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스또예프스끼, 늘 읽고 싶지만 잘 안 읽게 되는 책.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의 저자는 그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를 "읽지 않고는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논할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의 "문학을 19세기 러시아 문학으로만 생각하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가 오늘날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란다.
2.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인용. 도스또예프스끼가 열여덟 살 때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인간은 신비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평생에 걸쳐 이 문제를 푼다면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의 신비를 풀기 위해 펜을 든 작가이다"라고 정의 내린다. 시베리아 유형 전과 후로 그의 문학을 나누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서 나타난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복음서를 읽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복음서를 선물한 폰비지나에게 보낸 편지. "나 자신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시대가 낳은 아이입니다. 오늘 관 뚜껑이 단히는 순간까지도 불신과 회의의 아이입니다....... 만약 누가 나에게 그리스도는 진리 저편에 있고, 실제로 진리란 그리스도 외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해도 나는 진리 곁이 아니라 그리스도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저자는 뜻밖에 신을 말한다. 이 책에서 예상치 못했던, 더군다나 일본인 저자에게서 기대하지 못했던.
3.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도스또예프스끼를 정신 분열자로 보고 그 입장에서 많은 도스또예프스끼론을 써왔다. 그러나 7, 8년 전부터 역시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하게 되었다.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을 의심하는 신앙, 신에게 반항하는 신앙도 신앙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다." 조심스럽게 '신'을 인정하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신앙을 받아들인다.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4. 허나 저자가 말하는 "신을 의심하는 신앙, 신에게 반항하는 신앙"은 기독교의 전통이다. 저자는 이런 신앙이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고 전제하였지만, 성경의 신앙은 이런 이들이 다분하다. 신의 계시에 회의를 품은 아브라함, 모세부터 시작해서 예언자의 전통이 그렇고(요나, 이사야, 예레미야), 지혜서(욥기, 시편)의 전통이 그러하다. 저자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 아니, 보통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같는 보통의 오해의 전형적인 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 시대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신앙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의 신앙은 '의심'하고 '반항'하며 '불신'과 '회의'를 수용한다. 신앙의 당연한 일부로.
5. 일찍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로망으로 삼았던 일본인들은, 단지 그 외양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이 같은 연구서가 나온 점이 그렇고, 단테의 신곡에 대한 해설서도 그렇다. 일본 서적은 실용적이고 깊이가 없다는 인상평은 이 두 권을 읽으면서 자취를 감춘다. 그들에게는 문화, 교양, 인문학 저력이 있다. 우리에게서 이런 류의 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선 우리에겐 이런 류의 책 자체가 부족하다.
6. 저자는 우선 <죄와 벌> 읽기를 권한다. 충분히 읽고픈 마음을 일으키는 책. 저자 시미즈 마사시는 도스또에프스끼를 읽게 하도록 동기부여 하는 데 충분히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