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났든, 아니면 과거를 살았던 훌륭한 사람들이 가슴에 품었던 화두이건 간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분명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거쳐간,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아마도 어느 정도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가졌으리라 추측한다. 나도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시간의 광막함과 자신에 대한 의문들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의문들 중에는 성에 대한 호기심과 앞날에 대한 궁금증 등, 사춘기 소년이라면 가질법한 모든 질문들이 뒤섞여 있었음은 사실이다.

내가 이전의 글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사실 그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답이 없다는 말은 과학적인 답,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로서의 답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분명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질 수 있다면 한 번쯤은 고찰해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질문의 답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어쩔것인가. 누가 지금의 나에게 "당신은 누구요?" 라고 질문한다면 나는 잘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때의 질문은 한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며, 직업이나 성명을 묻는 사무적인 질문은 아닌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조각품이요. 하나님과 내가 빚는 조각품. 또한 나는 시 그 자체요. 나의 삶의 이야기는 하나의 멋있는 시가 되어야 하오. 읽으면 아름다운 맛이 살아나는 시가 되었으면 한단 말이오."

이전에 갈대님의 서재에서 진중권이 TV에 나와서 인생을 예술작품에 빗댄 표현을 했다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낭패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인생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느끼고 한창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진중권씨가 먼저 선수를 치다니.

나는 사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시도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게 되었다. 아무리 사회생물학적 명제를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나의 삶이 온통 생식에 바쳐질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나의 삶의 순간들을 이끌어 가는 동력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순간들은 오게 마련이다. 도대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가? 내가 일상을 사는 이유는? 내가 인터넷에 글을 쓰고 공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고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인가? 명예을 얻기를 원하는가? 지식과 철학으로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픈가?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들이대도 나는 이 짦은 생의 동력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2학년 때의 갑작스런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통찰을 주었다. 이 통찰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공룡은 존엄하였나? 공룡이 성스럽고 도덕적으로 살았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예수가 2000년도 더 전에 십자가를 지고간 이유는? 예수와 공룡의 차이는?"

혹자가 보기에는 너무나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심각하고 의미있는 질문이었고, 나에게 조금의 정신적 진전을 가져다준 계기가 되었다. 그 질문을 이렇게 풀어서 생각해 보자: 아주 오래 전에 공룡이라는 생명체가 살았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을 터이다. 그 동물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우리 인간보다 더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뛰어난 지능이 있어서 존엄과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공룡들 중에서 예수와 같은 특출난 영성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가진 개체가 있다고 상상해보면 얘기가 재밌어진다. 그 공룡은 왜 그래야 했는가? 다른 공룡들의 대다수가 이기적인데 그 공룡이 이타적인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시간의 광막함과 생의 짧음에서 이러한 성찰을 할 수 있었다. 즉 '삶은 짧고, 죽음, 그것으로 나는 끝이다' 라는 너무나 당연한(?) 깨달음이다. 단 한번뿐인 삶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내면 깊숙히 들어와 박혀버렸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이러한 앎이 내면에서 스스로 솟아나고 보니, 단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일도 함부로 할 수 없고, 주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 겠다는 박애정신이 갑자기 생겨났다. 물론 순간의 이기심에 가리게 되니 그 깨달음과 실천이 오래가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더라도 삶에 있어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삶은 죽음으로 끝나고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은, 그리고 우주는 나 이의정이라는 사람이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았던지 아니면 뉴튼과 같은 삶을 살았던지, 그도 아니면 도시의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녀와 같은 삶을 살았던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와 세상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가치하고 내가 어떻게 살든 이 우주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선택이 남아있다. 모든 삶에 대한 선언들이 이데올로기이고, 모든 종교의 교리들과 철학들이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내 삶의 동력을 선택하고 선언할 수 있다. 저 버러지 같고 빌어먹을 삶이 있는가 하면, 예수나 공자와 같은 뜨겁고 높은 차원의 삶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미적으로 아름답고 뜨거운 삶을 살련다. 이건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나의 뇌는 내 삶의 목표와 목적을 모른다. 내 영혼과 가슴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뜨거운 삶을, 예술작품이 되는 삶을 살 것이라고 가슴은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라는 정체성의 답을 주었다. 즉 나는 하나님과 내가 빚는 조각품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님을 밝혀 두겠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우주를 운행하고 작동하는 거대한 법칙 체계와 삼라만상 전체를 일컫는 상징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또한 나의 삶의 이야기를 누군가 읽었을 때 하나의 멋진 작품이라 여길 수 있을 정도의 시 작품이 되었으면 한다. 이건 대단히 어렵고 각고의 노력이 요청되는 삶이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다. 삶에 대한 이러한 뜨거운 인식이 나의 행동과 사고, 그리하여 삶 전체를 변화시키리라 믿는다.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과학적 사실로서의 '인생의 목적'은 없다(사회생물학의 논쟁을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으니 독자들은 참으시라). 삶의 목적은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죽음은 우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술 작품이고, 나중에는 하나의 인생 이야기가 시 작품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우리는 매 순간 조각하고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나날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실을 망각함으로 부패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조각품을 스스로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생겼고, 스스로가 숱하게 던졌던 질문들과 그 질문들을 답하려고 했던 그 노력들이 나의 가슴에서 돌 하나를 걷어내었다. 그 걷어낸 돌 밑에서 샘이 솓아나고 있다. 샘이 솟아나 큰 호수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호수는 강을 이룰 것이며, 그 강은 우주의 바다에 다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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