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솔까말 프로젝트'라는 게 있다. " 낙태를 범죄화 하려는 움직임들에 반대하며, 낙태는 여성의 삶과 건강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기 위한 릴레이 글쓰기 액숀"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여기로)  

아래 글은 거기에 실린 글이다. 사실 이 글은 내가 만드는 잡지(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6월호에 실렸던 글이다. 당시 필자는 조심스럽게 인터넷에서의 공유를 늦춰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았는지, 솔까말 프로젝트에 공감했는지 자신의 블로그와 함께 여기에도 글을 올렸다.  

나는 남성으로, 파트너의 낙태를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이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저 나또한 머릿속으로는 낙태 찬성론자였으나 사실 낙태에 대한 생각 자체를 회피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 낙태 같은 이야기를, 반생명적이고 서양의 자유주의자들(문란한 성을 비도덕적으로 향유하는 사람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흥분하는 분이 있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나처럼 회피하고 외면해왔던 사람들이라면 아래 글을 찬찬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솔직히, 까놓고, 그러나 조심스럽게, 누군가 다치지 않고 서로 상처받지 않게 이 문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나갔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이런 소중한 글을 우리 잡지에 준 필자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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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의 어려움, 또는 낙태에 대한 작은 말하기

미 류


나는 섹스를 한 적이 있다. 한 적 있다, 라니, 이렇게 싱거운 말을, 그러나 말하기가 쉽지 않다. 상대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또는 얼마나 많은 수인지, 또는 얼마나 발랄하고 유쾌한 체위를 구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데, 차라리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훨씬 흥미로울 텐데, 그저 ‘했고’ ‘할 것’이라고 말하는 비혼 여성인 나는, 왜 모니터를 앞에 두고 괜히 낯부끄러워질까. 만약, 낙태에 대한 말하기라면 어떨까. 이 글은 말하기 어려움에 대한 작은 말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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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몸에 직접적인 고통을 주어 벌함"을 뜻한다. 체벌은 교육이나 훈육이 이니다. 그냥 벌이고 그런 벌을 과거에는 곤장, 태형이라고 불렀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금지된지 오래다.     

 

체벌은 물론 고문도 금지되어 있다. 절도, 강도, 폭행범 뿐만이 아니라 아동성폭력 사범과 같은 흉악범, 살인범에게도 징역형이 주어질 뿐(사형제가 아직 있지만) 고문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고? 그건 비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맞는 사람, 고문당하는 사람이 인간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둘째치고 고문을 하는 것, 때리는 것 자체가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건 분명하다. (폭력은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그건 피해자 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은 이런 범죄자들보다도 못한 모양이다. 체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체벌을 교육의 일환이라며, 불가피하다며 옹호하는 선생님들도 강력반 형사나 교도관, 검찰 조사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게 우리 나라 교육의 현실이고 학교의 실태라면 할 말이 없다.  

 

오늘 어떤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체벌에 대한 청취자 여론을 듣는데 한 남성이 "난 55살인데 무지 많이 맞았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맞으면서 반성한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다.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그런 기억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는 거 같다.   

 

매 맞는 아내들에게 가정폭력을 점진적으로 없애자고 이야기할 수 있나. 성폭력을 당하는 여성에게 성폭력에 대해 구체적이고 엄밀한 기준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폭력일 따름이다. 아이들이 두들겨 맞고 있다. 물론 때리지 않는 선생님이 더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 또한 때리는 선생님, 군기잡는 학생주임의 폭력에 기대어 통제되는 학교폭력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 멱살 잡으면 경찰서로 가는 세상이다. 국회의원이 탁자에서 방방 뛰었다고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사회다. 그런데 아이들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그 아이들이 자라며 뭘 배우고 커서 무엇을 하겠나. 이제 폭력의 대물림은 끊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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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자랑스러운가?

한글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문자이고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다른 나라의 글자, 다른 민족의 언어를 생판 모르는 상태에서 그러니 그러나 보다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어떤 작가는 한글이 아름다운 것은 모국어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겠지만 그렇다고 미인대회에서 우리 엄마에게 최고점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한글의 우수성을 밝히고 홍보하는 것은 다른 일이지 않을까
  

경향신문 - 다시 생각해야 할 광화문 한자 현판

프레사안 - 한글학회 회장 '사죄의 절', "세종대왕 뒤에 한자 현판이 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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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회의를 앞두고 광화문 복원 사업 마무리를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부의 행태를 봐오건대 아마도 능히 그럴 것이라 짐작된다. 광화문에 걸릴 '광화문' 현판 글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아니 있었던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공사 이전의 현판 글씨는 정희 대통령이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공사를 하면서 고종 임태영 한자로 '광화문' 내건다고 한다. 임태영 누군가 찾아봤더니 고종 시절 광화문 중건 당시 훈련대장을 지낸 이라고 한다.  

사실 독재자 박정희 글씨가 그야말로 광화문 복판에 걸린다는 쪽팔린다. 그렇다고 고종 훈련대장이 글씨가 내걸리면 쪽팔림이 덜해질까. 박정희  거보다 많은 인물이라고 해도 조선을 말아먹은 왕조에서 크게 했던 고종도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노무현 정부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주도로 광화문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현판 교체도 그때 결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당시에 박정희 대한 역사적 평가의 부분으로 말이다.)

문화재청의 입장은 경복궁의 본디 모습을 되찾으면서 정문인 광화문 현판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리 원판 사진에서 디지털 기술로 고종 임태영 현판 글씨로 복원할 것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본래의 광화문은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없어졌는데(그것도 왕조의 배신에 분노한 인민에 의해서) 고종 다시 세워진 건물을 모델로 복원 운운하는 것이 우습다. 더군다나 과연 유적, 문화유산의 복원이란 그렇다.   

불에 없어진 남대문을 지을 썼던 것과 비슷한 소나무, 그때의 기술, 그때의 방법을 동원하여 짓는다고 남대문이 복원되는 것일까. 역사란, 역사유적이란 결국 시대에 따라 재창조되고 다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적,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타지마할과 앙코르와트를 보러가는 아니겠나.

물론 재현이 의미 없다는 아니다. 다만 재현과 복원을 구분하지 못하는 안타깝고 그저 재현하는데 복원 운운하며, G20 그렇고 중앙청이라 불리던 과거 일제총독부 건물을 허물 그랬든 국운 상승 운운하며 거기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하는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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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어떤 나라 사람들이 한글을 자기 문자로 삼았다며 한글의 우수성이 입증되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참 남부끄러웠다. 물론 '어린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한글의 창제정신, 그리고 이른바 배운 자들의 핍박을 받아가며, 그러면서도 배우지 못한 자, 힘 없는 사람들이 애용했으며 그들의 손과 입을 통해 풍요로워진 역사는 참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런데 과연 작금에 그 한글을 누가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인가? 광화문 복판에 한자로 걸린 ‘광화문’을 보며 어느 외국인이 “너희들은 한글이 그렇게 좋다며 저건 뭔가? 하면 뭐라 답할 생각인지. 오뤤지의 대한민국에서, 서울은 온통 Hi, Seoul’로 도배되고 ‘동사무소’는 ‘주민센터’가 되는 나라, 그것도 광화문 앞에서 한글이 우수하니 어떠니 하는 말은 낯간지러워 도저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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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 때에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오르는 날개들과 물방울들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 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 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 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어
갈아 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늙은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음침한 기침을 하면서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쉴 것이다 


- '나는 숨을 쉰다' 전문,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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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실의 사찰을 받았던 김종익 씨가 국가인권위를 찾아가지 않고 MBC <PD수첩>을 찾아간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어제 MB정부 아래 현병철 인권위원장 취임 이후 1년 동안의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평가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관련기사 프레시안, "현병철 인권위 1년, 산으로 가고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인권활동가들은 국가인권위가 정작 두려워 해야 할 것, 그리고 인권활동가가 두려운 것은 이명박 정부가 벌인 국가인권위의 대대적인 조직축소도, 무자격(부적격이 아니라 무자격이다. 스스로 인권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밝힌 위원장과 앞으로 들어가서 공부하겠다는 인권위원들)에 정치권 눈치만 보는 소신없는 행보도 아닌, 국가인권위 무용론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가 나한테 해준게 뭔데? 그 딴 거 있으나 없으나 똑 같지 않나? 이런 질문은 사실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인권이라고만 하면 곧장 좌파니 빨갱이니 하며 거품을 무는 꼴보수 양반들만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종익 씨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아냥일 수도 있지만 냉정하게 이 사회에서 국가인권위의 역할을 <PD수첩>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을 국가인권위가 진지하게 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거대권력과 맞짱뜨고 있는 <PD수첩>을 국가인권위가 도와주고 지켜주기는커녕 모르쇠로 일관하며 묵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와중에 바로 오늘 그 무자격 논란의 주인공 현병철 위원장의 기자 간담회가 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프레시안, 현병철 "생활밀착형 인권에 집중"…민감 사안 외면 계속?


현 위원장은 생황밀착형 인권에 전념하겠다고, 자유권보다 사회권에 집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히셨다. 좋은 말이다. 생활밀착형이 여의도에서도 유행이더니 국가인권위까지도 왔다. 그런데 생활에 밀착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진보정당도 다 생활정치를 말하지만 인민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이 부재하다면 그건 그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지금 시대, 바로 오늘 현실에서 인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인권이 중요한지에 대한 말 없이 그저 생활밀착형 운운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며 인권을 옹호한다는 국가인권위의 존재이유를 망각하고 있거나 애초에 그런 게 국가인권위의 임무와 역할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말밖에 안 된다.


흔히 인권을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나눈다. 정치, 사상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게 자유권으로 불리고 교육, 주거, 의료, 노동, 복지 같은 게 사회권으로 불린다. 편의상 그렇게 나눈다고 한다. 하지만 인권논의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을 나눌 수 없다는 것, 둘 다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한 달에 6, 70만원을 벌어 사는 사람이 시청 앞에서 촛불을 들 수 있나,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 당장 먹고 살 것이 없고 집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나. 사회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권은 그저 가진 자의 사치품이 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자유권을 억압하면 사회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억압되고 차단된다. 노숙인은 서울역에서 쫓겨나고 도시빈민들은 집회 시위는커녕 철거용역과 개발업체의 먹잇감이 되고는 만다.  


당장에 장애인의 노동권, 최소한의 사회생활을 보장하라는 광화문 광장에서의 1인 시위도 막아나서는데 이건 도대체 사회권의 문제인가, 자유권의 문제인가?  우리에게는 <PD수첩>도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국가인권위원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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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18: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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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