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상이 불순해서 그런지, 주변에 있는 이들 열에 아홉은(아니 열에 열 가깝다) 이번 평창 올림픽 유치에 딴지를 건다. 내 경우에는 남의 잔치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거 같아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 아홉시 뉴스를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뉴스에서 감격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그들을 그저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넘겨서야 하겠는가. 어떤 동기가 부여됐을 수도 있고 이해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그저 애향심이 커서일 수도 있다.

평창에 대해 딴지를 거는 사람들을 보고 왜 잔치집에 재를 뿌리냐고 성내는 사람도 있다. 남의 잔치집에 가서 감놔라 배놔라도 웃기는 일이지만 잔치집에 가서 재를 뿌리는 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이건 도대체 내 잔치인가, 남의 잔치인가, 우리 모두의 잔치인가?

우리의 잔치라면, TV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사라고 하는데, 그럼 나도 즐거워야 하는데 영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남의 잔치라기에도 뭔가 게름직하다. 진보신당은 논평에서 "국제 경기대회는 경제적 이익을 고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고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감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지만 동계올림픽은 일단 전 세계 스키나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잔치여야 하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판을 벌일 수 있게 자리를 펴주는 평창, 강원도민의 잔치여야 한다. 잔치판을 벌이는데 얼마가 남거니 모자라거니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천박하고 너무 야박하다. 내가 즐겁고 네가 즐겁고 우리가 즐겁다면 밑질 수도 있는 게 잔치인 것 아닌가.

문제는 제 주머니 불리는 놈과 밑지고 마당 쓸고, 음식하고,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 그럴 거 같다는 거다. 그래서 영 잔치 기분이 안 난다.

어쨌든 한창 기분이 업되어 흥겨운 사람에게 재를 뿌리지는 말자. 언론을 보고 재를 뿌려 달라는 말도 하지 말자. 대신 누가 뒷주머니를 챙기고 누가 뒤치다꺼리를 하게 내몰리는지에 대해서도 제발 균형감 있게 다뤄줬으면 하는 바램, 너무 큰 기대일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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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1-07-0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이에요.. 스포츠인들을 보면 정말 잘 된 일이지만.. 같이 나오던 mb를 보면 왜 자꾸 원전수주가 떠오르는지..ㅠㅠ 평창 땅투기꾼들 신났죠 뭐..
그래도 김연아 눈물 글썽이는 거 보니까 마음이.. 잘됐다 싶더라구요.
 


멀리 있는 무덤             

                -- 金洙暎 祭日에(김영태)



6월 16일 그대 제일(祭日)에

나는 번번이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지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가던

좁은 잡초길엔 풀꽃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피어 있겠지

금년에도 나는 생시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대신에 山 아래 사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시집(詩集) 한 권을 등기로 붙였지

객초(客草)라는 몹쓸 책이지

상소리가 더러 나오는 한심한 글들이지

첫 페이지를 열면

그대에게 보낸 저녁 미사곡이 나오지

표지를 보면 그대는 저절로 웃음이 날 거야

나같은 똥통이 사람 돼 간다고

사뭇 반가워할 거야

물에 빠진 사람이 적삼을 입은 채

허우적 허우적거리지

말이 그렇지 적삼이랑 어깨는 잠기고

모가지만 달랑 물 위에 솟아나 있거든

머리칼은 겁(怯)먹어 오그라붙고

콧잔등엔 기름칠을 했는데

동공(瞳孔)아래 파리똥만한 점(點)도 찍었거든

국적없는 도화사(道化師)만 그리다가

요즘은 상투머리에 옷고름

댕기, 무명치마, 날 잡아잡수

겹버선 신고 뛴다니까

유치한 단청(丹靑)색깔로

붓의 힘을 뺀 제자(題字)보면

그대의 깊은 눈이 어떤 내색을 할지

나는 무덤에 못가는 멀쩡한 사지(四肢)를 나무래고

침을 뱉고 송곳으로 구멍을 낸다우

간밤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이렇게 시든다우

꿈이 없어서

꿈조차 동이 나니까

냉수만 퍼 마시니 촐랑대다 지레 눕지

머리맡에는 그대의 깊은 슬픈 시선이

나를 지켜주고 있더라도 그렇지

싹수가 노랗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어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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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부터 맥락을 갖고 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했다. 르포르타주라는 큰 범주와 구술사라는 연구분야에 눈길이 갔다. 당장 지도를 그려내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지만 일단 텍스트를 모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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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억 냉전의 구술
김귀옥 외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8년 5월
23,000원 → 23,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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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구술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 2010년 6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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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개정판
김원 지음 / 이매진 / 2006년 4월
35,000원 → 31,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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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한국 여성의 역사
박수정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4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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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선배들이 일본어로 된 책을 구해 골방에 모여 강독했다는 그 책... 아직도 풀뿌리운동, 직접민주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그 책... 워낙 유명하기에 제목만 알고 있다가 지난 연휴에 읽게 되었다.  

혹자는 교육에 대한 책으로 알고 있지만 막상 읽어보니 혁명과 사회운동에 관한 책이다. 사실 진정한 교육이야말로 혁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교육만큼이나 반동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희망은 인간의 불안전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드러낼 수는 없다."


--------------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억압과 착취와 강간을 저지르는 억압자는 그 권력을 피억압자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으로 만들지 못한다. 오직 피억압자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 권력만이 양측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p52

부당한 사회질서는 죽음, 좌절, 빈곤을 양분으로 삼는 '관용'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그렇기에 허구적 관용을 베푸는 자는 그 원천에 조금만 위협이 가해져도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p53

이처럼 해방은 마치 고통스런 출산과도 같다. -p58

피억압자가 자신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꼭 탁상공론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성찰은-물론 참된 성찰의 경우지만-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상황이 행동을 요구할 때, 행동이 순수한 실천으로 간주되려면 그 행동의 결과가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뜻에서 프락시스는 억압자의 새로운 존재근거이다. -p79

피억압자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자신들을 사물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물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인간으로서 싸워야 한다. 이것이 근본적인 필요조건이다. 그들은 객체로서 투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장차 인간존재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p82

대화는 사람들이 세계를 매개로 하여 세계의 이름짓기 위해 만나는 행위다. -p106 

내가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민중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대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p108 

또 희망이 없으면 대화도 있을 수 없다. 희망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간은 희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모색에 뛰어든다. -p110 

현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은 침잠 상태에서 탈출하여 현실 속에 개입할 수 있게 딘다. -p130 

행동과 성찰은 동시에 일어난다. 하지만 비판적인 현실 분석은 특정한 행동형태가 현 시기에 불가능하다거나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따라서 성찰을 통해서 특정한 행동형태의 불가능성이나 부적절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결코 무기력한 게 아니다. 비판적 성찰 역시 나름의 행동이다. -p153 

인간적이지 않은 역사적 현실이란 없다. 인간 없이는 역사가 없으며, 인간존재와 무관한 역사는 없다. 무릇 역사란 오직 민중이 만들고 (마르크스에 따르면) 거꾸로 민중을 만드는 인간성의 역사일 뿐이다. -p155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드러낼 수는 없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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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름을 정말 기억 못한다. 워낙 내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상대방은 내 이름을 아는데 난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잠깐 공인으로 살던 때, 학생회 간부시절 참 민망한 일이 많았다. 최근에는 알콜성 치매인지 사람 얼굴도 몰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한다. 몇 주 혹은 몇 달 전에 안면을 튼 사이라고 얘기해주면 그때서야 '아, 그랬지'하며 떠오른다. 서너 번은 봐야 저 사람이 누군지 안다. 안면인식장애 초기 증세가 아닌가 의심해본다. 내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놈이라서 그런가 자책도 한다. 그래도 점점 실례를 범하는 일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얼굴을 몰라봐도 어여삐 봐달라는 것이다. . 

.  
.
.
.
.
이렇게 적었는데 문득, 아래 시가 떠올랐다. 왜일까? 
 


너 죽은 날 밤 
차 간신 몰고 집에 돌아와 
술 퍼마시고 쓰러져 잤다. 
아들의 방.  
아들이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화장실에서처럼 
소변보고 있었다. 
태연히. 
그리곤 방을 나가 
화장실에 누웠다.  
태연히. 

- 황동규 작 '너 죽은 날 태연히-같이 술 마시던 시절의 김현에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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