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는 것은 길을 찾는 한 가지 방법이다.”


다들 한 번쯤은 길을 잃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모태 길치’라 할 수 있는 저는 지금껏 무수하게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지리도 배웠고 군대에서 나름 독도법 책장도 넘겨봤는데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길을 잃습니다. 심지어는 거금을 들여 구입한 내비게이션을 떡하니 운전석 옆에 붙여놓고도 고속도로 IC를 잘못 타서 수십 킬로미터를 돌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시간 낭비, 돈 낭비, 체력 소모와 자괴감 정도지만 어렸을 적에는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섯 살 무렵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날은 마침 저희 집 이삿날이었습니다. 다들 이삿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유난히 심심했을 저는 나 홀로 ‘수사반장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최고 인기였던 TV 프로그램 ‘수사반장’에서처럼 미행을 한 겁니다. 범인은 주인집 아주머니였습니다. 시장에 가려고 나서는 주인집 아주머니를 살금살금 눈치 채지 못하게 뒤를 밟았습니다. 어느 정도 갔을까, 어느 순간에 그만 어느 길목에서 아주머니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이리저리 둘러보게 된 거리는 참 낯설었습니다. 아주머니 뒤꽁무니만 보고 쫓아왔으니 어느 사거리에서 가로질렀고 어느 골목에서 꺾어졌는지 알 턱이 없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무작정 뒤돌아 곧바로 가면 집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낯선 동네에 다리는 아프고 길은 도무지 찾을 수 없고, 어느 순간 골목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다행히 어느 집에서 제 울음 소리를 듣고 대문을 열어주었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인 뒤 저를 파출소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요. 삼촌이 파출소 문을 열어젖히면서 제 ‘수사반장 놀이’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2011년 올해 《사람》은 처음으로 연중기획이라는 것을 시도해보았습니다.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인권조례, 핵과 에너지, 풀뿌리 정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등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해서 1년 동안 끈질기게 파고들어보자는 취지였지만 돌이켜보면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애초부터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시작했기에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린 듯 우왕좌왕하며 임시방편으로 땜질하기 급급했습니다. (부족한 기획임에도 좋은 글로 지면을 채워주신 필자들에게 너무나 고맙습니다.) 그럼에도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이 만나서 대화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이 각성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합니다.


“나도 물어보고 싶다. 이 운동의 목표가 뭐냐? 이 운동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
“우리는 파워를 다른 식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권력을 재생산적이고 구성적인 것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와 위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뉴욕의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를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R’의 고병권이 전하는 시위대와의 토론 중 일부분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보며 “풀뿌리운동은 ‘비어있는 중심의 운동’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중심에 들어와서 계속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중심을 비워두고 와달라고 하는 태도다. 이곳으로 와서 함께 일하고, 내가 힘이 드니까 같이 더불어서 가치 있는 것들을 해보자는 자세다.”[《사람》(2011년 1·2월, 48호)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대화’]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찌 보면 ‘풀뿌리운동과 인권운동의 만남’은 인권운동을 어떻게 하면 더욱 레디컬(radical)하게 만들 것인가의 고민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레디컬은 근본적, 철저한, 급진적 등으로 번역하는데 그 어원은 라틴어 뿌리(radix)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저 월스트리트에서의 점거 시위와 풀뿌리운동의 묘한 공통점은 오히려 당연하다고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글머리에 적은 “길을 잃는 것은 길을 찾는 한 가지 방법이다.”라는 멋진 글귀는 아프리카 스와힐리 속담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블로그에서 보고 언젠가 한 번 써먹고 싶어서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얼마 전 진보신당에서 활동해온 선배가 페이스 북에 근래의 답답한 심경을 올린 것을 보고 때는 이때다 싶어 힘내라며 댓글로 달아 주었는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정말 길을 잃어 황망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욕을 들어먹기 십상이죠. 하지만 예사로 길을 잃다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는 기쁨도 알게 되고 낯선 길을 나설 때의 두려움도 차츰 덜해지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걸어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는 뜻이겠죠.


솔직히 저는 진보정당, 또는 진보정당 운동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10여 년 전쯤 아주 잠깐 당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만 그것도 사실 후원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지지의 표시 차원에서 입당을 한 것이었고, 영 내 몸에 안 맞는 옷을 걸친 것 같아서 채 1년도 되지 않아 탈당을 했습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매번 뜨거웠던 ‘비판적 지지’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도, 민주노동당이 쪼개지고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리고 최근 지지부진한 통합 논의를 보면서도 안타까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와중에 진보신당 대표에 출마 의사를 밝힌 홍세화의 글을 읽으며 잠시나마 당원 가입을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요구해 주주자본주의를 흔들어야 하며, 상비군 폐지를 공론화시켜 병영국가의 성벽에 균열을 내야 합니다. 서울대는 없애고, 대학은 평준화하며, 각종 국가고시는 지역별로 할당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학벌사회를 전복시켜야 합니다. 지배 담론에 길들여져 허락된 것만 말하는 진보정당은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불온함 속에 세상을 바꾸는 우리의 힘이 있습니다.”(홍세화,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 중에서)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서 쓰기 시작해 한동안 유행하다 요새는 거의 자취를 감춘 ‘로드맵’이란 말이 있습니다. 밑그림, 일의 처리 순서나 세부 계획이라고 할 수 있지요. 총선과 대선이 있는 바야흐로 ‘정치의 해’인 2012년, 누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길 위의 사람들을 위해 레디컬한 로드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한국에 녹색당도 생긴다고 하니 저 같은 ‘길치’는 조금 안심을 해도 좋을까요?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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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카이로스총서 16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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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담론의 르네상스 배경에는, 통합이나 동화보다 정체성과 차이의 문제를 부각시키려던 좌파들의 시도와,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 요구를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것으로 매도하려는 우파들의 노력도 자리 잡고 있었다. -19쪽

관용에 대한 비판 역시, 정치적 입장을 초월해 제기되고 있다. 문화적 우파가 관용을 동성애 지지의 표현이라고 비판할 때, 문화적 좌파는 관용이 동성애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 보장'을 대체하는 빈곤한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 우파가 "관용의 과잉"이 불러온 도덕성의 붕괴를 비판할 때,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관용적 다문화주의가 여성의 음핵절제나 무슬림 소녀들의 히잡 착용 같은 억압적인 문화적 실천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며 관용을 비판한다.-20 쪽

소수 종교, 소수 종족, 소수 섹슈얼리티에 정체화한 이들은 국가로부터 형식적 평등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사회적 관용의 대상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이들은 형식적 평등을 통해 정치적으로 포섭되는 와중에도, 관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주변적 지위에 재각인된다. 이런 식으로 관용은 국가가 내건 법적 평등주의로 인해 위태로워질 수 있는 헤게모니적 규범을 사회적 영역에서 재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3 쪽

통치성의 실천으로서 관용은 (...) 정치적 주체의 형성에 관여하고,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시민권, 정의, 국가 그리고 문명의 분절에 기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관용은 자유주의의 혀식적 자유와 평등의 대리보충으로 기능함으로써 실질적인 평등과 자유의 추구를 노골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 관용은 위기에 빠진 권력의 질서를 뒷받침하고, 흔들리는 제국주의를 위한 방패막이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심지어 인종주의나 동성애 혐오를 유통시키고, 인종주의적인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관용이 동원되기도 한다. -31~32쪽

관용의 대상은 대부분의 경우 관용 행위 그 자체를 통해 비정상적이거나 주변적인 것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표지되기에, 무언가를 관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관용받는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9쪽

우리가 중고등학생들에게 각자의 인종, 종족, 문화, 종교, 성적 지향의 차이를 관용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차이와 정체성은 실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그 자체로 권력과 헤게모니적 규범, 그리고 특정 담론들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41쪽

관용이 점차 서구, 자유민주주의, 계몽, 근대성 같은 개념들과 동의어가 되면서, 관용은 이제 "우리"와 "그들"을 구별해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43쪽

일반적으로 관용은 인간적 차이 혹은 "다른 의견이나 행동"에 대한 존중으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정의 어디에서도 규범과 주체의 구성, 그리고 관용 담론에서 문제가 되는 문명적 정체성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이 정의는 관용 가능한 대상과 관용 불가한 대상 혹은 관용의 주체와 불관용의 주체를 가르는 분할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한다. -46쪽

과거 냉전 시대에 서구 사회의 모든 정치적 갈등이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환원되었다면 오늘날 탈냉전 시대에 모든 정치적 갈등은 문화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다. -49쪽

(조지 W. 부시 같은) 이들 자유주의적 입장은 인권의 문제를 문화적 제국주의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인권이 필요하다고 적반하장 격으로 주장한다. -51쪽

관용은 ("차이"와 관련되기에 비자유주의적이며, "본질적이기에" 비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 문화적 정체성과 이러한 정체성 간의 충돌을 규제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도구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관용은 이러한 정체성 주장 및 정체성 간의 충돌을 탈정치화하는 동시에 스스로 단지 양심의 자유나 정체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로, 즉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통치의 도구로 내세우는 것이다. -54쪽

관용은 잠재적으로 해로울 수 있는 차이를 포용하는 덕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차이로 재현된 위협을 관리하는 방식이다.-62쪽

관용에는 두 종류의 경계선 긋기와 하나의 자격 부여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관용은 먼저 어떤 문제가 관용이 필요한 문제인가라는 유관성의 범위와 이 범위 내에서 어떠한 부분까지 수용이 가능한가라는 도덕적 범위를 구획한다. 자격 부여 행위는 이 경계선 내부에서 어떠한 행위가 관용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65쪽

관용은 자유주의적 평등의 형식주의로 해결되지 않는, 특히 자신이 사회, 문화, 종교적 삶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법치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회, 문화, 종교적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 형식적 평등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관용은, 그 집단을 주변화해 온 규범의 헤게모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주변 집단을 내부화하고 그들의 요구를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이것은 자유주의 담론 하에서, 오직 관용만이 행할 수 잇는 중요한 임무이다. -75 쪽

관용을 서구 문명의 전유물로 만드는 행위는, 결국 서구를 문명의 편에서 "불관용"을 규제할 수 있는 전도사로 만들고, 이는 현재 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77쪽

관용은 이러한 일련의 믿음과 경험, 실천을 대변하는 정체성들 간의 공존을 보장하는 동시에, 이들 정체성 간의 관계를 내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로 구성한다. 정체성이 타인의 진리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진리의 장소로 여겨지는 한, 각각의 정체성은 다른 이들이 가진 진리와 그것의 절대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83쪽

관용 담론은 사회질서를 '관용하는 이들'과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로 은밀히 이분화하는데, 이때 관용되어야 하는 이들은 규범에서의 일탈을 통해 개인화되며, 이 개인화 과정에서 자신의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관용담론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규율적 전략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86쪽

관용은 그 대상이 되는 이들에게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차이"를 드러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사적이고 탈정치화된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한에서만, 즉 이를 정치적 주장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한에서만, 관용 가능한 대상이 된다. (...) 관용은 차이를 본질화하고 세규얼리티, 인종, 종족의 문제를 물신화함으로써 세규얼리티, 종족, 인종이라고 불리는 차이들을 생산해 온 역사와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또한 관용은 문화적으로 생산된 차이를 태생적이고 본성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차이를 불평등과 지배의 장소로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든다. -88~89쪽

프랑스 유대인 부르주아들이 점점 더 자신을 프랑스인과 동일시하면서 이들과 다른 유럽 국가 유대인 간의 유대감과 연결고리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이 자신의 유대인성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프랑스 내 반 유대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삼갔으며, 주류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점차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수화될 수밖에 없었다. (...) 관용받기 위해서는 종교적 정치적 믿음을 양보해야 했고, 동료 유대인을 외면해야 했으며 국가를 향한 대가 없는 충성을 약속해야 했다. -105쪽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차이를 내부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여전히 이들을 조절, 관리, 통제할 필요가 있을 때, 정치적 시민적 관용이 등장하게 된다. (...) 유대인의 경우는 (여성과)달랐다. 그들의 차이는 전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특성[즉 하나의 민족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으며 관용은 이들의 해방 위에 덮여진 보호막과 같은 것이었다. -125쪽

성별화 담론은 여성에게 형식적인 정치적 평등을 부여하면서 실질적 불평등을 지속시키고, 더 중요하게는 국가가 표명한 보편성의 핵심에 자리 잡은 남성 중심적, 이성애적, 기독교적 규범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 동일자의 한복판에 불쾌한 타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관용 담론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위협을 알리는 지표인 동시에 그것을 통합할 수 잇는 능력의 지표이기도 하다. 여성이 전형적인 남성의 공간에 들어가려 할 때만 관용의 언어가 등장하는 이유는, 여성이 자신에게 할당된 장소에 머무르고 여성의 신체가 이성애 구조에 의해 전유되어 사사화되는 한, 관용의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28~129쪽

관용은 헤게모니적 규범이 일탈적 타자를 손쉽게 식민화하거나 내부화할 수 없을 때 혹은 직접적 종속이나 편입보다는 새로운 주변화와 조절의 테크닉을 통해서만 지배를 유지할 수 잇을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호출된다. (...) 이성애적 젠더는 관용의 대상일 수 없는 반면, 이성애 구조에서 일탈한 주체들은 즉각적으로 관용 담론을 소환한다. (...) 관용은 자유주의적 평등의 구호가 적용될 수 있는 경계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의 실천은 관용의 대상이 되는 타자가 정치적으로 시민권 규범의 외부에 놓여 있음을, 그 타자가 져전히 정치적 타자이며 자유주의 평등 담론 속으로 완전히 편입될 수 없고, 또한 종속을 유지시키는 분업 구조를 통해 관리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130~131쪽

관용 담론은 특정한 집단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국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은폐하며 이를 둘러싼 긴장들을 완화시키고 갈등의 방향을 전치시켜 버린다. -145쪽

차이의 장소를 사적인 영역에 한정함으로써 공적 차원에서의 차이와의 대면을 축소시키고자 한다. 즉 관용은 차이의 공적인 해결을 가로막고 차이가 가진 공적인 속성을 축소시키는 한편, 차이를 "문화"와 "본성"의 문제로 환원시켜 차이의 원인과 해결책을 탈정치화한다. (...) 이는 "차이"를 정치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막아 버려 "차이"를 지배와 불평등의 효과이자 도구로 계속 남겨 놓으며 더 나아가 "차이"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차이를 비난하거나 차이를 애써 외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 역시 함께 막아 버린다. (...) 관용은 평등의 기획을 거부할 뿐 아니라 차이를 가로지르는 접속의 기획, 다시 말해 연대나 공통성의 문제마저도 포기한다. (...)정치의 공간은 더 이상 시민들이 참여를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공간이자, 차이가 정치적으로 생산되고 조정될 수 있는 공간, 즉 "차이"가 주체적인 문제가 되는 공간이 아니다. -151~152쪽

국가가 이러한 사회적 관용에 대한 호소를 통해 자신이 헤게모니적인 문화적 규범과 연결되어 있다는 폭로에 맞서 자신의 정당성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는 평등의 약속을 위반하고, 대립하는 운동 중 한 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관용을 통해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메울 수 있었던 것이다. -165쪽

9/11 이후 진행된 이같은 국가 폭력을 시민적 관용에 대한 국가의 호소와 모순되는 것으로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러한 국가 폭력이 시민적 관용에 대한 호소를 통해 정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70쪽

관용은 본질화된 차이라는 담론을 순환시킴으로써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며, 동시에 관용에 대한 호소는 국가 폭력에 의해 활성화된다. [각주] 갈등은 불관용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관용에 의해 해결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176쪽

관용의 탈정치적 효과 속에서 적대와 갈등을 구성하는 권력관계와 역사는 삭제되며 역사적으로 생산된 적대는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물화된다. 바로 "차이"의 이름하에 말이다. -183쪽

(우리와 다른 믿음과 행동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정의 하에서 인종주의와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와 관련된 모든 사안들은 이제 타자의 "믿음과 행동을 수용"하는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환원 속에서 사회적 상처와 불평등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인종, 종족,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화"되어, 누군가의 믿음과 행동을 구성하는 요소로 간주된다. (...) 관용 그 자체는 정체성을 생산해 내는 정치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즉 권력이나 불평등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197쪽

다양한 믿음과 행동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차이를 인간성의 본질로 규정하면서 어떻게 도시에 하나의 도덕적 정치적 합의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인가? 상이한 관점과 차이에 대한 관용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모든 이들이 하나의 올바른 도덕적 정치적 입장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차이에 대한 세계시민주의적 입장을 내걸면서 어떻게 보편적 진실의 외피를 쓴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210쪽

(관용-문명 계열화는) 야만인들에게 관용적인 세계관과 이러한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정치적-법적 장치들을 강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강제는 폭력이 아니라 야만인에게 사유를 가르쳐 주는, 따라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213쪽

"문화는 흡수될 수 있고, 종교는 개종할 수 잇지만, 인종은 오직 절멸될 수 있을 뿐이다." - 관용박물관 '홀로코스트의 집' 전시물에서-237쪽

(자유주의 담론 속에서) 비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에 "지배"되며 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를 "소유"한다. -245쪽

관용은 자율성이라는 선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역으로 이러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 미덕이 된다. -250쪽

유기체적 질서는 자유주의의 "절대적 타자"인 동시에 문명에 "내재하는 적"이다. 자유주의 적과 문명의 적이 결합하여 초국가적인 구성체로 등장 할 때 이들은 현존하는 최대의 위험이 된다. 19세기에 유대주의가 그랬고, 20세기에 공산주의가 그러했다. 오늘날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 이슬람이다. -268쪽

문화는 서구의 위대함의 일부분이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적 주체는 성숙을 위해 이 문화를 벗어던지고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에 서야만 한다. 문화를 가진다는 것이 뜻하는 이 대립적 함의-도덕적 진보와 도덕적 자율성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과 모순은 우연적이라기보다는 징후적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유주의와 근대성 간의 뿌리 깊은 결합, 그리고 자유의 기획과 이성 및 개인주의가 맺고 있는 유착 관계를 폭로한다. -273쪽

자유주의 하에서 문화와 종교는 사적인 것이고 사적으로 향유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탈정치화된 것이다. 마치 가족이 그렇듯이, 문화와 종교는 정치적 인간과 경제적 인간의 "배경"으로서만 가능하다. -274쪽

자유주의는 문화를 정치적 권력과 분리된 영역으로 만드는 동시에 정치를 탈문화적인 영역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이중의 움직임은 자유주의 법질서를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 문화를 그 자체로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에 종속되어야 하는 원칙에 따라 이제 정치에 ㅔ대한 문화의 종속적 지위가 정당화된다. 이러한 방정식은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 문화적 제국주의의 형태를 띠지 않은 채 보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보편적인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은 특정한 문화를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5쪽

비자유주의체제는 문화나 종교가 "지배"하는 곳으로 재현된다. 반면 자유주의 체제는 법이 지배하고 문화는 단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탈정치화된 영역일 따름이다. (...) 자유주의 법질서가 관용을 장려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이며,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관용적인 시민을 양육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 (...) 자유주의 하에서는 거의 모든 실천이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강제된 실천들은 관용의 대상이 아니며 문화나 종교에 의해 지배된다고 여겨지는 체제는 말할 것도 없다. -276~277쪽

문화와 정치, 개인성과 유기성을 분리시키려는 자유주의적 시도의 (풍요로운) 실패를 인정하고, 자유주의를 자신 안에 이미-항상 존재하는 혼종성을 의식하고 수용하는 체제로 변환시키는 작업 (...) 이 작업은 자유주의로 하여금 '우리'와 '그들'이라는 절대적인 이분법, 즉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라는 깃발 아래 제국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 온 가장 중요한 전제 중 하나를 포기하는 길로 이끌 것이다. -282쪽

"나는 관용적인 사람이다"라는 선언은 주체에게 품위와 예의 바름, 절제와 아량, 세계시민주의와 보편성 그리고 폭넓은 시야를 안겨주는 동시에,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부적절하고 무례하며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이들로 구성한다. [각주] 반면 "그녀는 관용적인 사람이다"나 "그는 관용적인 사람이다"는 말은 이간은 계열화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같은 차이는 스스로가 관용적이라는 자기 확신적 관용이 권력의 효과이자 권력의 전달수단, 즉 지배의 표현인 동시에 지배를 확장하고 정당화하는 요소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85쪽

관용은 또한 기독교 및 자본주의 문화와 자유주의 사상이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를 은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용의 가치는 실제로 기독교 및 자본주의 문화를 보호하고 장려하지만 이 둘과의 유착관계는 부인한다. -301쪽

상이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용이 자율성 이외의 다른 가치들, 예컨대 개인의 자유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과 차이 혹은 문화적 보존 등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다면 어떨까? 혹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개인적 자유를 문명의 상징에서 탈중심화시켜, 이를 단지 인간 존재의 풍부함과 가능성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해하면 어떨까? 아마도 이러한 인식은 비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줄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자기 확신과 의심스러운 궤변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의 실천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318쪽

결국 우리의 입장을 "관용 반대"나 "불관용 지지"의 틀로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신에 우리는 대안적인 정치적 발언과 실천을 통해 관용의 현대적 배치가 가지는 탈정치적이고 규제적이며 제국주의적인 효과들과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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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사람에게 어떤 용역의 뒷모습
르포르타주 구미 단수사태, 5일의 기억
인권이내게로왔다 우리도 저 붉은발말똥게처럼
인권이내게로왔다 결국 인권에서 못 벗어난 나의 어학연수기
人터뷰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기획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도전
기획 두 바퀴로 달리는 나눔과 보살핌의 공동체
특집 트위터와 기적의 매뉴얼
특집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든다
특집 무엇을 위한 연대, 무엇을 향한 적대인가
사람in인권 여기, 독립영화 하나 있어요
사람in인권 쥐 그래피티와 풍자 전쟁
사람in인권 복지국가를 의심하다
엄마에게쓰는편지 고향에 대한 권리
사람답게 다음 생에도 이 몸을 만날까
희망을위한직접행동 서로의 꿈을 응시하는 운동은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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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행복한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요?”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유명한 조세희 작가를 모신 강연회 자리에서였어요. 이 난데없는 질문에 번쩍 손을 들 뻔 했죠. 다행이 제 손이 올라가기 전에 늙은 작가는 다음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행복한 건 도둑놈들이거나 아니면 바보들입니다.”

도둑과 바보, 저는 둘 중에 무엇이었을까요? 그 무렵 15개월 된 큰 딸내미가 한창 예쁜 짓을 할 때라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는 술을 한 잔 걸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와 엄마 옆에서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이 고통이 넘쳐나고 갈수록 험악해지는 세상에서 한 생명이 온전히 자라도록 키울 자신이 없었던 것이죠.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아이 탓에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우리 부부였지만 장모님은 멀리 사시고 어머니는 지병이 있으셨기에 마땅히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지요. 게다가 아이 백일도 되기 전에 아이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집근처 어린이집도 없었기에 일주일에 이틀은 제가 아이와 대여섯 시간을 꼬박이 보내야 했던 것이죠. 꼭 포대기에 업혀야 잠이 들던 딸내미였기에 베개를 아이삼아 등에 올리고 포대기를 두르는 연습도 몇 차례 했지요. 그래서 아이 업는 것은 곧 능숙해졌지만 기저귀도 갈아주고 분유도 먹었건만 계속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진땀을 흘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녀석이 옹알이를 하고 돌이 가까워서 아장아장 걷더니 도리도리에 잼잼에, 동화책까지 짚어들고 읽어달라며 안기니 그제야 아이 키우는 맛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조세희 작가의 강연이 있은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다섯 목숨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작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그 자리에 나와 또 비슷한 말을 했죠. 또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져야 할 불행의 짐이 많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 당시 저는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들, 하지만 꿋꿋하게 불의에 맞서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그러면서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수족구며 신종플루까지 이겨내고 무럭무럭 자라 벌써 다섯 살이 되었네요.

그리고 재작년 이맘때 덜컥 둘째가 생겼어요. 큰애를 낳고 하나 정도는 더 있어도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좀 당황스러웠죠. 한편으로는 그 힘들었던 시기를 다시 겪어야 한다니 많이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아이엄마는 둘째가 태어나면 더 힘들 테니 그전에 연수를 받아야 한다며 저한테 큰애를 맡기고 2주간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일주일에 이틀 애를 봤다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죠. 휴가를 내고 아이와 처가로 갔습니다. 엄마가 없어서인지 떼가 늘은 네 살짜리 아이의 신경질을 받아주느라 2년 같은 2주를 보냈죠. 하루는 박물관, 하루는 도서관, 다음날은 놀이공원, 그리고 찜질방. 하도 성질이 나서 차안에서 우는 아이를 30분이 넘도록 달래주지 않은 적도 있지만 자다 깨어나 엄마를 찾다가 제 품에서 다시 잠든 아이를 볼 때면 ‘너야말로 무슨 고생이냐’ 싶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게 되더라고요.

작은애가 태어난 뒤 지난 일 년은 감기도 우리식구가 되었죠. 큰애가 어린이집을 다니니 줄곧 감기에 걸려 있는데 작은애가 피해갈 수 있나요. 한 번은 큰애 감기가 폐렴으로까지 가서 입원을 했는데 네 식구가 모두 병실에서 먹고 자고를 했어요. 늦은 밤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앉아 병원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세 명의 여인네를 보니 무슨 피난민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작은애는 큰 병치레 없이 첫돌을 맞이했습니다. 둘째라 노하우가 생긴 덕분인지 키우기가 훨씬 수월했지만 노심초사, 조심조심했던 첫째와는 달리 무뎌진 부모 때문에 혼자 베란다로 기어나가 세탁세제를 퍼먹는가 하면 큰애와 방바닥에서 뒹굴다 가구 모서리에 찍혀 얼굴을 꿰매기도 하는 등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죠.

그 사이 이사를 해서 작은애도 동네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귀신같이 엄마의 등과 아빠의 등을 구별해내는 젖먹이와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아이엄마의 일이 늦게 끝나서 제가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지하철을 타고 아이엄마 직장까지 갑니다. 몇 십분이라도 아이들에게 엄마를 빨리 만나게 해주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렇게라도 해서 좀 더 일찍 아이들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게지요. 그 지하철에서 어떤 할머니에게는 “요새 아빠들은 애를 참 잘 본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기도 했고 어떤 할아버지에게서는 “시대를 잘못 만나 고생이 많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아이엄마들이 이 글을 본다면 고작 일주일에 며칠, 하루에 몇 시간인데 무슨 유세냐고 할 겁니다. 그래도 아이를 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바싹 침이 마르고 아이엄마에게 아이들을 넘기고 나면 무슨 큰일을 치룬 것처럼 홀가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늘 비실비실 하다고 구박받는 몸으로 작은애는 안고 큰애는 업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끊임없이 물어보고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큰애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작은애까지 함께 있다 보면 숨 한 번 돌릴 여유도 없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나마 작은애가 걸음마를 시작했으니 앞으로는 나아지리라 여겨도 좋을지, 아니면 또 다른 고비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딸을 둔 아빠들이 대게 그렇듯이 저도 자칭 타칭 ‘딸바보’입니다. 아이엄마는 큰애가 아빠에게 너무 버릇없이 군다며 요즘 걱정이 많지만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렇건만 아직도 자다가 깨면 사정없이 저를 밀어내고 엄마 품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작은애야 말할 것도 없지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엄마아빠”라고 답하는 영악한 큰애지만 단 한 번도 ‘아빠엄마’는 아닙니다. 한 번은 그럼 왜 엄마하고만 자고 아빠랑은 안 자느냐고 물었더니 내일은 아빠랑 잘 거랍니다. 물론 그 내일은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당분간도 오지 않을 겁니다.

추석날 보름달 아래서 큰애랑 강강술래를 하는데 아이엄마가 소원을 빌자고 합니다. 아이들이 도둑이나 바보가 되지 않기를, 이웃들과 불행의 짐을 나눠질 수 있기를……. 딸내미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더니 “어서 빨리 어른이 되게 해주세요.”랍니다. 저는 냉큼 딸내미의 소원이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이뤄지게 해달라고 소원을 바꾸었습니다. 큰애의 내일처럼 말이죠. 
 


 

 

 

 

 

 

 

 


 

 - 보리출판사에서 나오는 잡지 <개똥이네 집>에서 청탁을 받아 보낸 글입니다. 이런 잡지가있는 줄 몰랐는데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가 같이 보기 좋은 잡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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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문학상의 생활•기록문 분야 예심을 덜컥 맡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화로 수락하고 보니 우편으로 접수된 것까지 포함해서 대략 150여 편의 글을 일주일 만에 읽고 본심에 올릴 작품을 가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의 글을 평가하고 그 당락을 결정짓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본심에 보낼 작품과 탈락시킬 작품을 가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본심으로 넘겨야 하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들의 편차가 워낙 심한 탓도 있었습니다. 생활글, 기록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문장이나 예술성보다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있는 글, 글쓴이의 정성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들을 위주로 추렸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읽어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지만 한 편 두 편 읽다 보니 글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잠시 원고를 내려놓기도 했고 혼자 드러누워서 낄낄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왔던 동시대의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때 그 시절, 형편이 좋지 않아서 못 먹이고 못 입혔다며 미안하다 하시지만 사실 저희 집은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좋아졌던 탓에 유별나게 궁상맞았다거나 고달팠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1980년대 이전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절대빈곤은 소설이나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제가 십대, 이십대를 보낸 8, 90년대에도 이토록 가난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들과 함께 같은 하늘과 같은 땅에서 살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이제 막 한국사회에 등장한 중산층들이 둥지를 틀었고 그 맞은편 작은 하천 너머로 아마도 신흥 중산층들에게 삶의 터전을 속절없이 빼앗겼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했습니다. 판자촌 동네 아이들은 한 학급에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꼬질꼬질하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제 짝꿍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5학년 때였을 겁니다. 땟물이 줄줄 흐를 뿐만 아니라 어딘지 좀 모자라고 숙기도 없어 보이는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저는 약간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 아이가 점심 도시락을 싸왔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까지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고 학용품을 제가 먼저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지 계속 제 주변을 맴돌더니 급기야는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나랑 안 놀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가 제 주변에 있는 게 불편하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약간 차갑게 대하며 제가 반걸음을 물러서자 그 아이는 더 차갑게 제게서 몇 걸음이나 물러나 아예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채로 그 아이와 멀어졌습니다.

다시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서입니다. 제가 들어간 중학교는 인근에서 하나뿐이었던 남자 중학교로 당연히 학교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복도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 아이는 더 이상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동네 형들이나 고등학생들과 어울린다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요샛말로 이른바 ‘일진’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복도에서 그 아이를 마주친 순간 서로 눈을 피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뒤로는 그 아이를 보지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문득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지만 제가 첫 번째로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아이일 겁니다.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작품을 읽어나갈 무렵은 한창 무식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면적인 무상급식은 안 된다는 주장의 핵심은 빠듯한 나라 살림살이에 왜 부자 아이들의 밥값까지 대줘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군대에서는 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밥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소득 상위 50%이상은 군복을, 상위 20%이상은 총까지 스스로 장만해서 입대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 반대편 주장인 “아이들에게 눈칫밥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군복무가 의무라면 당연히 군대에서 군인은 양질의 식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듯이 의무교육에서 급식은 학생들의 당연한 권리여야 합니다. 눈칫밥이나 낙인효과 같은 정서적인 접근이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무상급식을 이뤄내는데 효과적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력이 있을 때 베푼다는 시혜적 차원의 복지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편적 복지로, 그리고 인권의 차원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편 정말로 무상급식을 한다고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만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는 모두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라 오히려 분위기가 좋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미 아파트 몇 단지에 사는지를 가지고 친구 집의 경제력을 짐작하고 무슨 학원을 다니는가 하는 것으로 또래집단이 나뉘는 마당에 무상급식 하나로 빈부격차에서 오는 차별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어른들의 바람일 뿐이겠죠.

군대에서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전방부대였기에 40명 정원의 한 소대에서 4년제 대학을 다니다온 사람이 채 10명이 안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중대 행정반이라는 편한 자리에서 군 생활의 절반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로는 후방 무슨 본부 같은 곳은 4년제 대학생 아닌 이들이 열에 한둘이 될까 말까 하였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사회경험에도 불구하고 늘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고 제대할 날짜가 다가올수록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데모를 한다고 쫓아다니고 문학을 한답시고 술에 절어 지내던 대학시절에는 사회경제적 차이가 크게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둘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다 보니 출발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농사짓는 노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의 친구와 자식이 결혼을 한다니 전세 아파트라도 마련해줄 형편이 되는 집의 친구는 반지하와 신도시로 사는 곳부터 다릅니다. 아마 어느 한 편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던 일이 대박 나지 않는다면 이 둘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주거와 교육, 의료와 같은 것들은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 누구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운데 어떠한 모욕이나 차별, 배제가 끼어들 수 없게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위한 기획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복지국가 논의에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이미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눈칫밥과 사회적 낙인을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발상도 그렇습니다. 복지를 위해서,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좀 못 사는 다른 나라를 착취해야만 할 겁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좋지만 그러면 당장 피해를 보는 것은 편의점이나 PC방 같은 영세 자영업자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평택 대추리에 지어지는 미군기지로 인해 누가 얼마나 더 안전해질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주도 어딘가에 해군기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 앞에서, 그리고 공사 지연에 따르는 천문학적인 비용 운운하는 말들 속에서 강정 싸움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가 되고 맙니다. 서울시민의 쾌적함과 그럴듯한 ‘디자인’을 위해 서울역에서 노숙인은 당연히 쫓겨나야 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이주민은 필요한 만큼 시한을 정해 들여왔다가 쫓아내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한편 바로 이웃나라의 핵발전소 사고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원자력 에너지에 기대어 또 이렇게 한여름 불볕더위를 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곤란과 어려움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아닐런지요.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번호 《사람》의 표지 사진입니다. 다섯 명의 젊은이들 뒷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검은 색 계통의 어두운 티셔츠를 입었고 다들 무척 지친 듯합니다. ‘마리’라고 쓰인 간판 밑 내려진 셔터 앞에 선 이들은 마치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포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어디를 보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용역, 용역직원, 혹은 용역깡패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지난 6월 19일 명동 재개발 구역인 카페 마리에서 철거가 진행된다는 소식이 트위터로 퍼지자 일요일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의집회와 몸싸움 끝에 카페 마리는 다시 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농성장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그 과정에서 안에 들어간 동료가 집기를 다 철거할 때까지 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못 들어가도록 셔터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왠지 참 애처롭습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둘러싸여, 혹시라도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용역들. 사실 현장에서 이들을 만날 때면 유난히 겁이 많은 저는 눈을 마주치는데도 적지 않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몇 발짝만 물러나면 그저 애처롭고 안타까운 존재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정함과 공포의 대명사인 이들은, 이들의 뒷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뒷모습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삶도 이미 자본의 용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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