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양혜원 지음 / 포이에마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않아도 괜찮아"


중고등부 시절, 교회 누나가 있었다. 철없어 보이던 형들과는 달리 따뜻하고 성실하고 생각이 깊었던 누나, 예쁘진 않지만 우정과 존경과 연모가 뒤섞인 마음을 품게 했던 누나는 학력고사를 치렀고 원하던 대학에 붙었다. 합격증을 받던 날, 누나는 부모님께 합격증을 보여드리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 탓에 부모님은 딸보다 두 살 아래의 아들이 대학에 가기를 바랐고, 누나도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학 입학을 포기한 누나는 이듬해 농협에 취직했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대학에 꼭 가겠다고 했다. 나는 누나가 틀림없이 해낼 것이라 믿었고 반드시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열두 살 먹은 우리집 딸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고 묻는다. 그때마다 나는 "그땐 그랬어.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하고 답한다. 세상이 변했다. 불과 20여 년 전 일인데 이제는 오래된 과거의 일, 터무니없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가정도, 사회도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었나? 가끔은 다시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엄마이자 사모, 그리고 여성학을 공부한 마흔 살 '교회 언니'인 저자의 자기 이름 찾기는 치열하다. 그녀의 눈을 통하니 세상의 절반이요 교회의 절반 이상인 여성의 존재가 또렷이 보인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불편과 부당함, 불공평함과 편견(때론 폭력!)이 드러난다.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저자가 거부하는 '사모'라는 호칭이 대변하듯,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 이 시대의 평균만큼도 눈과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교회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숙명처럼 주어지고 요구되는 여자라는 보편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부름과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여정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후진' 교회 문화에서 이 책이 나왔으며 그처럼 뒤처진 문화 속에서 읽힐 것을 생각하니, 이 책은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가끔 삶의 고백보다 여성학의 시선이 앞서 현실을 재단하는 듯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한쪽으로 기운 의식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라면야.


한편으로 저자가 드러내는 현실의 여러 문제 중 일부는 어느새 과거로 편입된 듯하다. 이 책의 내용들이 더욱 빨리 과거의 일화가 되기를, 그리하여 머잖아 우리 딸이 이 책을 읽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물을 때 "그땐 그랬어, 믿기지 않겠지만" 하고 말할 수 있기를. 더 바라기는, 이 책에 힘입어 점점 더 많은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오기를,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않고도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ㅡ<크리스채너티 투데이> 2012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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