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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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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태껏 한국인의 국민성이라던가 민족성을 주제로 하여 비판적인 논조의 글들을 담은 많은 책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책들을 대개가 선진국은 어떠어떠한데 한국은 어떠하니 고쳐야한다, 또는 선진국 국민들은 이러이러한데 한국인은 이러이러하니 대오각성해서 고쳐야한다는 논지였다. 하지만 진중권 교수의 책 <호모 모레아니쿠스>는 그런 교양수준의 에세이와는 달리 한국과 한국인들이 겪어온 20세기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경위와 앞으로의 전망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한국인의 잘못된 "국민성"으로 비판 받아온 거의 모든 점들이 다 한번씩은 거론되고 있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조급함, 쉽게 흥분하고 쉽게 가라 앉는 냄비근성, 온갖 패거리 주의 등, 가히 "한국인 비판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현 상태를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의 혼합으로 보고 있다. 서양인들의 경우 전근대적인 구술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근대적 문자문화를 맞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오랜 기간이 있었지만, 한국인의 경우 문자문화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기도 전에 탈근대 문화, 디지털 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습속" 중 비판 받고 있는 것들은 이러한 문자적인 근대 문화를 압축적으로 겪은 한국인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전근대 문화, 구술문화의 잔재라는 것이다. 또한 일재시대와 6.25전쟁의 공포가 "웰빙"주의를 낳았으며,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패거리 주의로 이어졌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본문에서 예로 들고 있는 "박정희 덕에 먹고 산다"는 주장이나 현재의 사회적 혼란이 모두 "노무현 탓"이라는 주장도 모든 것을 왕의 탓으로 돌리는 전근대적 문화의 잔재라는 분석은 그래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들은 비판적인 어조로만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상당수가 비판적인 어조를 취하고 있지만 한국의 밝은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들도 꽤나 많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이 탈근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여기서 긍정적인 우리의 앞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IT강국, 디지털 선진국 등의 말들은 이미 우리에게 펼쳐진 현실이 되고 있으며,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남의 시각과 기준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 볼 때 인문학적인 성찰과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때만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라면 이책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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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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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을 읽을 때에는 끝까지 다 읽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보통 내용이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지루할 때 그렇지만 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설에 반대할 때, 또는 너무 수준이 낮을 때도 그러하다. 이 책의 수준은 적당한 편이며 그다지 지루하지도 않지만, 전개 되고 있는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읽으면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았다. 비교적 세련된 글쓰기 방식과 적절한 자료 인용에도 불구하고 주장하는 바가 나의 이해와는 상충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우선 나를 거슬리게 한다. 본인은 공학도이며 대학원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공학이 인류의 복지를 무한히 확장해 줄것이라는 희망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많은 현대인들이 과학 기술이라는 우상에 빠져있다는 비유에도 동감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자연 과학적 이해가 저자가 말하는 바알 종교와 등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섬겼던 대표적 우상인 바알Baal 종교는 욕구 충족의 수단이라는 본질에 있어 과학과 동일하다. 바알 종교는 자연의 소생력을 신격화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로 이 종교의 기본적 가설은 인간이 적절한 종교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그의 가정과 가축, 땅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바알 종교가 추구한 것은 사실 오늘날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바알 종교는 과학처럼 불안하고 확실치 못한 삶의 환경에서 안전과 번영, 복리를 얻기 위해 자연을 제어하고 지배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을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바알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33)" 

저자는 용감하게도 과학을 수십세기 전의 종교와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한다. 그 본질이라는 것이 과학과 바알 종교가 동일한 목적 즉, 자연에 대한 통제력과 생산력을 얻기 위한 믿음의 체계였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글쓰기인가! 과학과 바알이 본질에 있어 동일하다? 이 자리가 사색과 진지한 성찰의 자리라는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육두문자를 쓰지 않게끔 하는구나~! 바알 종교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바알 종교가 인류에게 어떤 유익한 유산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의 열매인 기술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믿음의 체계라고? 웃기지 말라. 과학은 앎의 체계요 지식의 체계다. 비록 인간이 인식과 이해에 있어서 태생적 한계를 지니기때문에 과학이라는 앎의 체계도 불완전한 면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믿음이라는 저자의 말은 심히 유감스럽다. 만약 과학이 믿음이라면, 내가 단연코 말하건데 그 어디에도 지식이나 앎은 있을 수 없다.

자연 과학은 그 어떤 학문 보다도 더 진리에 가깝다. 절대 진리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절대 진리에 가장 가까운 어떤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실험 상태와 환경을 적절히 조절만 할 수 있다면 똑같은 실험 결과를 거의 무제한으로 반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물리학적인 성과인 것이다. 또한 달과 지구가 공전하는 주기가 일정한 것, 그리고 수 많은 물리적 현상의 그 반복성이라는 것이 자연 과학의 승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과학을 기술이라는 특정 용도로만 한정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과학이 어떻게 인류의 복지를 기술적 용도로만 쓰일 수 있겠는가? 과학은 바로 우주에 대한 궁극적 이해를 위한 인간의 이성적 활동의 최고봉이다. 온갖 종교 전통들, 철학적 전통들에서 나타나는 기만적이고 잘못된 이해들을 일순간에 청소할 수 있는 것이 또한 과학인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 있는 몇몇 모순들까지도 말이다. 30페이지에서도 저자는 과학을 "과학적인 믿음은 신학적인 믿음을 판정하는 통제적 믿음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다시 말하거니와 과학은 믿음이 아니다. 저자여, 그대는 과학을 모르니 과학을 운운하지 말라. 만약 과학을 믿음이라 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앎, 지식은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인식은 내가 있다는 명제도 믿음이 되는 것이다. 알겠는가?

또 다른 저자의 말을 살펴보자:

"신의 존재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우리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결정보다도 중요한 결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할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 많은 종교적 전통들에서 얻을 수 있는 내면의 성찰, 예술적 영감, 영혼의 안식들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성경과 기독교도 그러한 전통중에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또 무어란 말인가?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오~, 저자여, 믿음은 앎에 대한 빈약한 대용품이다. 이해가 또는 앎이 찾아 오기전에는 믿음을 가지지 말자고 나는 주장한다. 신이 있다고 믿는 것도, 신이 없다고 믿는 것도 나에게는 다 쓸모 없는 일이다. 그렇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며, 그렇다고 그 무지를 믿음으로 대치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종교적 전통을 통해서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의 휴식을 핑계로 신앙을 주장하지도 말자.

이 책에서 종교 전반에 관한 비판적 성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온통 기독교적 교설에 대한 논의들, 그것도 대체로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불교나 유교, 도교, 이슬람교는 종교도 아닌가? 한마디로 실패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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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ria-patri 2005-11-1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태하교수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으며 다만 댓글만 읽고 감히 한마디 합니다. 루트2의 근사값이 1.414라는 명제를 믿는 믿음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는 구별된 믿음이지요. 아미 이교수도 제가 읽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책에서 말하는 믿음 또는 신념은 전자쪽이 아닐런지요.

marine 2006-02-0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과학을 단순한 기술만능주의 같은 태도로 보는 것은 불만이었어요 지적하신 바로 그 부분이 매우 거슬렸고 저자가 과학에 대해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자연과학은 단순히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잡다한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생성 원리를 밝혀 가는,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사고체계라고 생각합니다 과학만능주의 하면서 종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도킨스의 교양서적을 권해 주고 싶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종교철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 점은 마음에 들었어요
종교를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철학의 언어로, 이성적인 관점에서 사유하자는 종교철학은 앞으로도 신앙 생활 하는데 매우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토끼사냥꾼 2006-08-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적인 관점과 중심으로 써 내려간 책입니다. 종교라는 범주가 아님을 명시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말이죠..
서문도 조금 맘에 들지 않는 내용이 있어 시작부터 기분이 상했습니다. 민족종교와 기독교의 충돌, 왜 충돌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하지 민족종교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죠...관점을 너무 기독교적 중심적으로 해석하는것이 찜찜했습니다.

이정 2008-11-07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않는가,? 이 문제는 오랜과거부터 이어져 왔다.
과연 어떤것이 질실인가, 그렇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수있는가, 아니다. 없다..
또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지않는다는 것을 입증할수있는가?? 이또한 아니다. 없다.

이 논제는 입증. 또는 반증 할수도없는것이다. 그래서, 및져야 본전이니까..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개척자 2010-08-2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님 그럼 이것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소의 신체를 가지는 동물이 화성의 지하 1km의 동굴에 살고 있다는 명제를 반증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밎져야 본전이니 그냥 저도 믿어볼까요ㅋ?

ㅇㅇ 2019-03-11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용한 글로만 봐서는 이태하씨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종교, 주술과 같은 것을 조잡하지만 자연지배의 시도로 볼 수 있죠. 자연과학의 등장도 17세기에 마찬가지의 욕구 위에서 등장합니다.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적어도 저런 지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봐야겠죠. 님은 ‘자연과학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참이라 해도 그로부터 자연과학이 자연지배의 욕구를 배제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베이컨이나 데까르뜨만 읽어도 당시 사람들의 바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현대인들의 마음만 들여다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요. 또한 자연과학이 전제하는 ‘계산가능성‘개념은 설명과 예측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길 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죠.

ㅇㅇ 2019-03-11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게다가 마지막 신의 존재를 묻는 부분에서는 이태하씨의 생각을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종교철학의 담론을 기독교가 주도해 왔기에, 종교철학의 문제들이 기독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문제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종교들에 한해, 그런 믿음이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는게 이태하 씨의 주장이라면, 그게 님이 말하는 믿기 전에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종교들에게 있어서도 저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겁니다. 그러니 호교론이 발생하는 것이고요. 9년 전 글이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글을 무성의하게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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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개인은 역사적 개인이다. 그 어느 누구도 역사라는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 우리의 어떠함을, 오늘의 나의 행동 양식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역사라는 추상적 실체에 기대지 않고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오늘날 사회의 구조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사회 정치적 행위들의 본질을 간파할 길은 없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해하고 그 배움을 내면화하는 과정은 사회 속에서의 나를 찾고 완성해 가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여로인 것이다.


그러함으로 우리는 박정희라는 한 개인을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삶은 단순한 자연인의 삶으로 그친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와 그의 행동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어떠함을 낳은 거대한 산파였다. 세계에서 12번째의 경제 규모, 상위 중진국 수준의 일인당 국민소득,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물질적 발전은 많은 부분 박정희 정권의 업적에 기초한 것이고, 그 정권의 업적은 박정희라는 일개인의 의지와 비젼을 통해 추진되고 달성된 부분이  큰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50~60 대 이상의 근대화 주역들은 그의 수 많은 반인륜적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을 과장해서 찬양하고 있으며, 운동권 출신과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그를 쿠데타를 일으킨 범죄자, 전 국토의 병영화를 꾀하여 군사 문화를 사회 전반에 뿌리 박은 군국주의자, 반공의 기치로 한반도의 남쪽을 정치적 절름발이로 만든 파시스트로 메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느 여론 조사에서는 박정희를 두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 한 명으로 꼽고있는데, 확실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시각은 그 어떤 사회적 이슈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갑제와 같은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50~60이상의 어르신들, 그리고 경상도 출신의 저학력층은 대체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행한 과오를 근대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와는 달리 전라도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고학력층은 대체로 박정희를 자신의 정권욕을 위하여 어떠한 일도 서슴없이 자행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들을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으로 파헤치고 그에 대한 조금이라도 더 공정한 시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통한 입체적인 이해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 책에서는 그런 객관적인 자료와 공정한 접근을 통하여 박정희와 3공화국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매우 얇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자료 조사를 거쳤다고 하기에는 빈약한 감이 없지않다. 따라서 박정희의 개인사와 3공화국의 모든 실체가 모두 서술되어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저자는 민족주의의 정의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박정희가 민족주의자인지 아닌지를 파헤치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접근을 통하여 박정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있다.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의 역사를 더듬을 때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에 하나가 5.16이라는 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운동권, 민주화 인사들로부터 민족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5.16 군사 쿠데타도 단순히 초헌법적인 범죄로만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는 점이 너무나 많다. 당시 장준하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5.16을 눈감아 주었으며, 심지어는 당시의 사회 혼란을 종식시켜줄 수 있는 민족주의 세력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5.16 당시 미국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증언이 엇갈리는 관계로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저자는 책에서 5.16을 구체적으로 파헤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의 내용은 박정희 정권이 사회 정치적으로 행한 일들, 예를 들어 새마을 운동이라던지 민족 문화 복원 사업 등의 내용과 그 의미 그리고 영향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는 경제 발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남한의 경제 발전이 박정희 정권의 업적이 아니라, 반공 전선 구축을 위한 미국의 경제 원조와 조언이 컸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결국 저자고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진정으로 목표했던 것은 자유와 민주화라는 정신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근대화가 아니라, 물질적 경제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반동적 근대화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라고 그는 평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든, 또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박정희를 존경하지는 않는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행태가 경제 발전이라는 모토로 모두 정당화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박정희라는 일개인이 가졌던 근대화에 대한 의지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물적 토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물적 토대가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의 위치를 가지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는다. 설령 그가 근대화의 과정에서 민주화를 짓밟고 노동자와 민중을 억압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흔히 사람들은 그가 자유와 빵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가 그 빵이 나중에는 더 큰 자유를 양산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개인사가 기회주의적 행태로 점철되고 자신의 야욕을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의 경제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아직도 역사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지금, 이 책을 통하여 잠시나마 독자들이 나와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들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던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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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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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양을 위한 경제학'이라는 서평 제목을 선택한 것은, 이 책은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일반인들의 교양을 위한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교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는 가는 각자 사람마다의 철학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는 교양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데에 있어서 김규항(<B급 좌파>의 저자)의 의견을 따르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교양은 사회적 분별력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다양한 일들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여러가지 행동 양식과 지식을 요구 받는다. 그러한 행동 양식과 지식을 습득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피곤하고 손해보는 '장사'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사회를 유지하고 가꾸어 나가는데에는 여러 종류의 지식과 기본적인 사회적 규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식과 사회적 규범을 우리가 습득하지 않느다면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와 예측성은 현저하게 낮아질 터이고,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극단적인 무지의 세계에서 야만의 삶을 살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여러 경로의 교육을 통하여 이 사회의 운영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경제학은 그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이 사회와 그 구성원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은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올바른 사회적 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적 사고 방식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수 없이 많은 경제적 거래를 하고 있을뿐더러 앞으로는 더 많이 하게 될 것이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현실 경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와 사회, 문화와 교육 등 사회의 각 분야 중에서 경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하나도 없다.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현상, 특히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라는 축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인이나 경제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 자신들 주위의 경제 현상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경제 교양서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 책의 가치는 그러한 필요를 채워줌에 있다. 다른 경제학 개론서와는 달리 어려운 용어나 수학 공식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있으며(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각종 도표와 통계자료, 이해하기 쉬운 그래프와 현실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며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경제학 개론서에 등장할만한 기본적인 이론을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 이론을 바탕으로 여러 매체의 경제 보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좋은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따로 짧게 정리하고 있으며, 중요한 개념은 정확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 유시민의 시각은 대체로 삐딱하다. 책의 여러 곳에서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을 비꼬고 있다. 그는 경제학의 근본 토대인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는 기본 가정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학은 엄밀성을 가지는 과학이라기 보다는 원시적인 학문이라는 말도 심심지 않게 나온다. 주류 경제학이 가지는 학문으로서의 불완전함과 모순을 그는 철저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단순히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교양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정치적 현상을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개인의 행위로 이해하려는 경제학적 사고를 가르쳐준다는 데에도 존재한다. 제 2 부의 '지역주의 정치경제학'과 '새만금 사업과 외부효과', 그리고 '합리적 다수결은 없다'는 아마도 그러한 정치 경제학적 사고 방식을 나타내는 부분일 것이다.

우리 각자가 경제 현상을 이해함으로써 조금 더 올바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여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사회적 분별력이 증진되고 결과적으로 교양 수준이 높아진다고 할 수 있겠다. <유시민의 경제학 까페>는 경제 현상의 이해를 통해서 사회적 분별력을 높이는데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경제학 개론 이상의 경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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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
오쇼 라즈니쉬 지음, 임유진 옮김 / 미래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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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종종 낭패감과 권태로움을 느끼고 내적인 공허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시간에 쫓기고 효율성을 가장 중시하면서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고 스스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존재의 화살이 어떤 과녁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히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며, 우리는 스스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채 이리저리 휩쓸려 가고 있는 것이다.

오쇼는 이런 현대인들에게는 '영혼의 의사'라고 할만하다. 그는 내면의 과학을 보여주었으며, 하나의 새로운 심리학을 창조하였다. 그는 "현재에 살아라. 자유롭게 살아라. 혼자서 살아라"는 중심적인 메세지와 함께 늘 사랑과 명상을 강조하였다. 불교와 도교, 복음서와 수피즘 등 다양한 종교적 사상들을 두루 섭렵한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영성을 스스로 창조하여 보여주었으며, 명상의 방법과 실천에 대한 많은 강의를 통해 현대인들의 신경증적인 현상들을 치료하는데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의 글과 강의는 매우 쉽다. 어려운 단어는 전혀 없고, 내용도 재미있어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깊은 내용과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통찰력은 우리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든다. 그는 우리의 가슴에 너무나도 빠르고 충격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강의를 적은 글들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말들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의 정신과 내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스스로의 삶이 추해지고 있다면, 그래서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긍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의 글을, 그의 언어를 맛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영혼과 소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특히 이 책은 편집과 구성이 좋아서 읽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그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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