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선배가 귀뜸해준 비법이다. 일단 친구들을 왕창 데리고 가서 왕창 술과 안주를 시켜 먹는다. 여기서 왕창이 중요하다. 주인장이 눈여겨 볼만큼 왕창 먹어야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집에서 조촐하게 술 한잔을 하고 외상(정확하게는 '가리'라고 했다)을 한 다음 약속한 날 칼 같이 외상값을 갑는다. 외상값을 갑는 날 술 한잔을 더 하면 금상첨화. 


출근길에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다가 문득 이게 20년 전 노래구나, 그러다가 단골집들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자유연상...


첫 단골집은 신사역 근처에 '축제'라는 호프집. 당시 고삐리였던 우리들에게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던 곳이라는 이유로 버스 몇 정거장을 가서 마셔댔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 1000cc에 천원, 500cc에 5백5십원 했던 것 같다. 500원짜리 동전도 없던 시절, 우리는 백원짜리, 오십원짜리, 십원짜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수놓으며 마셨다. 남자는 1000이라며. 지금이야 보기도 힘들지만 그때는 1000이 대세였다. 


고3 무렵에는 한강을 건너 대학로로 진출했다. '취바리'라는 막걸리집. 대부분의 손님들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로는 대학로였으니까. 흔한 민속주점들 중 하나였지만 세 번에 한 번 꼴로 동틀 무렵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밤 12시인가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아야 했기에 2차 3차도 없이 주구장창 쭉...

 

대학에 두 번 낙방을 하고 남산 위에 하얀 집이라 불리던 학원을 다닐 때는 숙대입구역 뒷편 '안성집'이 단골이다. 2500원 하던 김치찌게나 부대찌가가 주 안주. 절묘한 것은 다음 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가 안성이었는데 단골집 이름은 '서울집'이었다. 안주는 '안성집'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 뒤로는 이렇다할 단골집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부유하는 삶이지 않았나. 서울 도심에서는 당췌 단골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작년에 이사간 동네, 집 앞 실내 포장마차가 있는데 얼마 전에 외상을 했다. 닭똥집을 포장했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였다. 현찰이 없었기에 다음에 들리겠다고. 당연히 외상값을 갑은 날 똥집 하나를 또 포장했다. 이제 뿌리가 좀 내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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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계급사회 - 누가 대한민국을 영어 광풍에 몰아 넣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
남태현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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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영어가 싫었다. 국민학교 6학년 쯤인가 성탄절을 앞두고 반에서 카드를 돌리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때 난생 처음 영어로, 그것도 필기체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써보았다. 형이 가리켜줘서 썼다기보다는 그렸다는 게 맞다. ABCD도 다 외우지 못했지만, 왠지 있어보이는 '메리크리스 마스'에 아이들이 좋아라 따라했고 난 꽤나 우쭐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겨울이 지나 중학교에 들어갔더니 왠걸, 아이들은 이미 '아이엠 어 보이, 유알 어 걸' 따위는 다 알고 있었는데 난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가 싫어졌는가보다.

 

그후로 쭉 영어를 등한시 했다. 게다가 작가를 꿈꾸던 고교시절, 대체 왜 내가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로지 유일한 이유는 좋은 대학을 가야 하기 때문일 텐데, 작가가 되기 위해서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도 좀 웃기는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영어 공부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고3 학력고사에 죽을 쑤고(국어는 한두 개 틀리고, 수학은 한두 개 맞고, 영어는 서너 개 맞았나) 재수를 시작하며 성문기본을  두 달 동안 세 번 보고, 성문종합을 넉 달 동안 네다섯 번 보니 그해 대입시험에서 영어점수가 꽤나 잘 나왔다.

 

대학을 갔고 문학을 전공한 나는 다시 영어에게 안녕을 고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러다 문득 2년 전, 조지 오웰과 존 버거의 글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우선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부터. 그 다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리고 드디어 오웰의 <동물농장>.

 

나름 원문으로 보는 영어 소설이 재미났지만 읽어야 할 책들,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가는데 진도가 영 안 나가는 영어책을 붙들고 있기에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존 버거까지 가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책을 덮었다.

 

다시 영어책을 펼칠 날이 있을러나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에 <영어 계급사회>라는 책을 제작하는데 관여하게 되면서 제법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영어 열풍은 사기고 영어의 문제는 계급의 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영어로 쓰여진 책을 재미나게 읽기 위해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즐겁게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동료나 친구나 혹은 경쟁상대들보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영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이고 결국 투여하는 시간과 돈, 자본에 따라 순위가 결정날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매우 다양한 사례와 통계, 근거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의 영어 고민, 반나절에 길을 찾아드립니다." 출판사의 말이다. 어느 정도 홍보성 멘트겠지만 김규항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란다. 진짜다. 일단 영어 고민은 해결된다. 하지만 이 뒤틀린 계급사회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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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2-02-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1년 3월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69926.html
드디어 책으로 나왔군요.
 

올해가 어떤 해냐고 물어보면 제 주변 사람들은 십중팔구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매우 중요한 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올림픽이 열리는 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맞은 여름방학에 저는 집에 가지 않고 학교 근처 형들이 모여 살던 자취방에 얹혀 지냈습니다. 한 달 정도 노가다를 해서 학비에 조금이나마 보텔 요량이었지요. 마침 애틀랜타 올림픽이 열리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어나면 형들은 눈이 벌게진 채로 티브이 앞에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빈속에 일을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달랑 김치 하나에 물 말은 밥을 후다닥 해치우는 동안에도 형들은 티브이에서 눈을 뗄 줄 몰랐습니다. 다녀오겠다는 말에 고작 고개만 휙 돌려 “돈 많이 벌어와”라고 할 뿐이었지요. 작가가 되겠다고 늦깎이에 대학에 들어와서 방학 때 집에도 안 내려가고, 그 이름도 유치찬란한 ‘신춘돌격대’를 꾸린 뒤 창작에 열중하겠다고 굳은 맹세를 했던 형들에게 올림픽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올림픽이 정치권력의 선전수단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은 지는 오래되었지요. 프랑스의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2004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1936년 베를린에서 ‘유대인 배척 올림픽’이, 1980년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 올림픽’이, 1988년 서울에서는 ‘경찰 올림픽’이 이뤄졌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나치 독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도록 도와준 덕분에 히틀러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는군요. 사실 쿠베르탱은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가진 인종주의자였으며 “계집애들로 이루어진 올림픽은 흥미 없고 아름답지 않으며 무례한 일”이라고 했던 여성 혐오주의자였다니 올림픽의 타락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도덕적 타락과 함께 급속도로 상업화 되면서 국제평화 증진을 위한 축제가 국제적 비리의 온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라고 합니다.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테네에서 열릴 것이란 예상을 깨고 미국 애틀랜타가 개최지로 선정된 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의 수뢰 의혹이 불거졌고 이후 나가노, 시드니, 솔트레이크 등이 뇌물 의혹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으니까요.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을 덮고자 전두환 군부가 추진했던 88올림픽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던 젊은이들이 1990년대 날밤을 새우며 태평양 건너의 올림픽에 열광했다는 사실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불과 한 해 뒤 IMF사태로 이 땅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 경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까닭은 뭐니 뭐니 해도 ‘각본 없는 드라마’가 연출되는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공정성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꽤나 어린 시절 스포츠 중계를 보다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승리에 감격해서가 아니라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요. 석유가 꽤나 많이 나온다던 어느 나라와의 축구경기였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너무나 편파적인 판정이 계속 되었고 끝내는 한국대표 팀이 아깝게 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국가대표 간의 경기에서 앵커와 해설자가 노골적으로 한국을 응원하는 게 영 아니꼽고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울먹이며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노라 다짐도 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포츠와 선거는 비슷한 게 참 많습니다. 어쨌거나 승패가 가려진다는 점, 공정해야 한다는 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열불나게도 한다는 점, 그리고 언뜻 공정한 룰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며, 가끔 이변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본의 높은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 그렇지요.


참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정치판입니다. 그래도 인권탄압 양상하며, 시행하는 정책이며, 일처리하며, 연일 터져 나오는 비리까지 자유당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하니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심이 일어나 구시대적인 집권세력이 교체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물론 이 시대착오적인 권력을 반드시 교체해야겠지만 그런다고 우리네 삶이 근본적으로 변한다거나 세상살이가 눈에 띄게 좋아질 것인가 의문스럽다는 데 새해를 맞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인권운동은 국가보안법이나 사형 폐지,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인권 의제와 관련하여 여론조사 운운하는 것에 반대해왔습니다. 다수결로 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인권이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는 것이죠. 그렇듯 다수결로 결정짓는, 그것도 승자독식인 한국의 선거제도 아래서 선거를 통해 인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거나 대대적인 전진을 기대하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러하기에 《사람》에서는 정치의 계절이라는 2012년 한 해 동안 정치를 물고 늘어져볼까 합니다. ‘인권의 정치’라는 약간은 낯설고 조금은 무거운 주제입니다. 연중기획의 여는 글 ‘인권의 정치에 대한 단상’에서 정정훈은 “인권은 기존의 ‘합의’에 ‘불일치’를 제기하는 주체의 정치적 실천”이며 “배제된 자들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존의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민주주의’라는 말의 본래 의미에 부합하는 정치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인권의 정치는 “인권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는 과정”이며 “자신이 법의 적용 대상자(subject)이자 입법자인 저자(author)라는 점을 재확인·재규정하는 것”이라 합니다. 나아가 인권(운동)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후 교정이나 비판을 넘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내부로 들어가 …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다시 구성하는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고, 내재적 긴장과 갈등을 창출하며, ‘내재적 상상력’을 수혈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다시 구성하는 내재적 비판, 내재적 상상력, 그러한 인권의 역할이 자못 궁금하지 않나요?


꽤 오래 전부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듣고 사실 뜨끔했지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해서요. 연예오락만이 아니라 시사다큐 프로그램까지, 스포츠만이 아니라 정치에서 데모까지 그야말로 재미와 감동이 대세인 듯합니다. 과민반응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이 “팔리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을 대체하는 이 시대의 또 하나의 강박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잣대를 새롭게 만드는 일, 쓸모없음의 존재 가치를 찾는 일이 중요하듯 재미와 감동의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으면 그야말로 비인기 종목에서 벗어나기 힘들겠죠. 그렇지만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게임을 즐길 때 비로소 진정한 스포츠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려서 축구하는 걸 무척 좋아했던 저는 주로 인기 없는 포지션을 맡았습니다. 그때는 링커라고 불렀는데 지금으로 치면 미드필더라고 할 수 있지요. 얼마 전까지 국가대표 축구팀을 맡았던 조광래 감독이 일명 ‘컴퓨터 링커’로 불렸습니다. 왜 링커를 좋아했나 생각해보니 최전방 공격수나 최후방 수비수보다 부담은 훨씬 적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는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녀도 별로 티도 안 나는 자리였기에 그랬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날 경기가 잘 풀리려면 이 수비와 공격을 연결해주는 링커, 그야말로 중원에서 볼을 다퉈야 하는 미드필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이나 이제는 은퇴하여 전설이 된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처럼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 선수의 부지런함이 경기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이죠.


올해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정당 의석 분포도가 달라지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결코 인간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평택 대추리, 새만금과 부안,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국가보안법과 차별금지법. 그 시절 수첩을 꺼내보면 지금 정부에게 우리가 너무 야박한 점수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찌 해야 돈이 아니라 인간으로, 개발이 아니라 생명으로, 경쟁이 아니라 교육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킬 수 있을까요? 어찌 해야 효율성보다 존엄성을 더 높은 가치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공정한 룰만이 아니라 룰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적용 과정까지 개입하고 인권의 가치가 스며들어가게 하는 것, 저는 이 또한 인권의 정치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하기에 지난 2011년 서울에서의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과정, 학생인권조례의 원안 통과를 위한 성소수자들의 시의회에서의 점거는 인권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올해도 인권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인권의 정치에서 사건을 꾸미고,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믿음직한 링커를 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사람 2012년 1-2월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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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이란 게 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지금 여기가 바로 무간지옥이 아닐까.

<먼저 엄마의 목을 졸랐다. 잠에서 깬 엄마는 “XX야, 이러면 너 정상적으로 못 살아”라고 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몰라, 엄마는 내일이면 나를 죽일 거야.” 흉기로 엄마를 두 번 찔렀다. 엄마는 곧 숨이 끊어졌다.>

 - 미디어스에서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69

 




‘고3학생 모친 살해사건’에 담긴 나와 당신의 합리적 폭력[이재훈의 관조와 몰입 사이]
이재훈/한겨레 기자  |  http://nomad-crime.tistory.com

 

소년은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 나는 모든 것”이었다. 아빠는 언제나 집에 없었다. 아빠는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자주 집 밖을 겉돌았고, 5년 전부터는 아예 따로 살았다. 그럴수록 엄마는 소년에게 집착했다. 소년이 7살 때 엄마는 이미 소년을 ‘교육’하기 위해 매를 들었다.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빠가 여름에도 긴 바지를 입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의아해하면서 씻겨주려 옷을 벗겼을 때, 소년의 종아리와 엉덩이에는 피멍이 맺혀 있었다. 소년은 “괜찮아, 아빠”라고, 담담하고도 짧게 말했다. 엄마는 “아이를 왜 때리느냐”고 묻는 아빠에게 “애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가 사용한 폭력의 도구는 다양했다. 홍두깨로도 때리고, 야구 방망이로도 때리고, 골프채로도 때렸다. 그래도 소년은 자신이 엄마에게 “모든 것”임을 알았기에, 차분하게 엄마의 지시를 따랐다. 아니, 소년에게 엄마를 빼면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믿고 의지할 유일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의 방법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해줄 다른 의지와 관계의 대상이 없었다. 엄마의 폭력은 19년 동안 소년에게 ‘애정’이고, ‘교육’이었다. 소년은 엄마의 기대를 충족하려 애썼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한자리에서 16시간 동안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밥도 책상에서 먹으며 한 공부였다. 경시대회에서 상을 탔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토익이 900점을 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소년은 줄곧 ‘우등생’이었다.

하지만 성적이 잘 나올수록 엄마의 강박도 함께 커졌다. 반에서 2~3등을 해도 엄마는 만족하지 못했다. 엄마는 “전국 1등을 해야 한다. 서울대 법대를 가야 한다”고 말했다. “너는 의욕이 약하다”며 밥을 굶기고, 밤새 때리기도 했다. 엄마에게 소년은 결핍된 욕망을 대리해서 소구해줄 도구였다. 엄마의 어머니는 중학교 3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엄마의 아버지는 아들만 편애했다. 엄마의 아버지에게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엄마는 늘 삶의 객체로 존재했다. 하지만 삶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인정욕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사랑은 나의 욕망을 욕망이 아닌 것으로 인정해주는 유일한 행위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위무해줄, 그런 존재가 없었다. 엄마의 남편인 아빠마저 엄마를 인정욕구의 대상으로 도구화했다. 아빠는 ‘인 서울’ 대학 일어과를 나온 엄마와 결혼하며 ‘이 정도 여자면 어디 내어놔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신혼 초부터 그런 아빠의 반응에 극렬하게 대응했다. 면도칼을 들고 “당신이 나를 안 믿으니까 동맥을 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엄마는 스스로를 늘 ‘소중한 존재’라고 일컬었다. 가부장제에 의해, 단 한 번도 ‘소중한 존재’이지 못했던 엄마는, 스스로 그렇게 믿는 방법 외엔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니까 찬물에 손을 담그면 안 된다. 당신이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해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급 차를 원했다. 고급 차가 가진 브랜드는, 자신의 가치를 표상해주는 도구였다. 보통 차를 사면 “남들이 무시한다”고 버텼다. 아빠는 그런 엄마가 부담스러워 자꾸 집 밖을 겉돌았다.


   
▲ 한겨레신문 11월25일자


채워지지 않은 욕망, 그로 인한 결핍이 짙어질수록 엄마는 자식 교육에 집착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고 형질을 변환한다. 여기서 내 자식은 곧 나의 위상과 지위를 인정해주는 타인이자 곧 나이고, 내 욕망을 현시해줄 수 있는 도구적 존재가 된다. 가부장제 아래 욕망을 억압당해왔던 엄마는, 내 자식만큼은 억압당하는 개인이 되지 않길 욕망했다. 엄마에게 소년은 ‘패자부활전’을 위한 도구였다. 내 자식이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을 하면, 제도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는, 되레 다른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억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억압자는 타인에게 욕망을 인정해달라고 갈구할 필요가 없는 절대자다. ‘법대’는 그런 권력을 지니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다. 엄마가 자신은 욕망할 수 없었던 성공에의 욕망을 자식에게 모조리 투사한 까닭이다. 그리고 엄마는 ‘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지난 3월18일과 19일, 소년은 이틀째 잠을 자지 못했다. 잠만 자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밤새 엄마에게 폭행을 당했다. 엄마는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는 소년을 야구 방망이와 골프채로 마구 때렸다. 전국 모의고사 성적표를 62등, 67등으로 위조해서 줘도 엄마는 만족하지 못하고 ‘전국 1등’과 ‘서울 법대’를 강요했다. “너는 의지가 약하다”고 말하며 또 밥을 굶겼다. 토요일인 20일 아침, 소년은 내내 공포에 떨어야 했다. 22일은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다. ‘엄마만 없었으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전 11시께, 소년은 흉기를 들고 엄마가 자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먼저 엄마의 목을 졸랐다. 잠에서 깬 엄마는 “XX야, 이러면 너 정상적으로 못 살아”라고 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는 몰라, 엄마는 내일이면 나를 죽일 거야.” 흉기로 엄마를 두 번 찔렀다. 엄마는 곧 숨이 끊어졌다. 소년은 결국 ‘엄마가 나를 죽일 것 같은’ 상황에 이르러서야, 엄마를 끊어냈다. 삐뚤어진 집착이라도, 엄마는 소년을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타인이었기에 이제까지는 지시에 따라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엄마의 과도한 폭력은, 소년을 유일하게 인정해줄 대상 따위가 아니라, 삶의 근간인 목숨 자체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엄마의 존재감을 변질시켰다. 그래서 관계를 끊어냈다.

어릴 때부터 이어진 엄마의 폭력은, 소년에게 폭력을 일상화했다. 소년은 칼을 수십 자루 가졌고, 서바이벌 총으로 비비탄을 쏘길 좋아했다. 소년의 방문은 칼자국과 비비탄 총 자국으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칼과 총은, 관계 맺기에 미숙한 소년에게 타인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다. 관계 맺기에 미숙한 개인일수록, 관계는 맺기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지배를 위해선, 타인을 한순간에 제압할 수 있는 폭력의 도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소년은 폭력의 도구를 실제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첫 대상이 엄마였다. 그래서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엄마의 시신을 버리지 못했다.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도 몰랐고, 버릴 수도 없었다. 소년의 삶에서 관계를 맺었던 유일한 타인이었던 엄마는 관계를 끊었을지언정 끝내 버리지는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집안에 그대로 뒀다. 시신이 부패해 안방에서 냄새가 흘러나오자, 공업용 본드로 안방을 봉쇄해뒀을 뿐이었다. 그리고 8개월 동안 매일 꿈에선 3월20일 오전의 그 순간이 반복 재생됐다.

유일한 관계를 잃은 소년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야 했다. 그즈음 여자친구가 생겼고, 소년은 여자친구에게 엄마와 같은 방식으로 과도하게 집착했다. 여자친구에게 ‘네가 나를 안 만나면, 난 너 앞에서 죽어버릴 것’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엄마와 이혼 소송을 진행하고 있던, 이제까지 소년에게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아빠가 찾아왔다. 소년은 아빠에게 그동안 “엄마가 국외여행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해왔다. 하지만 아빠는 11월 초 출입국관리소에서 엄마의 출입국 기록을 조회했다. 엄마의 마지막 출국은 2004년이었다. 집에 찾아온 아빠는 “엄마가 (안방) 안에 있니?”라고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왔고, 그들이 안방 문을 여는 순간 소년은 갑자기 아빠를 껴안으며 말했다. “아빠,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안 버릴 거지?” 아빠는 다시 찾아온, 소년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이었다.


   
▲ 11월26일자 한겨레신문


인간이 극단적인 행위를 선택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관계와 구조가 그 행위의 기제로 작동한다. 그 개별적인 행위를, ‘일반적이라면 이렇게 선택했을 것’이라는 식의 다수의 합리성으로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이거나 악한 존재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과정, 그리고 그 관계를 둘러싼 제도와 구조의 결과물로 만들어진다. 소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은, 가부장제라는 문화적 제도로 인해 생긴 엄마의 결핍, 그리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억압자로서의 권력을 가지기 위한 도구로 한국 교육의 1등 지상주의와 성적 중심주의를 동원했던 엄마의 강박이 관계와 구조의 하나로 기능했다. 1등은 남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고, 성적은 남을 배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소년이 다닌 학교의 한 교사의 말처럼, “공부를 못하는 애는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하는 현실이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이다. 이런 현실을 만드는 데 그 누가 자유로웠던가.

결국 소년의 행위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합리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 온 제도의 모순이 한 가정을 통해 폭발적으로 드러난 비극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신은 여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개인들의 선택 지점은 보통 두 가지 정도를 찾아간다. 소년의 행위를 ‘패륜’으로 규정하면서 여전히 가부장제 혹은 가족 제도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소년을 ‘비인간’으로 타자화하면서 한국 사회의 교육 제도 안에 순응하는 나와 내 자녀의 교육적 선택을 구조 안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행위로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합리성이 유지되는 한, 소년의 행위와 같은 극단은 반복된다. 2000년 5월 부모의 스파르타식 교육과 폭력이 낳은 ‘명문대생 부모 토막 살인사건’이 그랬고, 2009년 10월 한 대학생이 집으로 배달된 학교 성적표를 보고 꾸짖는 아버지를 흉기로 살해하고 4개월 동안 집에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 그랬으며, 2010년 10월 13살 중학교 2학년생이 “판검사가 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와 꾸중,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을 모두 숨지게 한 사건이 그랬다. 이 극단은 그런 합리성 위에서 계속 비명을 질러왔고, 앞으로도 지를 것이다. 나와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글은, 한겨레 24시팀 취재팀이 ‘고3학생 모친 살해사건’이 공개된 11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힘겹게 취재한 방대한 양의 취재 메모를 토대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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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라는 그야말로 마이너스러운 곳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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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권과 그림책 읽어줄 권리

권리는 본래 헌법과 법률에 따라 주어진 특정 자원이나 행위에 대한 배타적 향유 능력을 일컫는 법률용어이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굳이 법률과 헌법의 조문을 따지지 않고 권리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주장하며 산다. 그것들 가운데는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그러나 사실은 아주 중요한 행위나 자원들이 포함된다. 이런 행위에 굳이 ‘권리’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상에서 잘 지각하지 못했던 그 행위나 자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고, 그러한 행위나 자원을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일상적이라 잘 감지되지 못하는 것들의 예로, 지체장애가 있는 한 후배가 종종 언급하는 ‘오줌권’을 들 수 있다. 배뇨활동은 헌법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에 포함되기 때문에 따로 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구체적인 행위의 자유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줌권’이라는 구체적 언어를 우리가 떠올리고 사용하게 될 때, 그 파괴력은 강력하다.
 
(주로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오줌권의 중요성을 다 공감할 것이다. 오줌권은 모든 자유의 근간이다. 장애인들의 외출은 언제나 ‘접근 가능한 화장실의 존재유무’에 따라 판단된다. 식당 메뉴의 질은 두 번째 문제이며, 경관의 아름다움이나 흥미로운 놀이기구의 존재도 그다음 조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화장실에 갈 수 있는가에 달렸다.
 
오줌을 눌 수 없는데 음식의 맛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오줌을 눌 수 없다면 연애는 무슨 소용이며 문화활동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밥은 집에서 먹고 갈 수도 있지만 오줌은 밥보다 자주 해결해야 한다. 장애가 없는 대부분의 사람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오줌권’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아니 사실은 더욱더 확보되어야 할 권리가 ‘배뇨’의 기회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장애인 중에 상당수는 방광염이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아서 배뇨를 참기 때문이다.
 
미세한 행위의 중요성을 포착하는 일은 장애인의 삶을 증진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지역 도서관운동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느티나무 도서관’에는 그림과 점자가 함께 있는 책이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나는 왜 점자책에 굳이 그림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각장애인 부모의 그림책 읽어줄 권리'를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적 행위를 비시각장애인들에게 각인시킨다. 시각장애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이들에게 아이에 대한 교육은 매우 중대한 책임이자 권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교육과정 안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포함되며, 그 책 중에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각장애 부모가 시각장애가 없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수 없다면 이는 심각한 자유의 제한이자 권한의 침해다. 이처럼 ‘시각장애인 부모의 그림책 읽어줄 권리’의 창안은 우리의 삶에서 자연스럽고 중대한 함의를 갖지만, 쉽게 포착되지는 않는 현실의 문제를 잡아내 비시각장애인들의 뇌리를 충격한다.
 
이제는 거의 모든 법학자까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용어인 ‘이동권’은 아마도 권리라는 이름 붙이기 전략이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산물일 것이다. 이전까지 이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위였으므로 굳이 권리라고 이름 붙이는 사람이 없었다. 국가가 어느 날 밤 남산 아래로 끌고 가 폭행하고 영장 없이 구속하던 시기에나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가 억압된다고 느꼈을 뿐, 누군가 적극적으로 방해하지 않으면 이동의 자유는 언제나 보장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선언하는 순간, 기존의 시스템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던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이동’이 사실은 수많은 사회 인프라의 축적 속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그 가운데 인프라의 혜택을 부당하게 받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동권의 발명은 장애인의 자유를 어쩔 수 없는 불운이 아니라 달성해야 할 정치적 목표로 상승시켰다. 멋진 일이었다.
 
물론 권리라는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남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 모든 것이 권리일 수는 없다.(그렇게 되면, 오히려 진정 권리의 이름을 얻어야 할 자원과 행위의 중요성이 저평가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절실하고 당연하지만 이 세계가 언급하지 않는 미세한 행위와 자원들을 찾아서 권리의 이름을 부여해보는 일은 항상 매력적인 결과를 낳는 것 같다. 오줌권과 시각장애인 부모의 그림책 읽어줄 권리 이외에, 우리는 또 어떤 권리를 소유했는가? 본래부터 존재하는 권리라는 것은 사실 없다. 권리는 발명되는 것이다. 그 발명이 정의롭고 타당하며 세상에 충격을 줄 만한 것이라면, 언제나 성공한다.
  

글쓴이는... 

원영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지체장애인. 올해가 20대의 마지막. 지하생활자로 15년간 살았고 세상으로 나온지 올해가 지나면 15년이 된다. 한국사회의 장애인치고는 운이 좋아서 대학을 지나 대학원까지 왔다. 관심사는 연극, 장애학, 생물학, 드라마, 소설, 진화론 등 다양하다. 까칠한 말투로 종종 비난을 듣는다. 스스로를 섹시하다고 공언하고 다닌다. 


아래는 요즘 읽고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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