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별개로. 고통을 증명한다는 것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잔손택이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한 질문이다.
<프레시안>이 '이미지 프레시안'(http://www.imagepressian.com/)이란 걸 만들었다.
왜 '포토 프레시안'이 아니라 '이미지 프레시안'인가?
같은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백이 될 수 있으며, 실제 현실의 특정한 순간을 담은 믿을 만한 복사본이자 필사본인 동시에 그 현실에 관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을 위해서 필요한 건 도대체 무엇일까?
사진을 통해 맥락을 드러내는 것, 이야기 하기 혹은 말걸기가 어느 만큼 가능할 것인가?
'이미지 프레시안'은 어떤 이해와 기억을 우리에게 전할 것인가?
아무쪼록 '이미지 프레시안'이 충실한 기록자인 동시에 현실에 관한 탁월한 해석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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