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한 오년 전, 뭔가 배워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삼십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 그러고나니 돈도, 시간도, 따라서 심리적 여유도 빠듯해졌다. 아이가 자라 손이 덜 가게 되어 이제 뭘 좀 해볼까 주위를 기웃거리는데 또 덜컥 둘째가 생겼다. 사는 게 이 모양이다.    

첫째를 키우면서 돈도 비교적 적게 들고 시간도 짬짬이 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더랬다. 왜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었을까? 지나놓고보니 그게 삼십대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아리송하다. 그러다 아이가 말을 배우는 걸 보면서 문득 다른 언어가 배우고 싶어졌다. 신혼여행이랍시고 비행기를 타본 뒤에 바다 건너를 갈 일도 없고 길에서 두어 번 외국인과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살면서 별로 쓸 일도 없지만 영어로 된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조지 오웰의 작품처럼 그 사이 많이 번역되어 출간 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관심이 가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또 번역과 원문을 읽는 것이 천지차이까지는 아니만 제법 감동의 결이 다르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오로지 성문종합영어와 거기에 실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 덕분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 학교 공부와 담을 쌓고 밑에서부터 2,3등을 다퉜던 나는 재수를 하면서 비로서 영어공부라는 것을 하게 됐다. 썩 공부를 잘하던 친구에게 물어보니 성문기본을 두 번 보고 성문종합을 세 번 보면 학력고사에서 영어점수가 웬만큼은 나온다고 했다. (사실 내 영어점수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맨투맨을 권했지만)

안 그런듯 보이지만 나름 성미가 급하고 뭐든 대충대충인 나는 성문기본을 한 달만에 후딱 보고 성문종합을 한 대여섯 달에 걸쳐 세 번인가 네 번 본 것 같다. 사실 보고 이해했다기보다는 거의 달달 외운 수준이었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대입시험인 학력고사에서는 이런 방법이 통했다.  

 

   

 

 

 

 

 

  

 

 
그 성문종합에 실렸던, 전문도 아니라 발췌문으로 기억되는, 마틴 루터 킹의 '우리는 왜 기다릴 수 없나'쯤으로 제목이 기억되는 글을 독해하며 영어읽기의 즐거움을 난생 처음 느겼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문예창작을 전공하게 되면서 내 영어공부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런 이유로 가끔 영어를 접하게 되면 성문종합에 나오는 고등학교 수준 단어는 아는데 성문기본에 나오는 중학교 수준 단어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쨌든 근 이십년만에 다시 영어공부를 하자고 덤비니까 막막할 따름. 그래도 주변에는 영문과 출신도 여럿 있고 프리토킹은 물론 유엔인권이사회 결정문도 번역할 줄 아는 이들도 있어 든든했지만 역시 공부란, 특히 언어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어디 입사시험 볼 일도 없고 외국인을 만나 수다 떨 일도 없으니 우선은 무턱대고 읽어나보자고 해서 추천받은 책이 바로 English Re-start다.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책을 띠었다. (이것도 배이직과 스키킹 위주라는 어드밴스 1은 건너뛰고 리딩 위주의 어드밴스2를...) 태어나 처음으로 영어책 한 권을 다 본 거다. (이런 대견할 데가^^)   

 

 

 

 

 

 

 

 

 

고백하자면 이 233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보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보름 쯤 읽다가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뚝 끊기고, 또 열흘 쯤 읽다가 잡지 마감이 닥치면 쳐박아 놓고. 이렇게를 세네 번 반복한 거다. 그러다 문득 달력을 보니 12월. 내년이면 나이가 마흔인데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고 12월 1일부터 하루 20페이지씩 읽고 싶은 책들 꾹 참아가며 한 달만 집중하자고 덤빈 덕에 예상보다 일찍 책거리를 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책을 오전에 주문해서 오후에 받았다. 빠르다. (이렇게까지 빨라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 그 때문에 부랴부랴 책 한 권을 서둘러 마무리하게 된 듯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공로자는 바로 첫째 아이이지 않을까. 

이제 내년이면 다섯 살이 되는 아이는 요새 부쩍 한글에 관심이 많다. 물론 아이가 우리말을 배우는 속도는 내가 영어 배우는 속도를 훨씬 앞질러 갈 거다. 어휘력을 습득하는 것부터 실전 활용에까지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문자을 깨우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아이들은 언어를 더 빨리, 잘 배울까? 위 책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언어, 모국어 배우기는 생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어 도전이나 정복은커녕 영어 원정이나 나들이쯤으로 여기는 내가 어찌 아이들을 따르겠는가.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말도 영어도 내가 훨씬 더 잘한다. 하하하.  

 



 

 

 

 

 

 

 

 - 방금 전 도착한 <노인과 바다>와 몇 달 전에 영어공부하니 내놓으라고 떼를 써서 얻어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내 책꽂이에 있다. 어느 게 알량한 내 수준에 맞을 런지? 아님 아이폰에 넣어놓은 <피노키오>부터 읽어야할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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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0-12-14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취미로 영어 공부한다고 큰소리 뻥뻥 쳐놓고 계속 책만 사고 있는 형편이에요. 유람기라지만 곧 영어로 읽은 책의 서평도 올라오는거 아니에요? 나무처럼님 화이팅!

나무처럼 2010-12-14 17:50   좋아요 0 | URL
위에 두 권을 오늘 몇 페이지 읽어봤는데... 진짜 화이팅이 필요하군요. 쩝...

카스피 2011-01-0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영어공부를 다사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나무처럼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세용^^

나무처럼 2011-01-04 17:52   좋아요 0 | URL
영어공부까지는 아니고 출퇴근 시간에 영어책을 읽는 정도인데.. 영 진도가 안 나가서... 다른 읽고 싶은 한국어 책도 많은데 이러고 있는게 맞나 싶기도 하고. 하여튼 올 한해는 꾸준히 한번 해볼라구요. 참 카스피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