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쉰다섯 해를 살다 가셨다. 요즘 평균 수명과 견주지 않더라도 턱없이 짧은 생이다. 십일 년 후면 나도 그 나이다. 손을 본다.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진 손은 청년의 손은 아니지만 아직 노년과는 거리가 멀다. 십 년 후면 주름이 지고 피부가 건조해 있을 테지만 생명력은 여전할 터. 그러한 손과 몸을 가지고, 잔여 에너지가 절반 남짓 남았을 때에 가신 것이다. 십 년 후... 그때 이별한다면, 너무 이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는 나를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너를 떠날 수 있을까? 준비가 되어 있을까? 십 년 후든, 이십 년 후든, 혹은 삼십 년 후라도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듯싶다. 하여 십 년이든, 일 년이든, 혹은 한 주 후가 되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다. ㅡ2016.2.22.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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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를 꺼내 든 건 지난 연말 서울 방문 때 동서들과 나눈 대화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다는 큰동서, 그의 말에 유시민 이야기를 길게 했던 나로서는, 주로 전작인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하여 그가 글쓰는 삶을 본업으로 삼게 된 경위와 첫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 때부터 그의 진가는 독창적 글쓰기보다는 기존의 사실을 읽기 쉽게 정리하고 해석하여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고 늘어놓았던 일 말이다. 이 시대에, 그리고 중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묻고 있는 내게 서재에 꽂혀 있던 그의 책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 동서들에게 소개한 그의 삶의 궤도 수정 과정이 나 자신에게도 동기 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나˝로 시작하는 글을 쓰자는 제안에 마음이 동한 터였다. 

여기서 ˝나의˝라는 관형어는 나를 앞세우고 나의 경험을 중심에 두려는 관행적 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관점이 한정적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제한성이 갖는 유익을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제시하려는 겸손과 관찰, 고백의 의미에 근접해 있다. (현 시점에서) 글을 읽고 쓰는 하나의 전범으로 삼아도 좋겠다. 

또 하나는, '같이 읽기' 위해서다. 우리말 책이 드물고, 책을 읽고 그 얘기를 하는 일은 더더욱 드문 북경에서 누군가와 함께 읽고 나누고 싶다는 바람 비슷한 것이 자라났다. 혼자 하는 독서, 혼자 읽는 것을 넘어 뭔가 공동의 것을 일구고 싶다는 바람과 필요가 절실해진 탓이다. ㅡ2016.1.26.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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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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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잠이 오지 않아 읽었다. 불면의 밤에 읽은 책. 


2_ 

4년 전, 주안이와 다녀온 스페인은 느리고 낙천적이고 친절했다. 시내 거리 간판에 인터넷 ADSL 서비스 광고가 한창이었다. ADSL이라니, 대체 여기는 어느 시절인가. 사진을 찍어 웹하드에 저장하고자 업로드를 걸었더니, 백여 장의 사진을 올리는 데 예상 시간 열두 시간이 나왔다. 민박집 피씨를 독점할 수 었었기에 업로드를 포기하고 CF 카드를 더 사서 사진을 저장했다. 스페인은 유럽의 대표 국가 아니던가. 16세기 무적함대를 앞세우고 지리상의 발견과 세계 식민지 건설에 앞장설 만큼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이지 않은가. 한데 우리에게는 십여 년 전(확인이 필요하지만) 끝난 ADSL을 최신의 속도를 자랑하는 인터넷 서비스로 팔고 있다니. 내가 사는 세상과는 분명 다른 곳임에 틀림없었다. 


3_ 

스페인 내전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서 처음 읽었다. 하지만 남의 나라 역사는 머리 속에 잘 형상화되지 않고 그나마 읽은 내용도 이내 잊힌다. 책 표지 사진으로 올라 있던 로버트 카파의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의 이미지만으로 그 참상을 짐작했을 뿐, 스페인의 역사는 내게 아스라한 기억만 남겼다. 


4_ 

마침 지난해,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사진을 남겼다. 어쩌면 '병사의 죽음'은 전장에서 찍은 예외적인 사진일 것이다. 카파의 사진은 전장 이면의 풍경을, 폐허가 된 마을, 피난민, 퇴군하는 군대, 공습경보 등 그는 전장 이면의 모습에 다가가 셔터를 눌렀다. 생생한 죽음의 현장보다 마음에 남는 사진이었다. 


5_ 

모든 전쟁은 비극이지만 내전의 상흔은 너무 깊고 오래 간다. 내전은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고 그가 이끄는 군부 체제는 (이 책을 읽다 확인했는데) 1975년까지 이어졌다. 이후 왕정이 들어서면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75년까지라니, 참으로 길다 싶었다. 한데 우리네 역사는 80년대까지 군부 통치를 받지 않았던가 하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군부의 지배와 그보다 앞선 내전의 상흔을 안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 한 달 남짓 여행하며 경험한 그들의 너그러움과 느긋함과 친절함에서는 그런 역사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6_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의 공화파와 그에 맞서는 인민전서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인간의 기치를 든 유파였다. 러시아, 중국, 일본, 조선 반도에 아나키즘이 전파되고 변형되고 자생했듯이, 나라와 사회와 이웃이 진영을 나눠 싸우며 너는 어느 쪽이냐는 물음을 강제하는 현실에서 자신을 쉽게 어느 진영에 던질 수 없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며, 아나키스트가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단의 시대에 자기 어느 한 쪽에 자신을 투신하지 않기란 생존의 위협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안토니오가 공화국 군대에 징집될 것을 피하기 위해 인민전선파에 투항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적 선택일 것이다. 


7_ 

안토니오는 내전 종식된 후, 결정적으로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아나키스트의 신념에 위배되는 삶을 산 것에 대해 내적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그의 평생이 그에 대한 회한으로 점철된다. 신념을 함께하기로 했던 동지들이 하나 둘 처음 마음을 버리고 변졀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괴로웠고 최종에는 자신의 변절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하여 그의 삶은 자괴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나키스트는 안토니오가 젊은 날에 꿈꾸었던 이상이자 인생의 기준점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가 정말 바랐던 것은 '새처럼 자유로운 삶'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날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 남부의 시골에서 피신 생활을 할 때 잠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평화를 맛보았을 뿐, 그의 일생은 자유와 거리가 멀었다. 노년에 우울증을 앓던 요양원 창문에서 이 땅의 짐을 내려놓고 하늘로 비상했을 때, 평생 염원하던 자유를 맛보았을 뿐. 


8_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제외하고 안토니오의 인생은 스페인의 역사, 구체적으로 스페인 내전의 상흔과 거기에 기초해 세워진 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안토니오만이었을까. 지난 세기에 자유를 꿈꾸었던 인생은 안토니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나키스트이건, 자유주의자이건, 낭만주의자이건, 현실참여자이건 간에. 


9_ 

지금 내가 있는 북경, 이곳 사람들은 호탕하고, 친절하고, 수평적이고, 똑똑하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사회주의의 유산, 그리고 짐작컨대 가난과 역사의 상처로 말미암은 유산을 입은 이곳 사람들은 정이 있고(아니, 많고), 말이 많고(싸우는 것 같지만, 정겹고),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놀랍게도 비권위적, 수평적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불과 반 세기 전, 이들은 혁명을 겪었고, 60년대에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경험했고, 천안문민주화운동을 경험한 것도 불과 한 세대 남짓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이처럼 강하고 친절하고 명민한가. 화두이다. 


10_ 

스페인 현대사를 이해하기에 참조할 여러 관점 중 하나이다. 중학생 딸에게 읽히기에는 성적인 묘사가 적나라해서 주저되지만, 스페인어를 배우고 그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그때 슬며시 아이의 서재에 올려두어도 괜찮겠다. 스페인 역사를 다룬 다른 책과 함께 말이다. 


11_ 

불면의 밤, 주절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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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이 보라고 책을 두 권 샀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마시게 할 수는 없다 했지만, <블랙 뷰티>는 원체 주안이가 좋아하는 책이자 축약본으로 여러 차례 읽은 터라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보면 무난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바라 본다. 읽기를 마치면 근사한 선물을 줘야겠다). 


펭귄 '시그넷 클래식'은 중고생들이 즐겁게 볼 만한 책들을 알차게 선별해 놓았다. 그렇지만 세련된 디자인과 장정으로 인해 독자층이 청소년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도 보고 싶건만, 내게 없는 것은 시간이다.) 우리 출판계에 세계문학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그 토양 위에 새롭고 신선한 기획의 세계문학, 클래식 출판이 이어지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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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2-02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지로 학원 보내서 영어 공부를 시키는 방식보다는 영문 소설을 읽게 하는 방식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주안이아빠 2016-01-09 12:22   좋아요 0 | URL
영어 책 읽게 하는 것도 때론 부모의 욕심이고 아이한테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즐기게 해 줘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일이더군요. 부모의 지혜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통해서 본 중국 출판 문화의 저력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는 벨라루스(<체르노빌의 봄>의 배경인)라는 자그마한 동유럽 국가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돌아갔다. 이미 뉴스를 통해 전해들은 것처럼, 그의 작품은 일반 문학이 아닌 고발 형식의 기사라 할 수 있는 르포이다(조지 오웰의 르포 문학을 더불이 읽어 보면 좋겠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경계와 지평을 좁게 제단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물음을 다시 던진 선정 및 수상이었다.  


중국 서점에 나가 보니, 알렉시예비치의 책 대부분이 번역되어 매대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번역 출판 문화를 볼 때마다 깜짝 놀랄 때가 많은데, 한국에서도 내기 어려운 책, 과연 팔리겠나 싶은 교양인문 서적이 다수 신간 매대에 등장한다. 알렉시예비치의 책이 국내에 겨우 두 종 번역되어 있는 반면, 중국 서점 매대에만 올라온 게 네 권이다. 최근 번역되었는지 기존부터 소개되었던 책인지 모르나, 어느 쪽이든 대단하지 않은가. 쥐뿔도 모르면서, 은연중 중국의 문화 저력을 무시하고 있지 않았나 반성한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디자인 감각이 상당하는 점이다. 우리네 번역서와 곁에 놓고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한국 번역서의 표지가 독자의 감성과 사회적 파토스에 호소하는 듯하다면, 중국 번역서의 표지는 조금 더 텍스트에 집중하면서도 독자를 꼬시려 하기보다는 진중하게 유혹한다는 느낌이다. 한중 양국의 출판사가 선택한 저자의 사진 또한 그 느낌과 교감의 지점이 다르다. 


향후 짧게나마 중국 서점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ㅡ북경, Beijing 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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