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를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았다
강은교 / 동화출판사 / 1995년 2월
절판


사랑法

떠나고 싶은 者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者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時間은
沈默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者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者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강은교-17쪽

양수리에 가서

가을이면
양수리에 닿고 싶어라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양수리에 가면
강르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장 차갑고
가장 순결한
물과 물이 만나
그저 뼈끝까지 가난하기만한
물과 물이 만나
외로운 이불 서로 덮어주며
서러운 따스함 하나를 이루어
다둑다둑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난한 것을
왜 그저 외롭다고만 하랴
외로운 것을
왜 그저 서럽다고만 하랴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헐벗은 가을나무들
제 유언을 풀 듯
조용히 물그림자 비추어
스스로 깊어지는 혼자 외로움
거울같이 전신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가을이면
양수리에 가고 싶어라
어디선가 나뉘였던
물과 물이 합하여
물빛 가을이불 더욱 풍성해지고
가을나무 물그림자
마침내 이불 덮어 추위롭지 않으니

홀로 서 있다 하여
어찌 외롭다 하랴
하늘 아래 헐벗었다 하여
어찌 가난하다고만 하랴

-김승희-41쪽

비망록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문정희-109쪽

너를 우한 노래 9

산은
산만큼의
말줄임표

침묵 속에서
차고 빛나는
하나의 정신으로 남기 위하여

나는
나의 사랑만한
말줄임표

-신달자-145쪽

너를 위한 노래 10

문 잠긴 방에도
새벽 오듯

창 없는 감옥에도
봄 오듯

눈감고 있는 내게
너 온다.

빛의 속도로
어둠을 뚫고.

-신달자
-146쪽

입술자죽

따귀 맞아 부르튼
조 귀싸대기에
오오 입맞춤한 입술자죽
요 이쁜 꽃잎
씀바귀꽃 피었다

삶은 쓰거워도
소태맛이어도
사랑은 피어나고
웃음도 고와라
눈물겨워 아름다워라.

-유안진-153쪽

편지 쓰기

네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
발견하고 사랑하며
편지를 쓰는 일은
목숨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행위

글씨마다 혼을 담아
멀리 띄워 보내면
받는 이의 웃음소리
가까이 들려오네

바쁜 세상에
숨차게 쫒겨 살며
무관심의 벽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때로는 조용히
편지를 써야 하리

미루고 미루다
나도 어느 날은 모르고
죽은 이에게 편지를 썼네

끝내 오지 않을 그의 답을
꿈에서도 받고 싶었지만
내 편지 기다리던 그는
이 세상에 없어
커다란 뉘우침의 흰 꽃만
그의 영전에 바쳤네

편지를 쓰는 일은
쪼개진 심장을 드러내 놓고
부르는 노래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때로는 편지를 써야 하리

四季의 바람과 햇빛을
가득히 담아
마음에 개켜 둔 이야기 꺼내
아주 짧게라도
편지를 써야 하리
살아 있는 동안은-

이해인-186쪽

바람 부는 날

또 한 번 천지는
흔들리누나

꽃잎은 펑펑
눈처럼 쏟아지고

고꾸라질 듯 고꾸라질 듯
내 영혼 흐느끼느니

알고 싶구나
愛人아

바람 부는 날은 그 마음에도
아픈 금이 그이는가.

-허영자-213쪽

봄 한나절

마음도 달뜨는
봄 한나절에는

쓴냉이 쓴물조차
짙어 스며오르고

초록 아래 진초록
겹쳐 피어나듯이

그리움 머언 그리움
울음처럼 복받쳐라.

-허영자-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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