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의 자녀 -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다
브레넌 매닝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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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빠의 음성을 찾아서



잃어버린 아빠의 음성

사춘기를 지나며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에 변화가 있었다. ‘아빠’라는 말 대신 ‘아버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로는 ‘아버지’란 호칭을 사용할 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표식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아버지’라는 호칭만큼 아버지를 내게서 구별하고 한층 떼어내려는 내면의 시위였다. ‘아버지’는 ‘아빠’보다 객관적이고 공식적이며 정이 덜 담겨 있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자유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아버지’란 호칭은 사춘기 시절 내 편에서의 독립선언이었다.


‘아빠’와 ‘아버지’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일단 건너고 나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사춘기 나의 독립선언 이후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라는 호칭만큼 점점 더 공식적이고 소원해져 갔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아빠’라 부르던 시절에는 아빠와 아들 간의 애틋한 추억이 남아있다. 허나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빠’ 시절과 같은 정겹고 즐거운 기억은 없다. 처음 내가 자유를 찾기 위해 사용한 ‘아버지’라는 호칭은 내 인생에서 ‘아빠’를 떠나보내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이후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아빠’라는 단어가 내게서 사라진 것이다. 오직 ‘아버지’만 있었고, 그 ‘아버지’는 ‘아빠’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아빠를, 아빠의 음성을 잃었다.


아바의 자녀

‘아빠’는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언어다. 세 살 먹은 딸아이가 내게 요청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너무 당당하단 생각이 든다. 내 딸은 너무도 당당하게 아빠인 내게 청하고 칭얼대고 얘기한다. 아빠 놀자, 아빠 그림 그리자, 아빠 아이스크림 사줘, 아빠 밖에 나가자... 부모 말을 잘 듣는 것도 아니요,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생산적일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녀석은 아빠에게 천연덕스럽고 당당하게, 때로는 뻔뻔하게 다가온다. 내가 아빠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에게 ‘아빠’는 어떤 상황에서도 맘 편하게 부르고 기댈 수 있는 이름이다. 나도 그런 딸아이가 그저 좋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진리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다 알고 있는 명제인지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알고 있는가는 확인해 볼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라는 진리는 머리로 백번 인정한다고 무슨 유익이 되는가. 내면 깊은 곳에서 인정하고 매일의 삶에서 누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지식이다. 이 책의 저자 브레넌 매닝이 전달하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논리적 지식이 아니다. 우리 내면의 모습, 그 깊은 곳에서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 삶과 확신을 다룬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바’이심을 ‘가슴으로’ 알고 있는가 점검해 준다.


그 자신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젊은이에서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가 알콜 중독이란 처절한 실패를 겪고 그 역경을 이겨낸 사람으로서, 브레넌 매닝은 이 책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사랑받는 자, 곧 아바의 자녀임을 보여준다. 절대 무차별한 사랑과 긍휼을 지니신 분, 우리 망가진 모습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받으시는 분,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종교인이 될 필요가 없다. 자신을 고쳐 보려 몸부림치거나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안간힘을 쓰다 지쳐 쓰러질 이유도 없다. 자기 모습에 실망하여 죄책감의 그늘에 머물 까닭이 없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이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의 ‘아바’가 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그 사실을 알기를 애타게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빠’다.


진정한 ‘아바의 자녀’였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받고 기뻐하시는 ‘아바의 자녀’다. 다만, 너무 오랜 동안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이름이다. 매닝은 ‘아바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적용되어야 할 우리 삶의 영역들을 짚어간다. 거짓 자아를 버리고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장 자기답고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아바의 긍휼을 닮고 열정을 회복한다. 온전한 한 인간이 된다. 아바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서 어린아이가 됨을 뜻한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다. 아빠가 보고 있는 동안 어디서도 당당하고 자연스런 내 딸아이처럼, 아바이신 하나님 앞에 나도 그럴 수 있겠다. 그분은 우리의 아바, 우리는 아바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아빠의 음성을 찾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그렇다. 시간은 사라지고 사랑과 즐거움과 열정만 남는다. [아바의 자녀]는 책 전체가 저자와 하나님과의 사랑어린 관계에 대한 감미롭고 열정적인 고백과도 같다. 저자는 설명하고 처방하려 들기보단, 고백하고 자기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고백을 듣다보면 어느덧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가 고백하는 아바의 넓은 품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오랜 동안 잊었던 아바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저자는 권한다. 매일 매순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약속과 그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의 일상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은혜와 섭리를 발견하라고. 브레넌 매닝은 우리가 잃어버린 아바의 음성을 우리 가슴에 전해주는 전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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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가 나니아의 아이들에게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16
C. S. 루이스 지음, 라일 W. 도싯 외 엮음, 정인영 옮김 / 홍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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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편지를 하고 싶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매년 산타클로스의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성탄절 다음날이면, 산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고뭉치 북극곰과 순록, 그들의 친구인 요정과 눈사람 소식이 담긴 편지가 북극 우표가 붙은 편지봉투에 담겨 네 아이의 손에 전달되었습니다. 편지에는 톨킨이 직접 그린 유쾌한 삽화가 더해져 북국의 소식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답장을 써서 난로가에 두면 며칠 후 편지는 사라졌고 이듬해 답신이 오곤 했습니다. 사상 유래 없는 산타네 가족과 톨킨네 아이들의 교류는 그렇게 20년간 이어졌습니다. 네 자녀에게 행복한 기억을 심어 주려던 아버지의 색다른 선물이었나 봅니다(「북극에서 온 편지」(씨앗을뿌리는사람 역간)에 이 편지와 그림들이 담겨 있습니다).


(톨킨의 절친이자 문학 동료였던) C. S. 루이스도 평생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조이 데이빗먼과도 오랫동안 편지로 교우한 사이였지요). 특히 「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 역간)가 나오면서 어린 독자들로부터 편지가 답지하자, 그는 아이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쓰기 시작합니다. 매일 아침 그는 한 시간 이상을 편지를 읽고 답장하는 데 보냈는데, 답장 쓰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라 믿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편지 쓰기가 힘들어졌지만(그래서 형 워렌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한 잉크에 펜을 찍어 직접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20여년에 걸쳐 쓴 많은 편지들 중 선별한 97편의 글이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대부분 나니아 연대기를 읽은 어린 독자들입니다. 아이들은 나니아 인물들에 대해, 아슬란의 의미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묻는데, 어른들의 물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루이스는 답하고, 감사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루이스는 단 한 번의 편지에도 답을 했지만, 많은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습니다. 편지를 시작할 때 꼬마였던 소녀가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결혼할 남자를 소개하는 편지에 루이스가 축복으로 답하는 사연을 비롯해, 오랜 우정의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편지 쓰기는 신이 주신 의무이자 사랑과 우정을 실천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에게 쓴 편지글이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역간)처럼, 「헤아려 본 슬픔」(홍성사 역간)처럼 읽히니 말입니다.


여담 하나. 책이 아주 잘 만들어졌습니다. 엮은이, 옮긴이, 만든이의 애정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지금도 루이스는 이처럼 좋은 사람들을 엮어 주고 있나 봅니다. 여담 둘. 편지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돌보는 주일학교 아이들, 함께 수고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인생길에서 친구가 되어 준 이들에게 편지로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잘 지내냐고, 고맙다고, 힘내라고, 기도해 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마침, 가을이 가깝습니다.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7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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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 프라미스 - 아빠와 함께한 3218일간의 독서 마라톤
앨리스 오즈마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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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책 읽어줄까?"


약속. 아빠와 아이가 약속을 한다. 책을 읽기로. 매일 밤 10분 동안 아빠가 소리 내서 아홉 살 딸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약속한다. 실은 아이가 더 자라면 책을 읽어주고 싶어도 읽어줄 수 없을 것 같아 한 약속이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 마라톤은 처음에 정한 100일이 지나서도 한참 동안 계속되어 3218일 동안 이어진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밤’, ‘아빠가 딸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준다’는 약속은 누구나 예상하듯이 쉽지 않다. 다른 일이 생기고 상황이 꼬이게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기로 했으니, 함께한 약속이니 난관을 넘어선다. 자정을 넘겨 읽기도 하고, 출장 간 날이면 전화를 걸어 읽어준다. 딸과의 약속이니까. 10분의 책읽기는 30분, 한 시간이 되기도 하고, 자연스레 요즘 무슨 일이 있는지 나눔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홉 살 꼬마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는 날, 9년간 이어온 독서 마라톤은 끝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나온 한 권의 책은, 책 이야기가 아니라 책을 읽으며 살아온 가족 이야기다. 아빠가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성장한 딸이 아빠에게 보내는 헌사다.


적용. 나의 이야기. 중년의 나이에 「나니아 연대기」를 읽을 짬은 없지만 아이들에게 읽어준다면 볼 수 있겠다는 이기적인 동기에 책 읽기를 시작한다. 발견한 몇 가지 유익. 우선, 재미있다. 어릴 적, 청년 때에 못 본 책을 읽을 수 있다. 아이들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내가 즐겁다. 게다가 소리 내어 읽다보면 피곤하던 몸에 역설적이게도 힘이 솟는다. ‘묵상’의 어원이 ‘소리 내어 읽는다’ 였던가. 둘, 아이들이 좋아한다. 「나니아 연대기」, 「호빗」, 「새번역 성경」을 이해하겠나 싶던 우려와 달리 유치원생, 초등생 아이들은 재미있게 집중해 듣는다. 나름 이해도 하고 기억은 나보다 잘하며 이따금 깊은 질문도 던진다. 내가 재밌어 하는 만큼 아이들도 좋아하고 있다. 피곤해서 그냥 자려고 하면 난리가 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주고 있으니 아빠 역할을 하고 있다는 보람도 솔솔 느껴진다. 셋, 책을 읽어주고 나면 아이들은 곧 잠든다. 이제 그만 자라고 소리칠 일이 없어졌다.


‘저녁 없는 삶’을 사는 우리 사회의 아빠들에게 ‘매일 밤 책 읽어주기’는 먼 나라 이야기, 힘겨운 미션이다. 그럼에도 좋은 아빠,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으면서도 정작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르는 아빠들에게, 책 읽어주기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 아이들은 (뜻밖에도!) 아빠의 이야기, 아빠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이 책도 증언하듯, 함께 책 읽기는 즐겁고, 대화를 끌어내며, 행복한 시간임에 분명하다. 하루 10분 기억이 쌓이고, 추억이 많아지기를. 개인의 인생에 남는 것은 기억일진대, 행복한 기억과 경험과 관계가 아이들 인생 굽이굽이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책 읽어주기는 그 시작일 터. 더 늦기 전에. 책 읽어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6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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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신들의 세상 - 내 삶을 좌우하는 단 하나의 희망 찾기
팀 켈러 지음, 이미정 옮김 / 베가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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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당신에게


뉴욕 출장을 다녀온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뉴욕에서 일을 도와준 사람이 마침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그가 알려 준 뉴요커에 관한 불편한 진실. “뉴욕에서 그리스도인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당신이 나 같은 그리스도인을 만난 건 정말 드문 일이다. 행운이다.” 그러면서 숙소에서 찾아갈 만한 교회를 알아봐 주었다고 한다. 종교인 비율이 인구의 50%가 넘는 미국이건만, 유독 뉴욕만은 그 비율이 이토록 희박한 까닭은 무얼까? 모두가 선망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 세계 금융과 자본주의의 심장, 최신 문화와 패션의 중심 뉴욕. 이 뉴욕은 어쩌다가 ‘신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일까? 그들은 신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걸까?


“뉴욕의 구도자와 회의자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사역”(빌리 그레이엄)으로, “진지한 구도자와 회의자들을 위한”(릭 워렌), “새로운 도시 교회의 선구자”(CT). 지난 20년 이상 뉴욕 한복판에서 뉴요커들을 위한 사역을 펼쳐 온 저자에게 따라붙는 말이다. 전문직 종사자와 문화계 인사들이 켈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뉴스위크>지가 그를 일컬어 “21세기의 C. S. 루이스”라 한 것은, 그가 신을 잃어버린 도시인들에게 말하는 법을 알고 있음을 인정하는 증거일 것이다. 최근 켈러는 목회자요 설교자요 변증가로서 담당해 온 평생의 사역을 글로 정리해 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켈러가 ‘21세기의 루이스’라면, 매년 출간될 그의 책을 기다리는 일은 자못 흥분되는 경험일 것이다.


이미 출간된 몇 권의 저서 가운데 「거짓 신들의 세상」은 (현재까지) 켈러의 대표작이다. 그가 말하는 우상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거짓 신들’이다.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이며, 우리에게 행복과 의미와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사랑, 돈, 성공, 권력, 영광, 신앙적 성취’. 켈러가 제시하고 예리하게 파헤치는 현대 세계의 거짓 신들의 대표 목록이다. 그것은 원래 선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나, 인간이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거기에 두는 순간 거짓 신, 우상이 되고 만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거짓 신이 되는 지점이다. 켈러는 이 미묘한 경계를 정확히 그려 낸다. 그의 설교에서 뉴욕의 현대인과 수천 년 전 성경 인물이 만난다. 두 인물은 같은 고민과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현대인의 괴로움과 절망이 성경 인물을 통해 드러나고 구원의 단초를 발견한다. 성경을 가지고 현대인에게 말할 수 있는 목회자, 켈러가 빛나는 지점이다. 사실 그의 진단과 메시지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많이 들어 본 이야기다. 하지만 많이 들었음에도 여전히 풀지 못해서 절망하는 혹은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신앙의 문제를 그는 차분하고 분명한 어조로 들려준다. 내가 우상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음을, 거울을 보듯 마주하게 된다. 그가 야곱과 요나에게서 거짓 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벗어나 참 하나님을 만날 빛을 얻듯, 그의 글을 읽는 독자도 자기 삶의 근본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그에게서 얻게 될 것 같다.


보기에 비해 책은 쉽고 편하게 읽힌다. 탁월한 설교자의 연속 설교를 듣는 것 같다. 뭔가 새롭고 심오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으로 위대한 진리는 예수의 말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골수를 쪼개는 말임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쓰인’ 책은 켈러의 전략일 수 있겠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의 욕망과 절망이 뉴요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켈러를 읽을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11월호에도 실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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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양혜원 지음 / 포이에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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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않아도 괜찮아"


중고등부 시절, 교회 누나가 있었다. 철없어 보이던 형들과는 달리 따뜻하고 성실하고 생각이 깊었던 누나, 예쁘진 않지만 우정과 존경과 연모가 뒤섞인 마음을 품게 했던 누나는 학력고사를 치렀고 원하던 대학에 붙었다. 합격증을 받던 날, 누나는 부모님께 합격증을 보여드리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 탓에 부모님은 딸보다 두 살 아래의 아들이 대학에 가기를 바랐고, 누나도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학 입학을 포기한 누나는 이듬해 농협에 취직했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대학에 꼭 가겠다고 했다. 나는 누나가 틀림없이 해낼 것이라 믿었고 반드시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열두 살 먹은 우리집 딸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고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그땐 그랬어.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하고 답한다. 세상이 변했다. 불과 20여 년 전 일인데 이제는 오래된 과거의 일, 터무니없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가정도, 사회도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었나? 가끔은 다시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엄마이자 사모, 그리고 여성학을 공부한 마흔 살 '교회 언니'인 저자의 자기 이름 찾기는 치열하다. 그녀의 눈을 통하니 세상의 절반이요 교회의 절반 이상인 여성의 존재가 또렷이 보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불편과 부당함, 불공평함과 편견(때론 폭력!)이 드러난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저자가 거부하는 '사모'라는 호칭이 대변하듯,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 이 시대의 평균만큼도 눈과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교회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숙명처럼 주어지고 요구되는 여자라는 보편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부름과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여정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후진' 교회 문화에서 이 책이 나왔으며 그처럼 뒤처진 문화 속에서 읽힐 것을 생각하니, 이 책은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가끔 삶의 고백보다 여성학의 시선이 앞서 현실을 재단하는 듯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한쪽으로 기운 의식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라면야.


한편으로 저자가 드러내는 현실의 여러 문제 중 일부는 어느새 과거로 편입된 듯하다. 이 책의 내용들이 더욱 빨리 과거의 일화가 되기를, 그리하여 머잖아 우리 딸이 이 책을 읽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물을 때 "그땐 그랬어, 믿기지 않겠지만" 하고 말할 수 있기를. 더 바라기는, 이 책에 힘입어 점점 더 많은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를,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않고도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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