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이너라는 그야말로 마이너스러운 곳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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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권과 그림책 읽어줄 권리

권리는 본래 헌법과 법률에 따라 주어진 특정 자원이나 행위에 대한 배타적 향유 능력을 일컫는 법률용어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굳이 법률과 헌법의 조문을 따지지 않고 권리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주장하며 산다. 그것들 가운데는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그러나 사실은 아주 중요한 행위나 자원들이 포함된다. 이런 행위에 굳이 ‘권리’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상에서 잘 지각하지 못했던 그 행위나 자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고, 그러한 행위나 자원을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일상적이라 잘 감지되지 못하는 것들의 예로, 지체장애가 있는 한 후배가 종종 언급하는 ‘오줌권’을 들 수 있다. 배뇨활동은 헌법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에 포함되기 때문에 따로 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구체적인 행위의 자유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줌권’이라는 구체적 언어를 우리가 떠올리고 사용하게 될 때, 그 파괴력은 강력하다.
 
(주로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오줌권의 중요성을 다 공감할 것이다. 오줌권은 모든 자유의 근간이다. 장애인들의 외출은 언제나 ‘접근 가능한 화장실의 존재유무’에 따라 판단된다. 식당 메뉴의 질은 두 번째 문제이며, 경관의 아름다움이나 흥미로운 놀이기구의 존재도 그다음 조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화장실에 갈 수 있는가에 달렸다.
 
오줌을 눌 수 없는데 음식의 맛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줌을 눌 수 없다면 연애는 무슨 소용이며 문화활동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밥은 집에서 먹고 갈 수도 있지만 오줌은 밥보다 자주 해결해야 한다. 장애가 없는 대부분의 사람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오줌권’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아니 사실은 더욱더 확보되어야 할 권리가 ‘배뇨’의 기회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장애인 중에 상당수는 방광염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아서 배뇨를 참기 때문이다.
 
미세한 행위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일은 장애인의 삶을 증진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지역 도서관운동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느티나무 도서관’에는 그림과 점자가 함께 있는 책이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나는 왜 점자책에 굳이 그림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각장애인 부모의 그림책 읽어줄 권리'를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적 행위를 비시각장애인들에게 각인시킨다. 시각장애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이들에게 아이에 대한 교육은 매우 중대한 책임이자 권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교육과정 안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포함되며, 그 책 중에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각장애 부모가 시각장애가 없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수 없다면 이는 심각한 자유의 제한이자 권한의 침해다. 이처럼 ‘시각장애인 부모의 그림책 읽어줄 권리’의 창안은 우리의 삶에서 자연스럽고 중대한 함의를 갖지만, 쉽게 포착되지는 않는 현실의 문제를 잡아내 비시각장애인들의 뇌리를 충격한다.
 
이제는 거의 모든 법학자까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용어인 ‘이동권’은 아마도 권리라는 이름 붙이기 전략이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산물일 것이다. 이전까지 이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위였으므로 굳이 권리라고 이름 붙이는 사람이 없었다. 국가가 어느 날 밤 남산 아래로 끌고 가 폭행하고 영장 없이 구속하던 시기에나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가 억압된다고 느꼈을 뿐, 누군가 적극적으로 방해하지 않으면 이동의 자유는 언제나 보장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선언하는 순간, 기존의 시스템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던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이동’이 사실은 수많은 사회 인프라의 축적 속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그 가운데 인프라의 혜택을 부당하게 받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동권의 발명은 장애인의 자유를 어쩔 수 없는 불운이 아니라 달성해야 할 정치적 목표로 상승시켰다. 멋진 일이었다.
 
물론 권리라는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남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 모든 것이 권리일 수는 없다.(그렇게 되면, 오히려 진정 권리의 이름을 얻어야 할 자원과 행위의 중요성이 저평가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절실하고 당연하지만 이 세계가 언급하지 않는 미세한 행위와 자원들을 찾아서 권리의 이름을 부여해보는 일은 항상 매력적인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오줌권과 시각장애인 부모의 그림책 읽어줄 권리 이외에, 우리는 또 어떤 권리를 소유했는가? 본래부터 존재하는 권리라는 것은 사실 없다. 권리는 발명되는 것이다. 그 발명이 정의롭고 타당하며 세상에 충격을 줄 만한 것이라면, 언제나 성공한다.
  

글쓴이는... 

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지체장애인. 올해가 20대의 마지막. 지하생활자로 15년간 살았고 세상으로 나온지 올해가 지나면 15년이 된다. 한국사회의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서 대학을 지나 대학원까지 왔다. 관심사는 연극, 장애학, 생물학, 드라마, 소설, 진화론 등 다양하다. 까칠한 말투로 종종 비난을 듣는다. 스스로를 섹시하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아래는 요즘 읽고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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