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파카'나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어떤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 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詩 송찬호 1959년 충북 보은 출생, 경북대 독문과를 졸업.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6호에 ‘금호강’ ‘변비’ 등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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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들이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중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품이래요.
  너무 좋지 않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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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1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좋군요~

세실 2006-02-1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저도 한때는 만년필을 좋아했던 적이 있어요~~~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옛 추억을 생각하게 해주는 군요...

ceylontea 2006-02-1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저도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년필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요즘은 컴퓨터와 프린터를 사용하니 점점 글 쓸일이 없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글씨도 엄청 못 쓰고 말입니다..
요즘은 만년필 사용하니 기분은 참 좋아요... 전 3자루의 만년필이 있는데 가는 촉을 좋아해서 모두 EF촉입니다.. ^^
보라색(제가 좋아하는 색.. ^^), 파란색, 검정색을 사용하고 있어요... ^^

산사춘 2006-02-1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의 만년필도 좋아요.

이리스 2006-02-13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년필 좋아라해서 비싼 돈 들여 몇개나 사놓고는 거의 고사만 지냈죠. -_-;;

플레져 2006-02-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그 마지막 싯구는 정말 명문이어요.
세실님, 교양과목 모 교수님은 만년필로 레포트를 제출하라고 했었어요. 잉크 넣는 게 번거롭긴 했지만, 글씨 쓰는 동안 참 좋았어요.
실론티님, 3자루의 만년필과 세가지 색을 갖고 계신 님이 부럽네요. 보라색 만년필로 사랑도 쓰세요...ㅎㅎ
산사춘님, 제 만년필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꾸벅.
낡은구두님, 만년필은 한 자루쯤 소장하고 싶은, 애장품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mong 2006-02-1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어요
플레져님의 만년필에는 무엇이 살까요? ^^

Laika 2006-02-1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려서 보라색 싸구려 만년필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빌려 입은 작은 언니의 엘르 롱코트를 망가뜨린 아픈 과거가 있어요...가방안에서 뚜껑이 열린 만년필이 하루종일 쓱싹쓱싹 코트를 쓸고 갔으니....

2006-02-14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2-14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그 부분도 좋은데요. 다 좋아요~
몽님, 제 만년필에는 굳은 잉크만...흑...
라이카님, 아... 생각만해도 아까워요. 코트와 애궂은 만년필 뚜껑과, 곤란해하는 라이카님과... 코트를 보면 그 생각이 떠나질 않겠어요.
속삭님, 재미나게 보셔요 ^^

ceylontea 2006-02-1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어머.. 프레져님.. 사랑이라구요.. 아이 부끄러워..
쓰잘데기 없는 업무 내용만 휘갈기고 다니고 있어염.... ㅠㅠ

플레져 2006-0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어제는 사랑을 쓰셨어야 하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