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어려움에 대한 작은 말하기
나는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들은 충분했고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낙태를 하기 전이나 한 후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낙태를 한 이후로는 낙태에 대해 말하기가 조금 어려워졌지만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프로라이프 의사회(2008년 10월 산부인과 의사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진오비’는, 2009년 가을 낙태 근절 운동을 선포하고 12월 프로라이프 의사회로 이름을 바꿨다. 2010년 들어 제보센터 활동을 시작하고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며 낙태 근절을 위한 5대 우선 정책 과제를 발표하는 등 낙태 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가고 있다.)의 공세적 활동 ‘덕분’인지, 설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에서 낙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에도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몇 달 전이다. 낙태한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문득 생겨났다. 친밀한 관계에서 고민을 나눈 적은 없지 않았다. 조금 더 열린 자리에서, 또는 이렇게 글로 쓰면서, 말할 수 있을까. 대답은 질문과 동시에 드러났다. 말할 수 없었다. 우연하게도 엄마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누가 읽을지 모르는 글을 쓴다면, 엄마가 모르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입들을 거쳐 엄마의 귀에까지 전해질 수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엄마가 아는 것 자체는 걱정되지 않았다. 내가 섹스를 했건, 임신을 했건, 낙태를 했건, 엄마는 칭찬을 할 수도 야단을 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바라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엄마의 귀까지 이야기를 전한 입들에 담길 뉘앙스와 한두 마디의 덧말들은 오롯이 엄마 혼자 들어야 할 것이다. 그걸 엄마에게 감당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엄마의 얼굴을 빌어 말하기 어려움을 확인하게 되는 동안, 말하지 않음과 말하지 못함 사이의 경계가 그리 분명하지 않다는 걸 보게 되었다. 동시에, 말해야 할 것 같은, 배경을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였다. 세상은 온통 내가 해도 되는 일을 한 것인지, 하면 안되는 짓을 한 것인지를 놓고 떠들썩한데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현실이 갑자기 갑갑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인터넷 검색창에 ‘낙태 경험’을 몰래 넣어보니 ‘낙태 경험이 있는 여자 친구를 사랑할 수 있나요’ 따위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여성의 몇 퍼센트가 낙태 경험이 있는지를 말하는 통계 결과가 대부분이었다. 내 경험이 말할 수 없는 것이 되는 동안 어딘가에서 ‘낙태 경험’이 소모되어 남의 것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말할 수 없다니. 나는 그저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의 얼굴을 빌어 확인한 두려움은 결국 나의 두려움이었다.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낙태를 한 여성으로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하면, 허공에 붕 떠, 발을 딛으려고 할 때마다 미끄러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성폭력 피해로 임신을 하게 되지는 않았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면 주위의 친구들은 그 결정을 지지해주었을 듯하다. 비혼모에 대한 차별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친구들은 어느 정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을 벌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두 사람이 살아갈 만한 소득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키우지는 못하더라도, 버는 만큼 잘 살아갈 수 있었을 듯하다. 그런데 왜? 누가 묻지 않아도 나는 자꾸 내몰렸다.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도 나는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고작, 글을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마주하고서 끊임없이 변명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말할 수 없음에 저항하면서도 번번이 말하지 못함을 확인하게 된 시간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현재의 논쟁 구도에서, 여성은 태아를 죽인 자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누구이든 낙태 경험이 있는 나는 죄인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그러나 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 것과 죄인이 되는 것은 다르다. 나에게는 낙태 경험이 있지만, 낙태 경험이 있는 ‘나’를 드러내는 ‘커밍아웃’은 불가능했다. 태아는 내 몸 안에서 생명을 얻고 내 몸 안에서 죽어갔으나, 그 경험은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떠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되기 위해 이 논쟁구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논쟁구도 안으로
솔직히 고백하건대, 한동안 나는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하기 위해 애썼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생명권을 박탈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로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죽일 수 있는 절대 권력에 맞서며 인권이 ‘발명’되었고 생명권이 주장되었다. 그런데 태아는 스스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지 않을까. 다행히도 나는 곧 이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정신장애인이나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 문제에서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리 있는 자와 권리 없는 자를 묻는 접근은 경계를 작동시키는 권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태아가, 몇 주가 됐든, 생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은, 낙태 반대론자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막지 않든, 사형제를 반대하지 않든, 그만큼의 소중함이 있다. 그러나 생명을 아끼고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을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과 똑같지는 않다. 모든 생명은 살아있음을 향한 열망으로 구성된 물질이다. 또한 모든 생명은 살아있음 안에서 죽어감을 예비하며 그 순환을 통해 수많은 생명들과 관계를 맺어 서로를 살려낸다. 생명이라는 의미에서, 밥상 위에 오른 시금치나 4대강 사업으로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나 내 몸 안에서 사라져간 태아나, 또한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관계의 근본적인 의존성 때문에 우리는, 상처받을 수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것이 죽음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죽음들에 대한 애도이지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다.
다만 이 모든 생명은 특정한 관계로 배치되어 있고 그것이 언제나 정당하지는 않다. 우리는 엄마와 아이로, 음식과 사람으로, 자연과 인위적 힘으로, 그 외 다양한 관계로 만나 서로에게 생명의 의미를 일깨우지만 때로는 생명을 부당하게 훼손하기도 한다. 안락사 논쟁은 말 그대로 논쟁적이며 전쟁과 같은 것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관계가 배치되는 구조 안에서 생명권도 자리를 얻는다. 태아가 생명이라는 것이, 그리고 더욱 너른 범위로 확장되어야 할 생명권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 모든 죽음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죽음으로부터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또는 누가 만들어내고 있을까. 내 몸 안에 있던 태아는 단지 나의 선택 또는 결정에 따라 죽은 것일까. 그리고 낙태 허용을 주장하는 내 입장은 그런 선택이나 결정의 권한을 여성에게 주자는 주장인 것일까. 그래서 권력의 차이에 의해 일방적 의지가 관철되는 폭력을 허용하라는 주장인 것일까.
나는 분명히 낙태를 하기로 결정했으나 그것이 과연 선택이었는지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 하나의 혈관을 따라 이어졌던 태아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폭력을 행사했다고 생각되지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난 아무래도 이건 폭력이 아닌 것 같아.”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며, 말 뒤에 숨은 나를 따뜻하게 토닥여주던 친구가, “음, 아니, 그건 폭력인 것 같아.”라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했던 공감을 배신당한 기분이 아니라, 뭔가 나를 끈질기게 억누르던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던 것을 끝내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긴장이 쫙 풀리면서 오히려 편안해졌다.
나는 변명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런 고민을 했던 몇 달 동안 나는 법정에 불려나가 서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태아의 얼굴을 마주보며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듯도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판사와 마주한 휑한 공간에 홀로 놓여있는 듯했다. 내 뒤에서 낙태를 허용하라는 목소리들이 열심히 응원해주었지만 정작 나는 목소리를 잃은 느낌이었다. 나를 그 곳으로 이끌었던, 내가 변호해야만 했던 폭력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문이 열렸다. 이제 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낙태를 했던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낙태에 대한 기억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자기진단검사기를 처음 살 때가 떠올랐다. 별로 다닐 일 없는 동네의 약국에 들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친구의 검사를 위해 사러 온 것처럼 봐주기를 기대하며, “임신검사하는 거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때 숨겼던 작은 떨림. 근처 공공건물의 화장실에서 조용히 꺼내 시약에 소변을 묻힌 후, 계속 보고 있을지 다른 곳을 보다가 잠시 후에 확인할지를 고민했으나 눈길을 돌릴 수 없었던 짧은 시간. 보고 또 보다가 임신이 아니라고 결론짓고 검사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안도했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정체모를 불안까지 다 버리지는 못했던 기억.
콘돔을 요구했지만 사용하기를 꺼렸던 상대 때문에 그 후로도 임신검사를 몇 번 더 했다. 자연스럽게 점점 그를 만나지 않게 됐다. 그 후 콘돔 사용을 거부하는 상대는 없었다. 콘돔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생리주기도 꼼꼼히 확인하면서 잘 챙겨 사용했다. 그러다 생리가 일주일 넘게 찾아오지 않던 어느 날 다시 임신검사를 하게 됐다. “아, 어떡해!”
그 탄식의 현실성은 너무나 선명했다. 임신 양성 반응을 확인하고 또 하나의 생명을 마주해 경이롭거나 고맙고 반갑기보다는, 막막하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아, 어떡해!”. 그 탄식은 매우 복합적인 질문들을 하나의 문장에 담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아이를 낳을 것인지 낳지 않을 것인지만을 묻지 않았다. 나더러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삶의 한가운데로 들이닥쳐와 대답을 요구했다.
“아, 어떡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선택은, 물론 다양하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지 않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낼 것이다. 미안함과 아쉬움에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얼굴에 유난히 눈길이 끌릴 때에도,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못내 속상하고 서러워 가끔씩 눈물이 날 때에도, 혼자서 그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낼 것이다. 누군가는 원하지 않은 임신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며 살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울 것이다. 미뤄둔 결혼을 서둘러 하거나, 혼자 꿋꿋이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하거나, 혼자 아이를 기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거나, 그녀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녀가 이미 결혼을 했더라도 계획이 아니었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때로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말로 다 못할 행복을 느끼기도 할 테고, 누군가는 계획에 없던 계획의 결과 때문에 문득문득 아이가 미워지는,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것을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자신이 꿈꾸던 삶을 포기하기도 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꿈의 한 자락을 부여잡고 때로는 아이 덕분에 때로는 아이 때문에 뿌듯하거나 속상한 기억들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없지만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의 시간 동안에는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기르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적어도 나의 계획으로 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나는 어떤 꿈에 이끌려 인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일주일에 평균 절반 이상은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때로는 해도 해도 쌓이는 일들 때문에, 때로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받기 위해,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즐거움에 들떠 시간가는 줄 모르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신의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멋진 친구들을 보면, 그녀들을 닮은 멋진 아이들이 너무 이쁘고 못내 부러우면서도, 양육을 위한 노동의 수고로움을 내 몫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이유가 딱히 있지는 않았다. 그냥, 출산과 양육은 원해본 적 없는 무엇이었고, 간혹 생각이 스치더라도 엄두가 나지 않는, 그래서 고려해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나에게도 분명 어떤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임신을 확인하면서 탄식하게 되는 여성들이 출산에 대해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아이를 낳아야 함과 낳을 수 없음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에 권리라 이름붙인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임신을 중단하거나 낙태를 선택할 권리, 또는 재생산에 대한 권리라는 말들은 어디에선가 어긋나는 듯하다. 내가 정말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했다면 그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당연히 성과 재생산을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삶. 그러나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이미 다양한 조건으로부터 제한되는 ‘살 수 있는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선택의 결과로 낳을 수 없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태아에 대해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러나 태아와 나는 둘이자 하나였던 생명이므로 나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그 폭력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였다. 내가 행사했다고 여겨진 권력은 나를 가로질러갔다. 그것은 내게서 살고 싶은 삶을 살 권리를 빼앗아갔고 그렇게 만들어진 빈 자리에 들어와 작동하고 있었다. 나의 몸을 빌어 일방적 의지를 행사한 권력은, 선택의 순간에 나로부터 모든 권리를 회수한 채 ‘선택’만을 강요한 것이다. 내 몸 안에서 폭력이 순환하고 있었다.
‘폭력의 순환’
태아의 생명권에 여성의 선택권을 대립시키며 만들어진 현재의 논쟁 구도는 낳아야 함과 낳을 수 없음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권력을 은폐한다. 내가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판사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에 숨 막혔을 때의 그 목소리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 폭력은 여성의 몸 안에서 순환하나 여성은 죄인으로만 소환된다.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갈 권리로 섣불리 태아의 생명권을 압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 어떡해”라는 탄식은 여성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탄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성의 성에 대한 보호주의에 사로잡혀 오히려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는 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성교육, 떠들썩한 소란 속에서 오히려 숨을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만연한 성폭력, 임신과 출산과 양육의 모든 부담을 여성의 것으로 환원시키는 모성성의 강요다. 탄식은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내 몸 안에서 죽어간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나를 떠날 수 없다. 그런데 아이와 생명 대 생명으로 반갑게 마주할 수 없도록 만든 사회는 나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음에 저항하려고 하면 수치심이 따랐다. 낙태의 경험을 숨겨야 할 것으로 몰아가는 수치심은 어느 순간부터, 죄책감을 되새기며 아이를 애도할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었다. 낙태에 대한 죄책감과 달리, 수치심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요구받는 것이었다. 성폭력 사건에서 죄를 지은 남성이 아니라 피해를 경험하는 여성이 오히려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수치심은 나를 제압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우연히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을 읽게 되었다. 그녀가 9.11테러라는 충격적인 사건과 혼돈스러운 사회를 마주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하면서도 미국 정부의 반인권적 정책들에 저항하려고 애쓴 문장들이 우연히도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녀의 문장에서 ‘전쟁’을 ‘낙태’로 바꾸면 이렇다. “덜 폭력적인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폭력의 순환을 저지하려는 데 마음이 간다면 중요한 것은 낙태에 대한 절규 외에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생명 존중을 낙태 반대와 동일시하며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는 이들에게 이 문장을 읽히고 싶다. 수많은 여성들이 낙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조건에서, 그리고 아무리 피임을 열심히 해도 임신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는 조건에서, 과연 덜 폭력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유일한 답이 낙태 반대인가.
유일한 답이 낙태 반대인가
이제 다시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잘 살고 싶다. 우연히 생겨난 질문에 붙들려 지낸 몇 달의 시간 동안, 나는 권리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또 얼마나 허술할 수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삶을 왜곡할 수 있는지를 느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당분간은, 낙태와 관련해 여성이 요구할 수 있는 무언가가 권리의 이름으로 정리되면 좋겠다. 낙태는 불가피한 선택이어야 하지만, 여성의 말하기를, 피할 수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 어떤 권리이면 좋겠다. 그저 잘 살고 싶은 마음에 무엇을 더 붙이나 싶지만, 여성의 이름으로 나의 이름으로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권리의 이름을 달면 좋겠다. 그것은 선택이긴 하지만, 낙태의 선택 그 이상이다.
그것은 나에게 수치심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가 변명하도록 할 것이며, 사회에 권리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 조건에서 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를 더욱 찬찬히 들여다보고 성찰할 수 있을 것이며,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하지 않는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조건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통해 여성과 만나야 했던 소중한 생명들에게도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조건을 마련해줄 것이다. 탄식이 모두의 몫이 되는 순간, 임신을 확인하며 탄식해야 하는 여성의 수는 줄어들 것이며 아이들은 조금 더 즐겁게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고, 다양한 삶의 경험 중 하나로 임신과 출산을 고려할 수 있고, 레즈비언이나 게이들도 원한다면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 또는 엄마나 아빠가 누군지 굳이 묻지 않고도 아이를 기르는 일에 협력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는, 여성과 여성의 몸을 빌어 시작되는 생명 모두 조금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하는 상황을 자꾸 변명해야 하는 재생산의 수단으로 환원되지 않고, 생명을 피워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태아는 재생산의 목적으로 환원되지 않고, 삶과 죽음의 순환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조금은 더 행복해지길
작은 말하기는 이쯤에서 멈춘다. 긴긴 시간 동안 번져나갔던 고민을 글로라도 추스르려고, 늘 원고에 주릴 수밖에 없는 <사람>에 기고할까 하는 말을 슬쩍 흘리고, 글을 쓰도록 나를 보챘다. 조금은 편안해졌다. 나의 목표가, 공개적으로, ‘쿨하게’, 낙태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하기, 가 아니었다는 걸 글을 닫으려는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냥 지그시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언젠가 낙태의 경험은 또 다른 질문으로 나를 불쑥 찾아들 것이고 나는 또 추스를 수 없는 시간에 끌려 다닐 듯하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겠지. 그게 이 글을 쓰는 동안 얻은 작은 힘이다.
그러니 원고를 마치는 지금 기고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버렸으나, 보내기로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시도했던 작은 말하기들에 마음을 나눠 준 친구들처럼, 나도 누군가의 작은 말하기들을 응원하고 싶다. 내가 때로는 서운하거나 움츠러들었듯 누군가는 나의 말하기로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내 안의 혼란스러움이 투명해진 것이 내가 얻은 힘이었기에, 그 혼란스러움을 잠시 껴안아줄 수 있기를 나에게 그대에게 조심히 바래본다. 언젠가 서로를 응원해준 친구들과 함께, 몇 퍼센트인지로만 우리를 부르는 통계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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