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숙경


"아이가 책을 무척 좋아하나봐요?”
이런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흐뭇해지고 우쭐해진다. 옛부터 학문을 중요시해 온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 왠지 뿌듯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가 그저 심심풀이용 책이라도 책이라는 걸 보고만 있으면 무조건 감동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 지금은 비록 무의미하게 책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중엔 그 습관을 통해 책 속에 담긴 귀중한 지혜를 배워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샘솟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책이 갖는 위력은 대단하다.


내 아이가 책을 즐겨 읽는 모습을 눈여겨 보아 오던 이웃의 한 엄마가 하루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되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그 엄마는 또 염려스런 표정으로 아이가 책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에만 열중한다고 털어 놓았다.

사실 아이들이 책보다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켜기만 하면 바로바로 형형색색의 볼거리와 재미가 펼쳐지는 그 얄미운 마술상자를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유난히 좋아한다면 어떤 것에 특히 관심을 갖고 즐거워 하는지 세심히 살펴보자.

예를 들어 공룡만 나오면 유난히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공룡에 잔뜩 관심을 보이는 아이는 공룡의 종류, 공룡의 먹이, 공룡이 살던 집 등 공룡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보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할 것이다.


이처럼 아이가 호기심을 갖고 열중하는 대상을 발견하면 이게 '찬스’ 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아이에게 그 대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책을 살짝 소개해 주는 것이다. 책 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책을 통해 자신의 궁금증을 얼마나 풀 수 있는지를 터득하게 되면 아이는 엄마의 채근이 아니어도 스스로 책을 가까이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책을 통해 새로운 관심 대상을 얻어 또 다른 새로운 책도 찾아 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억지로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끄고 아이에게 책읽기를 강요하진 말자. 그러면 아이는 관심 대상조차 잃어버려 불만이 많은 아이로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가 좋아하는 매체와 관심 대상을 존중해 주며 거기에 어울리는 책을 찾아 주다 보면 머지 않아 아이의 마음이 어느새 책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다음은 책을 읽을 때마다 주위가 산만해지고 도무지 책에 집중을 못 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책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얘기해 보자. 여기에선 나의 경험담이 좋은 얘깃거리가 될 것 같다. 중학교 국어 교사인 나는 '내 아이가 책을 좋아했으면……’하는 마음이 정말 남 못지않았다.

그래서 돌 전후부터 여러 사물이 그려진 그림책들을 펴 놓고 '사과’ 하면 사과 그림을 가리키게 하고 ‘버스’ 하면 버스 그림을 손으로 짚어 보게 하는 놀이를 하며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놀이를 처음 시작한 얼마간은 아이가 좀 관심을 보이는 듯하더니 걸음마를 잘 하고부터는 도통 그림책 앞에 붙어 있질 않았다.

그래서 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잠자는 시간 전을 책 읽어 주는 시간으로 정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차분하고 조용해 아이가 주의 집중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중력이 없는 아이는 책을 한 쪽도 채 읽기 전에 책장부터 넘기려 들거나 이리저리 딴전을 피워대며 내 진을 빼 놓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나는 책 읽어 주기를 거의 포기하게 되었다. 아이 교육만큼은 남다른 기술과 의욕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였건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겨우겨우 인내심을 발휘하며 아이에게 피터팬을 읽어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책을 가리키며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한 번 책을 들여다 보았다. 펼쳐진 페이지엔 후크 선장에게 잡힌 웬디 일행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그림이 있었다.

“웬디 ∼, 웬디 부쌍해∼ 엄마 웬디 구해 줘, 아빠도 구해 줘…….”
발음도 잘 되지 않는 말로 엉엉 울며 웬디를 구해 달라는 아이 앞에서 나는 잠시 망연해졌다. 일단은 아이가 관심 있게 책을 들여다 보았다는 것이 놀라웠고 다음으론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막연했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뒷장을 펼쳐 웬디가 풀려났다고, 피터팬이 구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계속 앞장을 다시 펼치며 웬디를 구해 달라는 거였다.

나는 혼자 힘으로 아이를 달래는 게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남편에게 원조를 요청해 그림책 세계를 현실로 글고 나왔다. 남편이 후크 선장이 되고 아이가 피터팬이 된 것이다. 피터팬이 된 아이는 신문지로 모자를 만들어 쓴 후크 선장 아빠를 한참 동안 장난감 칼로 찌르며 공격하더니 마침내 아빠가 쓰러지는 턱을 하자 그제서야 놀이를 그만두었다. 아마도 드디어 웬디를 구해 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흥미 있게 책을 볼 수 있는지를 새롭게 깨달았다. 아이를 책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자구만 책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아이를 책에 집중시키는 묘약이었다.

책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들을 아이에게 해결해 보게 하고 책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법한, 또는 일어났으면 하는 일들을 아이에게 끊임없이 상상해 보게 하는 것, 그것은 그저 아이에게 독서습관을 들여 주기 위해 아무런 놀이도, 흥미도 없이 엄마가 무작정 읽어 나가는 책과는 그 집중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는 피터팬 놀이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림책에 나타난 상황들을 놀이로 꾸며 아이와 놀았다.

아이는 피터팬 일을 해결하고 난 후 아기돼지 삼형제네 집 일을 해결했고 또 다른 책들도 열심히 지휘하고 호령했다. 아이가 한 책에 재미를.붙이면 나도 그 책을 달달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고 놀아 주어야 했다. 아이와 똑같이 유치하게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떠드는 게 때로는 지겹고 힘들기도 했지만 아이가 그 책에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까지 지적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때에는 '이젠 이 아이가 완전히 책에 재미를 붙였구나' 하는 생각에 참 흐뭇했다.

아이가 조금 크자 놀이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했다. 글을 읽을 줄 알게 된 이후로는 아예 책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해 선생님들로부터 '책을 밝히는 아이'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거의 희열에 가까웠다.
아이에게 책읽기를 권하고 싶다면 먼저 엄마가 아이와 함께 놀아 줄 채비를 갖추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아이가 책 세상에서 보여 준 생각과 행동에 아낌 없이 호응과 박수를 보내 주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의 사랑과 칭찬만큼 아이를 책과 친해지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가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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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5-03-2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추천도 꽝

놀자 2005-03-2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