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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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 

잠이 오지 않아 읽었다. 불면의 밤에 읽은 책. 


2_ 

4년 전, 주안이와 다녀온 스페인은 느리고 낙천적이고 친절했다. 시내 거리 간판에 인터넷 ADSL 서비스 광고가 한창이었다. ADSL이라니, 대체 여기는 어느 시절인가. 사진을 찍어 웹하드에 저장하고자 업로드를 걸었더니, 백여 장의 사진을 올리는 데 예상 시간 열두 시간이 나왔다. 민박집 피씨를 독점할 수 었었기에 업로드를 포기하고 CF 카드를 더 사서 사진을 저장했다. 스페인은 유럽의 대표 국가 아니던가. 16세기 무적함대를 앞세우고 지리상의 발견과 세계 식민지 건설에 앞장설 만큼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이지 않은가. 한데 우리에게는 십여 년 전(확인이 필요하지만) 끝난 ADSL을 최신의 속도를 자랑하는 인터넷 서비스로 팔고 있다니. 내가 사는 세상과는 분명 다른 곳임에 틀림없었다. 


3_ 

스페인 내전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서 처음 읽었다. 하지만 남의 나라 역사는 머리 속에 잘 형상화되지 않고 그나마 읽은 내용도 이내 잊힌다. 책 표지 사진으로 올라 있던 로버트 카파의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의 이미지만으로 그 참상을 짐작했을 뿐, 스페인의 역사는 내게 아스라한 기억만 남겼다. 


4_ 

마침 지난해,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카파는 스페인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사진을 남겼다. 어쩌면 '병사의 죽음'은 전장에서 찍은 예외적인 사진일 것이다. 카파의 사진은 전장 이면의 풍경을, 폐허가 된 마을, 피난민, 퇴군하는 군대, 공습경보 등 그는 전장 이면의 모습에 다가가 셔터를 눌렀다. 생생한 죽음의 현장보다 마음에 남는 사진이었다. 


5_ 

모든 전쟁은 비극이지만 내전의 상흔은 너무 깊고 오래 간다. 내전은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고 그가 이끄는 군부 체제는 (이 책을 읽다 확인했는데) 1975년까지 이어졌다. 이후 왕정이 들어서면서 민주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75년까지라니, 참으로 길다 싶었다. 한데 우리네 역사는 80년대까지 군부 통치를 받지 않았던가 하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군부의 지배와 그보다 앞선 내전의 상흔을 안고 있는 스페인 사람들, 한 달 남짓 여행하며 경험한 그들의 너그러움과 느긋함과 친절함에서는 그런 역사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6_ 

아나키스트,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의 공화파와 그에 맞서는 인민전서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인간의 기치를 든 유파였다. 러시아, 중국, 일본, 조선 반도에 아나키즘이 전파되고 변형되고 자생했듯이, 나라와 사회와 이웃이 진영을 나눠 싸우며 너는 어느 쪽이냐는 물음을 강제하는 현실에서 자신을 쉽게 어느 진영에 던질 수 없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며, 아나키스트가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단의 시대에 자기 어느 한 쪽에 자신을 투신하지 않기란 생존의 위협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안토니오가 공화국 군대에 징집될 것을 피하기 위해 인민전선파에 투항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적 선택일 것이다. 


7_ 

안토니오는 내전 종식된 후, 결정적으로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아나키스트의 신념에 위배되는 삶을 산 것에 대해 내적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그의 평생이 그에 대한 회한으로 점철된다. 신념을 함께하기로 했던 동지들이 하나 둘 처음 마음을 버리고 변졀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괴로웠고 최종에는 자신의 변절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하여 그의 삶은 자괴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나키스트는 안토니오가 젊은 날에 꿈꾸었던 이상이자 인생의 기준점과 같은 것이었는데, 그가 정말 바랐던 것은 '새처럼 자유로운 삶'이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날고 싶었다. 하지만 프랑스 남부의 시골에서 피신 생활을 할 때 잠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평화를 맛보았을 뿐, 그의 일생은 자유와 거리가 멀었다. 노년에 우울증을 앓던 요양원 창문에서 이 땅의 짐을 내려놓고 하늘로 비상했을 때, 평생 염원하던 자유를 맛보았을 뿐. 


8_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제외하고 안토니오의 인생은 스페인의 역사, 구체적으로 스페인 내전의 상흔과 거기에 기초해 세워진 체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안토니오만이었을까. 지난 세기에 자유를 꿈꾸었던 인생은 안토니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아나키스트이건, 자유주의자이건, 낭만주의자이건, 현실참여자이건 간에. 


9_ 

지금 내가 있는 북경, 이곳 사람들은 호탕하고, 친절하고, 수평적이고, 똑똑하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사회주의의 유산, 그리고 짐작컨대 가난과 역사의 상처로 말미암은 유산을 입은 이곳 사람들은 정이 있고(아니, 많고), 말이 많고(싸우는 것 같지만, 정겹고),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놀랍게도 비권위적, 수평적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불과 반 세기 전, 이들은 혁명을 겪었고, 60년대에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경험했고, 천안문민주화운동을 경험한 것도 불과 한 세대 남짓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이처럼 강하고 친절하고 명민한가. 화두이다. 


10_ 

스페인 현대사를 이해하기에 참조할 여러 관점 중 하나이다. 중학생 딸에게 읽히기에는 성적인 묘사가 적나라해서 주저되지만, 스페인어를 배우고 그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그때 슬며시 아이의 서재에 올려두어도 괜찮겠다. 스페인 역사를 다룬 다른 책과 함께 말이다. 


11_ 

불면의 밤, 주절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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