제대로 된 구독자 확보 방식을 고민해봐야 할 텐데...  
나조차도 불과 두어 개의 잡지를 정기구독할 뿐이고, 그나마도 끊을까 말까를 늘 망설이는 주제라 남부끄럽다. 솔직히 그리 재미있는 내용도 아니다. 세련되지도 못했고 쌈박하지도 않다. 이 사회의 어둡고 안타깝고 화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다수의 잡지가 광고로 먹고사는 실정이다. 광고를 받지 않고(책 교환 광고 제외) 정기구독만으로 운영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지속될지, 언제까지 실현가능할 지 모르겠다. 
그래도 참 좋은,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날카로운 비수 같은 글을 보내주는 필자들에게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이렇게 한 권이 나오면 또 다음 호를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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