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 세상이 깜빡하는 대신 주방쪽 형광등이 깜빡인다. 거실과 주방이 특별하게 나뉘어 있지는 않지만 주방과 거실등이 각각이다. 혼자 있을 땐 거실 등을 켜지 않고 식탁이 있는 주방쪽 형광등을 켜놓고 산다. 오늘은 남편의 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았다. 깜빡. 형광등이 깜빡였지 아마? 고개를 들어 형광등을 노려 보았는데 이상없어요, 같은 묵묵함 뿐. 얼마 후에 노트북을 갖고 와 인터넷 창을 열었는데 다시 또 깜빡, 한다. 다시 또 노려보고. 깜빡 형광등을 마주칠 때까지 노려보고. 조금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본격적인 깜빡 공세를 펼치는 형광등. 아... 왜 하필이면 벌건 대낮에 깜빡하는거야. 방으로 들어가버리면 될텐데 어쩐지 오늘은 남편의 자리가 포근하니 좋다. 

뻔한 집안 구조이다 보니 나는 내가 위치를 바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벽 쪽에 기대어 있던 탁자를 거실 한 복판에 놓거나 창을 등지고 앉기, 침대에 기대어 탁자를 놓을 때도 있다.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위치를 바꾸다보면 늘 있던 공간이 아니라 다른 데 놀러온 기분이다. 힘들여 가구를 바꿀 생각은 안한다. 어제도 창고처럼 쓰는 방을 청소하고 났더니 팔 다리가 후들거렸다. 욕심껏 쟁여놓은 옷들을 열벌도 넘게 버렸다. 신혼 시절, 남편한테 잘 보이려고 산 반짝이 노란 스웨터에도 보풀이 나서 집에서 입는 옷으로 신분을 바꿨다. 물먹는 하마를 사다 놔야 되는데 마트에 가면 딴전만 피운다. 덕분에 우리집엔 1kg짜리 설탕이 세 개, 우유는 끊이질 않고, 재활용 버릴 때 민망할 만큼 요구르트 빈병이 나온다.  

어쨌든 깜빡하는 형광등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마트에 갔다. 또, 눈에 들어오는 것부터 살까봐 형광등이 있는 쪽으로 직행, 무기처럼 손에 들고 바구니를 들었다. 며칠전에 한 바구니 봐 놔서 별로 살 것이 없다. 몇 개의 공산품을 덤으로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광등 갈아 끼는데 선수까진 아니어도 한번 경험이 있는 터라 코웃음 한번 쳐주고 식탁의자에 올라갔다. 길쭉한 형광등이어서 한 쪽 끼우고 한 쪽 끼우는게 보통 일이 아니다. 천신만고 (정말 적절한 표현이다...) 끝에 형광등을 끼웠는데 불이 안들어온다. 막 급한 일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막 지금, 식탁 앞에서, 노트북 앞에서 뭔가 급히 할 일이 있는 것 마냥 초조해진다. 얼마전 스위치 바꿀 때 관리실 전기공 아저씨한테 도움을 받은 터라 망설일 것 없이 관리실에 연락, 방문을 부탁드렸다.

전기공 아저씨들이 자릴 비워 안면이 있는 경비 아저씨가 오셨다. 아저씨한테 형광등 갈아 끼우는 걸 제대로 배우는 좋은 시간이었는데 형광등이 불량일세. 아저씨가 바꿔 줄거니깐 염려하지 말고 다녀오란다. 염려 안했는데 ^^;; 냅다 종이 커버를 다시 씌우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뿐하게 올라 1층을 눌렀다. 1층에 도착. 어라어라. 문이 안 열린다. 어머! 갑자기 운전대를 맡게 된 스피드의 산드라 블록처럼 당황스럽지만 위기를 모면하게 될 거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멈췄지만 키아누 리브스같은 누군가가 살려줄 거라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늘 궁금했던, 비상벨을 누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오히려 휴대폰을 갖고 나오지 않은 게 두려웠다. 마구 낙천적일 수만은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비상벨을 눌러 한번도 제 때에 구원자가 오는 걸 영화에선 한번도 못 본 것이다!

두려움반 설렘반으로 비상벨을 눌렀다. 소리가 참 컸다. 동시에 경비아저씨의 음성이 들리면서 엘리베이터가 말했다.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문이 열렸다. 휴. 십년 감수했단 말이 꼬장꼬장한 할매 톤으로 새나온다. 아저씨한테 괜찮다는 말을 하고는 바로 엘리베이터 이상 있다고 신고했다. 돌아올 때 보니 엘리베이터는 잘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엘리베이터, 어쩐지 불안하다. 관리실에 전화 한번 해주고. 어쨌든 형광등을 사와 교체했다. 한 30초 걸렸나? 거만거만... 친절한 경비아저씨가 30분쯤 후에 형광등 안부를 물어오셨다. 발랄하게 감사 말씀 드리고 대낮처럼 밝은, 깜빡하지 않는 형광등 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이 참... 길었다. 이상하지. 알라딘 편집기에 글을 쓰면 글이 잘 써진다. 길게, 오래오래 ^^;;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10-3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잘 써지는 알라딘 덕분에 저도 플레져님 글 재미나게 읽었어요 참 사진 정말 리얼하고 생생하네요

플레져 2006-10-3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공개 파일을 하나 더 만들어 자서전이라도 쓸까봐요 ㅎㅎ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하늘바람님 ^^

nada 2006-10-30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가구를 바꿀 게 아니라 내가 위치를 바꾸면 되는 거로군요. 물구나무도 설 줄 알면 좋은데..

비연 2006-10-3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글은...늘 참 좋아요^^

플레져 2006-10-3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물구나무 서는 거 만만찮아서 전 아예 생각도 안해요.
성공하시면 말씀해주세요 ^^ 참, 여행은 즐거우셨죠? 서재에 가서 봤는데
그저 보기만 하고 혼자 웃고 와버렸습니다.

비연님, 에구. 감사합니다 ^^;;

날개 2006-10-30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덕분에 비상벨을 눌러보셨구만요..
사실 엘리베이터 탈때마다 그거 한번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이러다가 언젠간 나도 모르는새 확 눌러버리지 싶어요.. 진짜 그러면 어쩌죠? ㅋㅋ

blowup 2006-10-31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광등 갈아 끼우고 나면, '혼자 살아도 되겠다~' 이런 생각하곤 해요.
못 박는 거만 잘하면 되는데.... 이거 은근 어려워요.
제가 전동 드릴의 그 굉음을 잘 못 견뎌서, 손으로 박아야 하는데.
아파트 벽에 손으로 박을 수 있는 못은 별로 없더라구요.
내 손 박기 십상이죠.
암튼, 비상벨도 눌러 보시고. 경험 하나 느신 거예요.^^

마노아 2006-10-3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마지막 사진이 적절하네요. 님의 오늘 기분일까요? 멋져요^^.. 아, 어제 기분이다^^

icaru 2006-10-3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치를 바꾸다보면 늘 있던 공간이 아니라 다른 데 놀러온 기분이란 말에 늘상 집에 있는 저, 따라해 보고픈 마음이 들었어요... 글구 욕심껏 쟁여놓은 옷을 열벌씩이나 제가 맞으면 가져다 입었을텐데..풋..제가 플레져 님 몸맵시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림도 없네요...흣.. 전 워낙 안버리고 쟁여놓고 사는 사람이라 몰랐는데 언젠가 한번 정리한답시고 오랜동안 지녀온 여벌의 옷들을 버렸는데.. 예상외로..뭘 정리해 버려버리는 그 쾌감이 또 짜릿하대요..

플로라 2006-10-31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모습을 바꾼 집으로 들어가니 정말 기분이 새롭더라구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이상한 자신감까지 생기던걸요. ㅎㅎ 그런 거에 무심했는데, 실감이 나더라구요.

플레져 2006-10-3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눌르고 싶었다는 마음 갖고 있을 때가 더 나아요.
눌렀더니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그런 일 없으셔야 해요!

나무님, 빙고! 경비아저씨한테 제대로 배워서
마음 한 쪽에선 그런 생각으로 살게 될 지도 몰라요 ㅎㅎ

마노아님, 어제 짜릿한 형광등 교체 순간이 있었죠 ^^;;

이카루님, 뽀동이 엄마 넘넘 반가워요 ^^
버린 옷들, 보풀 나거나 싼맛에 사서 일회용처럼 전락해버린 옷들이었어요.
가랑비에 옷 젖는줄 모른다더니 싼 맛에 뭐 사는 거 자제해야되요, 정말!
창고방을 정리했더니 넘넘 개운해요. 그맛에 탁자들고 들어가 책 읽고 싶어졌잖아요 ㅎㅎㅎ

플로라님, 그러니까요, 그 맛 정말 괜찮죠?
어릴때 우리 집도 수리를 한 적이 있어요. 헌집이었는데 새집으로 바뀌어서 어찌나 달달한 쾌감을 느꼈던지요.

2006-10-31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1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11-0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님 알려주셔서,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

2006-11-0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6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7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9 0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11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