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는 원작인 연극 [이 爾]에서 ‘what’을 그대로 가져왔으나 ‘how’는 99% 달라진 영화다. 이준익 감독은 시나리오를 새로 쓰는 과정에서 몇 가지 다이아그램을 그려놓고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캐릭터간에 얽힌 알레고리를 보여주는 구도다. 캐릭터의 관계를 북한산의 세 봉우리에 한번 비유해 보자. 백운대라는 봉우리가 연산(정진영)이라면, 그와 마주보고 있는 만경대가 광대 장생(감우성)이요, 백운대 옆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인수봉을 녹수(강성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연산’ 백운대와 ‘장생’ 만경대를 연결하는 다리가 왕의 총애를 받았던 광대 공길(이준기)이며, 이 삼각산을 덮고 있는 구름이 연산의 내관이었던 처선(장항선)이다. 이는 <왕의 남자>가 단지 광대들의 서글픈 인생사 뿐 아니라, 촘촘하게 얽힌 정치 스릴러도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하나. <왕의 남자>에는 세 가지 세상이 존재한다. 장생이 왕 노릇하는 광대들의 놀음판 소극, 궁 안에서 연산이 연출하는 중극, 이를 다 포함하는 것이 중종반정의 주도자인 성희안의 세상, 즉 대극인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이런 다이아그램을 이해하면, <왕의 남자>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의 남자>는 누구의 시점으로 보는냐에 따라 전혀 새로운 영화가 될 수 있다. 장생, 공길, 연산, 녹수 외에 처선과 육갑(유해진)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왕의 남자>가 부각시키는 인물은 ‘광대들의 왕'인 장생이다. “내 살다 살다 별별 잡놈을 다 봤는데, 이곳에 와서 잡놈 중에 잡놈을 하나 봤지.” 감히 왕 앞에서 ‘배틀 랩'을 구사하는 장생은, 권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캐릭터다. 권력지향적인 공길이 주인공인 연극에 비해, 영화는 광대 장생의 내적 갈등을 그대로 따라간다. 이준익 감독은 “민주주의란 높은 자와 낮은 자가 만날 때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높은 자와 낮은 자를 만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준익 감독은 높은 자를 낮은 자의 눈높이에 맞추는 방법을 택했다. 장생이 없었다면 연산도 변화되지 못했을 터. 전작 <황산벌>에서도 높은 자를 한없이 낮추었던 이준익 감독은, 이번에도 연산을 장생의 위치까지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의 좌파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폭군으로 평가받은 연산과 천하디천한 광대의 만남. 이준익 감독의 표현을 따르자면, <왕의 남자>는 ‘매너 좋은 반골영화'다.
 
“10대들은 공길, 20~30대는 장생, 40대는 연산, 50~60대는 처선의 시점으로 볼 수 있는 영화.” 다양한 나이와 계급의 캐릭터가 공존하는 <왕의 남자>는, 그만큼 관객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폭도 넓다. 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바로 처선이다. 처선은 항상 주군을 따르는 인물이자, 광대들을 궁 안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언뜻 처선은 갑자사화와 무오사화를 주도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이는 다 연산과 처선이 공모한 계획 하에 있었던 것이다. 처선은 광대들의 놀음판을 본 순간, 이들을 왕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시험대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왕권정치와 신권정치의 투쟁에 있어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떠올린 것이다. 결국 처선이 한 역할은 광대놀음을 통해 신하들의 책임을 묻고 그들을 처단할 수 있도록 ‘공론화’를 시킨 것. 그러나 연산이 우발적으로 선왕의 후궁들과 할머니까지 죽이자, 처선과 연산의 공모체제는 깨지고 만다. 결국 처선은 죽을 위기에 처한 장생을 구해주고, 자신은 목을 매 자결한다. 이것이 왕을 저버릴 수도, 끝없는 피바람에 동조할 수도 없었던 처선의 운명이다.

“만약 왕께서도 웃지 않으시면 그땐 네 놈들의 목을 칠 것이다.” 처선의 경고를 받은 후, 광대들은 행여 왕이 웃지 않으면 어쩌나 간을 졸인다. 왕이 무표정으로 일관하자 분위기가 싸해질 무렵, 공길이 재치있게 애드립을 치자 연산은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연산은 정말 웃겨서 웃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게 전부 연산의 ‘쇼’였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연산은 광대들을 궁 안에 들이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연산이 애초부터 웃어줄 수도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가. 그는 뜸들이며 긴장감을 조성할 줄 아는, 광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서부터 연산과 처선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시작된다. 그는 툭 하면 공길을 처소에 불러 자신의 마더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술 한잔 걸친 상태에서 그림자극을 즐기며, 연민을 자극하는 눈물도 주르륵 흘린다. 이 장면은 연산이 공길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희락원에서는 처선이 폐비 윤씨 소재의 경극을 하도록 장생을 구워삶고 있다. 순진한 광대들은 자신들의 경극이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을, 자신들이 정치적 음모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모른다.
 
그렇다면 연산은 공길에게 오직 계산된 부분만 보여줬을까? 물론 아니다. 연산은 녹수와 함께 “윗입, 아랫입” 하며 음탕한 놀이를 즐기지만, 이것도 잠시. 녹수의 요염한 육체와 호탕한 기질에서도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연극의 녹수는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정치적인 캐릭터인 반면, 영화 속의 녹수는 권력보다는 ‘연산’이라는 한 남자에 집중한다. 때문에 언젠가부터 부쩍 허공을 응시하는 연산을 보며, 뭔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한다. 녹수가 결정적으로 화가 난 부분은 바로 경극 신. 어머니 폐비 윤씨를 연기하는 공길을 보며 연산의 감정은 점점 끓어오르고, 결국은 공길에게 달려가 “어머니!” 하고 외친다. 이를 기점으로, 이제껏 어머니 역할을 해왔던 녹수는 의미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때문에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긴 녹수는, 질투를 참지 못하고 홍내관과 함께 모필사건을 꾸미게 된다. 또 하나. 후에 연산이 공길의 마음이 떠난 것을 알고 녹수에게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자. 연산은 말없이 녹수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고(마치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듯!), 녹수는 연산의 외도(?)를 추궁하지 않고 “미친 놈”이란 한 마디만 내뱉을 뿐이다. 이때 녹수는 그의 연인 뿐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을 되찾은 셈이다. 한눈 팔다가 다시 돌아온 탕자의 어머니 말이다.
 
이제는 마지막 신을 한번 떠올려 보자. 밖에서는 중종반정군이 몰려오는 와중에 궁 안에서는 장생과 공길이 줄타기를 하고 있고, 이를 연산과 녹수가 음미하고 있다. 이때 연산은 더 이상 왕이 아니며, 초라한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줄을 타고 있는 장생을 부러워한다. 귀한 자와 천한 자의 구별 없이, 오직 네 명의 광대들만이 존재하는 순간. 장생과 공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 이 순간은, 모든 정치적인 구름이 걷히고 광대들만의 시간으로 박제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점프해서 설매재에서 꽹과리와 북을 치며 장님놀이를 하는 광대들을 비춘다. 이때는 눈이 멀었던 장생도 눈을 뜨고, 죽었던 육갑도 살아나 신명나게 놀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이 마지막 장면을 <자토이치 Zatoichi>의 탭 댄스 신처럼 내러티브와 무관한, 판타지 장면이라고 말한다. 비록 현실에서는 모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영화는 이렇게 길 위의 인생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나 거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존재론적인 대사가 들리는 그곳. 그곳은 마술적인 공간이자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곳이다.
 
<왕의 남자>는 한국영화에서는 처음으로 남사당패의 인생을 조명한 영화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영화 안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별로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무지했을 뿐, 우리의 전통적인 유산을 영화 안에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다만, <왕의 남자>에는 한국 뿐만 아니라 타국의 뿌리 깊은 전통들이 골고루 뒤섞여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아무거나 갖다 붙인 하이브리드가 아니라, 좋은 것만 골라 붙여놓은 빈티지 사극”이라는 게 이준익 감독의 주장. <왕의 남자>에는 가장 중요한 놀이인 줄타기를 비롯해, 사물놀이, 땅재주 등 한국의 전통적인 놀이뿐 아니라, 러시아의 그림자놀이, 중국의 경극,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광대의 속성(연산은 햄릿과 리어왕을 섞어놓은 인물이다)과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의 마술적인 요소들이 골고루 녹아있다. 가장 한국적이지만 어찌 보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는 궁중광대극 <왕의 남자>. 이 영화에는 “사극을 잘 만드는 나라가 영화강국”이라는 이준익 감독의 고민과 노력이 배어있다. 이런 고민이 계속된다면, <왕의 남자>의 성공을 넘어 ‘<황산벌>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감독의 꿈도 조만간 실현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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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2006-02-08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긴 한데,이건 완전히 '알고보면 좋은 게' 아니라 '보고나야 좋은 글'이네요.. 오히려 이런 글을 너무 많이 봐서 왕의 남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글 잘봤습니다~^^

놀자 2006-02-0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말이 맞네요..안 본 상태에선 저말이 무슨말인지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저 글 보고 나면 영화보는데 재미도 반감 되겠어요~ 전 암튼 영화보기전에 아무 기사도 보지 않고 봤답니다..ㅎㅎ

모1 2006-02-09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0만에 가까워진다면서요??

모1 2006-02-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연산군이란 것을 잘 모를 외국인에게는 재미가 없을꺼란..생각도 가끔씩 들어요. 외국영화제에갈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요.

놀자 2006-02-1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외국에서까지 인정받을 필요는 없지요..ㅎㅎ
이제 곧 천만이에요~~ >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