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났든, 아니면 과거를 살았던 훌륭한 사람들이 가슴에 품었던 화두이건 간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분명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거쳐간,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아마도 어느 정도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가졌으리라 추측한다. 나도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시간의 광막함과 자신에 대한 의문들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의문들 중에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앞날에 대한 궁금증 등, 사춘기 소년이라면 가질법한 모든 질문들이 뒤섞여 있었음은 사실이다.

내가 이전의 글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 그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답이 없다는 말은 과학적인 답,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로서의 답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분명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질 수 있다면 한 번쯤은 고찰해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질문의 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어쩔것인가. 누가 지금의 나에게 "당신은 누구요?" 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잘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때의 질문은 한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며, 직업이나 성명을 묻는 사무적인 질문은 아닌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조각품이요. 하나님과 내가 빚는 조각품. 또한 나는 시 그 자체요. 나의 삶의 이야기는 하나의 멋있는 시가 되어야 하오. 읽으면 아름다운 맛이 살아나는 시가 되었으면 한단 말이오."

이전에 갈대님의 서재에서 진중권이 TV에 나와서 인생을 예술작품에 빗댄 표현을 했다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낭패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인생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느끼고 한창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진중권씨가 먼저 선수를 치다니.

나는 사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시도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게 되었다. 아무리 사회생물학적 명제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나의 삶이 온통 생식에 바쳐질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나의 삶의 순간들을 이끌어 가는 동력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순간들은 오게 마련이다. 도대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가? 내가 일상을 사는 이유는? 내가 인터넷에 글을 쓰고 공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고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인가? 명예을 얻기를 원하는가? 지식과 철학으로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픈가?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들이대도 나는 이 짦은 생의 동력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2학년 때의 갑작스런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주었다. 이 통찰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공룡은 존엄하였나? 공룡이 성스럽고 도덕적으로 살았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예수가 2000년도 더 전에 십자가를 지고간 이유는? 예수와 공룡의 차이는?"

혹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심각하고 의미있는 질문이었고, 나에게 조금의 정신적 진전을 가져다준 계기가 되었다. 그 질문을 이렇게 풀어서 생각해 보자: 아주 오래 전에 공룡이라는 생명체가 살았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을 터이다. 그 동물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우리 인간보다 더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뛰어난 지능이 있어서 존엄과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공룡들 중에서 예수와 같은 특출난 영성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가진 개체가 있다고 상상해보면 얘기가 재밌어진다. 그 공룡은 왜 그래야 했는가? 다른 공룡들의 대다수가 이기적인데 그 공룡이 이타적인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시간의 광막함과 생의 짧음에서 이러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즉 '삶은 짧고, 죽음, 그것으로 나는 끝이다' 라는 너무나 당연한(?) 깨달음이다. 단 한번뿐인 삶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내면 깊숙히 들어와 박혀버렸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이러한 앎이 내면에서 스스로 솟아나고 보니, 단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일도 함부로 할 수 없고, 주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 겠다는 박애정신이 갑자기 생겨났다. 물론 순간의 이기심에 가리게 되니 그 깨달음과 실천이 오래가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더라도 삶에 있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은, 그리고 우주는 나 이의정이라는 사람이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았던지 아니면 뉴튼과 같은 삶을 살았던지, 그도 아니면 도시의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녀와 같은 삶을 살았던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와 세상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가치하고 내가 어떻게 살든 이 우주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택이 남아있다. 모든 삶에 대한 선언들이 이데올로기이고, 모든 종교의 교리들과 철학들이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내 삶의 동력을 선택하고 선언할 수 있다. 저 버러지 같고 빌어먹을 삶이 있는가 하면, 예수나 공자와 같은 뜨겁고 높은 차원의 삶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미적으로 아름답고 뜨거운 삶을 살련다. 이건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나의 뇌는 내 삶의 목표와 목적을 모른다. 내 영혼과 가슴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뜨거운 삶을, 예술작품이 되는 삶을 살 것이라고 가슴은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라는 정체성의 답을 주었다. 즉 나는 하나님과 내가 빚는 조각품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님을 밝혀 두겠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우주를 운행하고 작동하는 거대한 법칙 체계와 삼라만상 전체를 일컫는 상징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또한 나의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 읽었을 때 하나의 멋진 작품이라 여길 수 있을 정도의 시 작품이 되었으면 한다. 이건 대단히 어렵고 각고의 노력이 요청되는 삶이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다. 삶에 대한 이러한 뜨거운 인식이 나의 행동과 사고, 그리하여 삶 전체를 변화시키리라 믿는다.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과학적 사실로서의 '인생의 목적'은 없다(사회생물학의 논쟁을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으니 독자들은 참으시라). 삶의 목적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죽음은 우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술 작품이고, 나중에는 하나의 인생 이야기가 시 작품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우리는 매 순간 조각하고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나날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실을 망각함으로 부패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조각품을 스스로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생겼고, 스스로가 숱하게 던졌던 질문들과 그 질문들을 답하려고 했던 그 노력들이 나의 가슴에서 돌 하나를 걷어내었다. 그 걷어낸 돌 밑에서 샘이 솓아나고 있다. 샘이 솟아나 큰 호수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호수는 강을 이룰 것이며, 그 강은 우주의 바다에 다다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지난 2002년 대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정치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해 지방선거에서는 투표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울산에 가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후보들을 잘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투표를 포기 했었는데, 대선 레이스는 민주당 경선을 거치면서 그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 나같이 정치에 관심이 없던 대학생을 투표장으로 가게끔 했다. 결국 한나라당이라는 거대한 수구세력을 몰아내는데 동감하여, 기꺼이 울산에서 2번을 찍었다. 내가 한 최초의 정치적 행위였다.

사실 역사적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은 유난히 정치적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상당수 주체가 학생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결과 또한 4.19 혁명과 5.18 광주 사태, 87년 6월 항쟁과 같은 굵직굵진한 사건들을 낳아왔음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탈 정치화의 길을 걷는 것은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그 길을 같이 한다. 그 시점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이며, 서태지의 등장과 함께 한국 모든 학생들은 '큰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를 주로 하기 시작했다. 탈 이념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어, 지금의 대학생들은 너무나 비정치적으로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많이 다르다. 나는 나의 또래들에 비해 정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하루에 1~2시간은 꼭 신문과 칼럼을 읽으며, 그 상당 부분은 정치면에 할애된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수 많은 정치인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였으며, 몇몇 정당의 역사를 배웠으며, 몇몇 책들을 통해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의 큰 줄기를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어려운 정치 서적들을 사서 꾸역꾸역 읽으면서 한국근현대사에 대하여 조금씩 알아갔으며, 나에게는 시들고 있다고 판단되었던 사회적 분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축적된 나의 정치적 지향점을 설명하자면 우선 한국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현재 처한 정치적 상황이란 다시 과거 한국 정치를 돌아보지 않고는 그 정확한 흐름을 이해하기 힘들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정치의 큰 대립 구도의 변화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나의 열린우리당 지지의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며, 열린우리당은 새로운 정치 구도의 창출에 가장 앞 서 있는 정당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해방 직후에는 한국 정치의 큰 구도는 좌파 대 우파 였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하지 않고도 좌파가 등장할 수 있음은 러시아 혁명에서 잘 알 수 있지만, 한국도 이러한 환경에 있었다는 사실은 굉장히 놀라웠다. 사실 해방직후의 한국의 정치 지형은 극좌가 형세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4.3 사태와 여순사건을 통해 좌파가 축출되고, 극우 독재 정권이 연이어 들어섬에 따라 한국의 정치 지형은 극우로 급선회 하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사회 각 부분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함에 따라 한국 사회는 더욱 우경화 되었는데, 이 우경화의 주체가 바로 친일파들이다. 친일을 했던 인사들은 그 특유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친미적 성향을 띠게 되고, 이 사람들이 정부와 국회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친미 독재 세력들에 대항하는 저항 세력도 나타나는데, 그들이 바로 신익희, 조병옥, 장면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 때부터 정치의 큰 구도는 좌 대 우에서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로 된다. 그 당시에 좌파는 어짜피 거세된 것이나 진배 없었으며,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대안 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는 4.19를 통해 그 결실을 보게 되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큰 구도, 즉 민주 대 반민주 극우 세력이라는 대립은 87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87년 6월의 일은 의미심장하다. 4.19 이후로 최초로 민중, 학생 세력이 승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수확을 얻었으며, 김대중이라는 거인을 다시금 제도권으로 복권시켰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양 김씨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더니 민주화 세력이 대선에서 패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다. 민주화 세력의 분열이 역사의 반동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또한 이시기에 주목해야 하는 현상은 지역주의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경북은 노태우의 민정당, 경남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호남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충청도는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으로 전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게 된다. 한국 정치의 큰 대립구도가 지역주의로 재편되는 순간이다.

지역주의라는 대립구도 하에서는 삼김과 같은 거물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대립각은 커다란 문제점을 낳는다. 즉 지역에서의 독과점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정치 독과점은 필히 불공정 경쟁과 '정치 상품'의 부실함을 낳게 되고, 이에 따른 이념적 정체성의 모호함은 정책 경쟁 보다는 정략적 이전투구만을 낳았다. 3김에게 줄을 서고 악수 한 번 하려는 모리배들이 넘쳐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이러한 구도로 2002년까지 쭉 오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의 당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혁명이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 정치인 이었으며, 한국 정치의 이단아였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 최초의 선거였으며, 노사모로 대표되는 자발적 정치 팬클럽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리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지역구도 타파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전라도에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는 정당의 경상도 출신 대통령 후보라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 바로 노무현이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카리스마있는 정치인의 상명하달식 정치의 부분적인 종식도 중요한 의미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의 당선으로 촉발된 지역구도 허물기는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그 정점에 이른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의 정치인들은 열린우리당을 '분열세력', '노무현당'이라 매도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민주당이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다. 과거 통합민주당을 깨고 창당한 'DJ당' 국민회의를 이어받은 정당이 새천년민주당이 아닌가. 원조 분열 세력이요, 원조 개인 정당인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수구성과 지역주의에 실망하여 뛰쳐나온 의원들과 몇몇 한나라당, 개혁당 의워들이 만든 신생 정당인 것이다.

여기서 민주당의 반민주성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몇몇 민주당 의원들은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서 이긴 얼마 후에 지지율이 떨어지자 자기들이 뽑은 후보를 마구 흔들어 대고, 후보 사퇴를 촉구하고 있었다. 국민경선이라는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서 선출하고도 거기에 승복을 못하고 후단협과 탈당으로 추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국 민주당은 그 때 도덕적으로 사망한 것이다.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이 대두된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열린우리당은 어떤 긍정적 가치 또는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태어난 정당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현존하고 있는 명백한 정치적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탄생하였다고 보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그 정치적 악이란 첫째가 지역주의이며, 둘째가 상명하달식의 비민주적인 정당구조이다. 열린우리당은 이 둘 모두를 어느 정도 해소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열린우리당에는, 동교동계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에서는 정치적 뒷바침을 받기 어려운 노무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기 위한 목적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가야할 큰 구도는 진보 대 보수가 아닌가 한다. 이는 지역주를 깨뜨려야만 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지역주의를 깨는 것은 삼김식의 인물정치, 비민주적 정당구조와 이념과 철학의 빈곤을 동시에 척결하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열린 우리당을 지지하는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혹자는 나에게 왜 민주 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지역구도를 깨는 확실한 방법 중에 하나가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함으로써 정계를 인위적으로 진보 대 보수로 몰아가는 것일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자이며, 정치적 가치 지향점은 자유주의적 온건 보수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이는 열린우리당의 노선과도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우리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식이 되었든 사회적 참여는 적극 장려되어야 한다. 그 통로로 나는 정치라는 것을 선택하였으며, 그 실천으로서 몇 달 전에 나는 열린우리당에 가입하여 당원이 되었으며, 현재 당비도 내고 있는 형편이다. 정치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결집된 정치적 의사 결정이 우리의 사회적 환경을 달리 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갈대 2004-05-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를 잘 해주셨네요. 한국 정치사의 큰 줄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개척자 2004-05-27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_^; 앞으로는 다른데도 잘 꾸며놓을테니 자주 들러주시고 추천도 해주십시오 ㅎㅎ;; 저도 님의 서재에 종종 들르겠습니다.
 

 

도대체 나는 왜 책을 이다지도 열심히 읽으려 한단 말인가? 나의 과중한 학업량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려는 시도는 무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기숙사에는 전공 서적을 제외하고도 약 300권의 서적이 있으며, 하루에 평균잡아 약 3시간 가량 책을 읽으며, 주말이나 방학 때는 하루에도 6~8시간씩 책을 읽기도 한다. 이 정도의 독서량은 요즈음의 대학생들과 비교하여 대단히 많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책의 난이도가 만만치가 않다.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불리우는 책은 <냉정과 열정사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외에 몇권이 더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사>, <서정주 시정신>, <사회 역학>, <현대 한국정치: 이론과 역사 1945 - 2003>, <인간 본성에 관하여>등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까다로운 학술서적들이 난무한다. 아마도 일반 대학생들이 나의 보유 서적들을 본다면 기겁을 할 것같다. 

혹자는 나에게 인문학도나 사회과학도가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계공학과에 재학중인 대학교 5학년(?) 학생이다. 학과 수업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해서 1년 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이며, 대학원도 포항공대 기계공학과로 진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인문 사회학도가 아니라면 자신의 전공 공부까지 소홀하면서 그렇게 책을 읽어야겠소? 나는 '그렇소'라고 대답하고 싶다. 난 책읽기가 좋다. 책은 많은 것을 준다. 내가 모르던 방법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으며, 나의 감정의 편린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구체적인 독서관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관점이 그러하듯이 나의 독서관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는 없으며, 그렇게 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나의 독서 목표를 밝히자면 깨달음 즉  앎이다. 전체적이고 본질적으로,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다. 나의 독서는 재미가 아니다. 나의 독서가 재미를 준다면 그것은 감상적이거나 말초적인 재미가 아니라 깊은 앎이 주는 깨달음의 기쁨일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것을 거의 읽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볼수록 그 책은 깊이가 얕고 말초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판단한다. 물론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성경과 같은 많은 경전들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지만 결코 그 사상의 폭과 깊이가 작지 아니하다. 하지만 대체로 내가 느낀 것은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흥미 위주의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러한 책들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고 삶의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나,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이 주는 가르침이란 깊이 있는 책들이 주는 가르침에는 못 미치며, 삶의 재미에 있어서는 게임 채널의 스타크래프트 중게만도 못한 책들이 널리고 널린게 출판계의 현실이다. 요즈음 나오는 많은 책들중에 10권에 9권은 내 눈에는 아무 필요도 없는 출판 공해물들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깨달음의 방법으로서 독서를 생각한다면, 그 독서의 범주를 논하는 것이 필수이다. 우선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깨달음을 표피적인 현상을 넘어서 존재하는 본질적이고도 심층적인, 근원적이고도 포괄적인 원인을 알아내는 정신적, 직관적 행위라 정의한다면 깨달음의 과학적 인식행위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독서의 범주는 분명 인문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과 옛 경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일테다. 그리고 나의 라이브러리는 분명 그러한 책들로 꽉 채워져 있다. 다른 열독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문학을 많이 읽지 않는 다는 점이다. 내가 이 싸이트에서 책을 많이 읽은 명예의 전당 사람들의 도서 목록을 보면 상당부분 소설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소설은 한정된 철학과 생에 대한 성찰은 줄 수 있어도, 지식과 사실 관계를 전달하는 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

나는 진정 세상이 어떠한가를 알기를 원한다. 어떠하면 좋다는 철학이라던가, 어떻게 하자는 주장이라던가, 어떤 느낌이라는 감상은 나에게 있어서 중심 주제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더 객관적인 사실들을 나는 알기를 원한다. 여기서 객관적 사실은 없다라고 하는 철학적인 주장은 불필요할 것 같다. 최소한 내가 느끼기로는 자연과학적 법칙이 사회과학적 가설들과 법칙들 보다는 훨씬더 객관적인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E = mc^2이라는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노벨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실험적, 이론적 결과가 도출이 되지 않는 이상 위의 공식은 항상 옳은 거의 절대 진리에 가깝다. 나는 이렇게 경험적으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공식화된 더 많은 과학적(자연과학뿐만이 아니라 사회 인문과학까지 포함하는)법칙을 알기를 원한다.

깨달음에 접근하는 이러한 방식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접근하는 방식조차 나를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단호히 주장하건데, 사회생물학이 나오기 전까지의 모든 인간에 대한 명제들은 다 헛소리다. 그것들은 대단히 불완전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느니, 인간은 도구적 동물이라느니하는 명제와 '인간은 왜 사는냐?'라던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따위의 질문들은 다 잘못된 명제, 그리고 잘못된 질문들이다. 나는 앞으로 이런식의 질문은 던지지 않을 것이며, 저런 따위의 주장들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는 것이 이미 답의 형태를 특수한 형태로 제약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왜 사는냐?'라던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답의 형태를 철학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철학적 질문인듯하다. 하지만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라는 걸출한 사회생물학자가 개척한 새로운 분야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 즉,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목적은 더 많은 유전자를 복제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여태껏 질문조차 하지 않던 수많은 인간 사회의 현상의 답을 주고 있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성적으로 적극적인가하는 질문에도 어느 정도의 답이 나와 있으며, 인간이 이타적 행위들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이 생존기계라는 사회생물학적 명제가 옳든지 그르던지 중요한 것은, 삶의 이유와 의미에대한 자연과학적 접근법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접근은 인문과학적 접근이 대부분이었으며, 여태껏 주장되어진 많은 삶의 의미라는 것이 나에게는 현자들의 따분한 말장난으로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과학적 접근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나는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여태껏 제기돼 왔던 인문 사회과학적 질문들을 해결하는 단초들을 사회생물학에서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앞으로는 사회 인문과학의 바탕을 이루는 학문이 되리라 나는 짐작한다. 마치 화학이 생물학의 바탕이 되고, 물리학이 화학의 바탕이 되고, 수학이 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그동안 우리를 억누르던 수 많은 도그마(dogma)를 무너뜨릴 것이며,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의 장을 열어줄 것이다.

사회생물학의 예를 통해 보여 주었듯이 인간과 우주의 그 수 많은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과학인 것이다. 소설로 인간을 이해하시겠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와 삶의 천양지색의 양태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즉 나열은 할 수 있어도 거기에서 본질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같다. 이러한 이유로 학교 수업에서는 과학과 공학을 배우고, 독서을 통해서는 사회 인문과학적 축적을 위해서 부단히 힘쓰고 있는 중이다.

물론 독서를 통해서 얻는 정서적 고양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새로운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사람의 경험이 유한하고 그에 따르는 감정 또한 유한하기때문에 우리의 삶은 경험을 벗어날 수 없지만, 독서라는 간접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뜨거운 것과 매운 것을 똑같이 hot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우리 한국사람들의 맛에 대한 감각은 다를 수 있다. 즉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감각과 감정을 일깨움으로써 풍부한 감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나는 시를 읽는다. 특히 서정주와 오세영을 많이 읽었는데, 역시나 삶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비록 과학은 아닐지라도)과 철학을 나에게 던져준다. 또한 앞으로는 소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흥미위주의 대중소설은 읽지 않을 것이다.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적으며, 거기서 느끼는 짜릿함 또한 덜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논어와 같은 경전들이 주는 강렬한 삶의 메세지를 얻는 것도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그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앞의 세대를 살아간 많은 성인들의 목소리와 정신을 느끼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축적하는데에 대단히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내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닐진데, 이러한 어떠함의 축적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나의 인격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나는 독서를 한다.

결국 독서란 우주와의 지적인 호흡이며 상호 규정의 과정이다. 또한 독서는 깨달음의 단초이며, 새로운 '나'로의 지향이다. 신학자 에크하르트가 어떠한 행위를 하느냐 보다 어떠한 됨됨이를 가질것이가를 더욱 고민하라고 했듯이, 이러한 과학적 깨달음과 우주적 호흡을 통해서 진정 세계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고 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나의 어떠함이 더욱 풍요로와 질 수 있을 터이고, 누군가 나의 가슴을 들쳐봐도 더 좋은 됨됨이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진정한 사랑과 이해로 이어지고, 이는 어려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불의에 대한 분노와 온갖 허구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짓 희망에 대한 조소, 인간 전체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갈대 2004-05-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독서취향이네요. 전공이 공대인 것도 같고요(기계는 아닙니다만)
저도 재미보다는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그래서 문학보다는 과학, 인문, 사회쪽 책을 좋아하구요.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종종 들를게요^^

개척자 2004-05-2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모르는 사람과도 교감할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 없군요.

marine 2004-06-2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상당히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글들입니다^^
저도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님 수준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 같네요^^
사실 저도 "베스트셀러"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좋은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과연 무엇이 좋은 책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쉽게 읽히지 않는 고전을 끙끙거리며 기를 쓰고 읽어야 올바른 독서인지, 아니면 그저 나에게 뭔가 느낌을 주는 책이면 다 괜찮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어쩌다가 알라딘에 들어왔다가 나의 서재의 빈약함에 실망하고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읽은 책들 리뷰도 좀 쓰고, 마이페이퍼에도 새로운 항목을 추가함으로써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오늘 하루 생각하며'라는 카테고리에는 나날이 생활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적을 계획이다. 사실 나는 굉장히 많이 사고하고 느끼고하는 사람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홈페이지도 만들지 않았었고, 그렇다고 어디에 그러한 생각의 조각들을 남겨놓지도 않았었다. 다만 대학 1학년 초기에 분반보드에다 3류 소설 나부랑이 쯤 되는 감상적인 글쪼가리들을 남겨놓고는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그당시에는 그래도 꽤 고민하면서 쓴 글들이다.

앞으로 여기에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반성하고 생각을 전개해 나가고 할 작정이다. 사실 나의 생활이라는 것이 너무나 나태하기 그지 없다. 지금은 새벽 2시이지만 어제는 새벽 5시 조금 넘어 잠이 들어서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일어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또 저질렀다. 거의 미친짓이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나에게는 약간의 불면증과 무기력증이 있다. 만성 피로도 조금 있는 듯하다. 이거 고치지 않으면 젊은 시절이 부패하게 된다. 나는 24살의 팔팔한 남성이 아니던가! 이러한 일기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계기인 것이다. 이러한 되돌아봄을 통해 나의 생활이 균형있도록 통제하는 것도 의미있을 듯 싶다.

또한 여기는 일기를 뛰어넘는 수필의 장이다. 수필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넘어서,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우주를 보는 재치를 담는 글쓰기라면, 그러한 성찰과 기지(wit)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 될 수 있을테다. 이제 나의 심장에 흥분의 두드러기가 일고 있다. 이 글쓰기를 통해 적극적으로 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을 재발견한 것이다. 아직도 나는 젊은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