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나는 왜 책을 이다지도 열심히 읽으려 한단 말인가? 나의 과중한 학업량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려는 시도는 무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기숙사에는 전공 서적을 제외하고도 약 300권의 서적이 있으며, 하루에 평균잡아 약 3시간 가량 책을 읽으며, 주말이나 방학 때는 하루에도 6~8시간씩 책을 읽기도 한다. 이 정도의 독서량은 요즈음의 대학생들과 비교하여 대단히 많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책의 난이도가 만만치가 않다. 소위 베스트셀러라고 불리우는 책은 <냉정과 열정사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외에 몇권이 더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사>, <서정주 시정신>, <사회 역학>, <현대 한국정치: 이론과 역사 1945 - 2003>, <인간 본성에 관하여>등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까다로운 학술서적들이 난무한다. 아마도 일반 대학생들이 나의 보유 서적들을 본다면 기겁을 할 것같다. 

혹자는 나에게 인문학도나 사회과학도가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기계공학과에 재학중인 대학교 5학년(?) 학생이다. 학과 수업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해서 1년 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중이며, 대학원도 포항공대 기계공학과로 진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인문 사회학도가 아니라면 자신의 전공 공부까지 소홀하면서 그렇게 책을 읽어야겠소? 나는 '그렇소'라고 대답하고 싶다. 난 책읽기가 좋다. 책은 많은 것을 준다. 내가 모르던 방법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으며, 나의 감정의 편린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구체적인 독서관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관점이 그러하듯이 나의 독서관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는 없으며, 그렇게 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나의 독서 목표를 밝히자면 깨달음 즉  앎이다. 전체적이고 본질적으로,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다. 나의 독서는 재미가 아니다. 나의 독서가 재미를 준다면 그것은 감상적이거나 말초적인 재미가 아니라 깊은 앎이 주는 깨달음의 기쁨일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나는 베스트셀러라는 것을 거의 읽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볼수록 그 책은 깊이가 얕고 말초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판단한다. 물론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성경과 같은 많은 경전들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지만 결코 그 사상의 폭과 깊이가 작지 아니하다. 하지만 대체로 내가 느낀 것은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흥미 위주의 선정적이고 감각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러한 책들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고 삶의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나,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이 주는 가르침이란 깊이 있는 책들이 주는 가르침에는 못 미치며, 삶의 재미에 있어서는 게임 채널의 스타크래프트 중게만도 못한 책들이 널리고 널린게 출판계의 현실이다. 요즈음 나오는 많은 책들중에 10권에 9권은 내 눈에는 아무 필요도 없는 출판 공해물들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깨달음의 방법으로서 독서를 생각한다면, 그 독서의 범주를 논하는 것이 필수이다. 우선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깨달음을 표피적인 현상을 넘어서 존재하는 본질적이고도 심층적인, 근원적이고도 포괄적인 원인을 알아내는 정신적, 직관적 행위라 정의한다면 깨달음의 과학적 인식행위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독서의 범주는 분명 인문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과 옛 경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일테다. 그리고 나의 라이브러리는 분명 그러한 책들로 꽉 채워져 있다. 다른 열독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문학을 많이 읽지 않는 다는 점이다. 내가 이 싸이트에서 책을 많이 읽은 명예의 전당 사람들의 도서 목록을 보면 상당부분 소설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소설은 한정된 철학과 생에 대한 성찰은 줄 수 있어도, 지식과 사실 관계를 전달하는 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

나는 진정 세상이 어떠한가를 알기를 원한다. 어떠하면 좋다는 철학이라던가, 어떻게 하자는 주장이라던가, 어떤 느낌이라는 감상은 나에게 있어서 중심 주제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더 객관적인 사실들을 나는 알기를 원한다. 여기서 객관적 사실은 없다라고 하는 철학적인 주장은 불필요할 것 같다. 최소한 내가 느끼기로는 자연과학적 법칙이 사회과학적 가설들과 법칙들 보다는 훨씬더 객관적인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E = mc^2이라는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노벨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실험적, 이론적 결과가 도출이 되지 않는 이상 위의 공식은 항상 옳은 거의 절대 진리에 가깝다. 나는 이렇게 경험적으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공식화된 더 많은 과학적(자연과학뿐만이 아니라 사회 인문과학까지 포함하는)법칙을 알기를 원한다.

깨달음에 접근하는 이러한 방식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접근하는 방식조차 나를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한다. 단호히 주장하건데, 사회생물학이 나오기 전까지의 모든 인간에 대한 명제들은 다 헛소리다. 그것들은 대단히 불완전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느니, 인간은 도구적 동물이라느니하는 명제와 '인간은 왜 사는냐?'라던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따위의 질문들은 다 잘못된 명제, 그리고 잘못된 질문들이다. 나는 앞으로 이런식의 질문은 던지지 않을 것이며, 저런 따위의 주장들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질문이라는 것이 이미 답의 형태를 특수한 형태로 제약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왜 사는냐?'라던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답의 형태를 철학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철학적 질문인듯하다. 하지만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라는 걸출한 사회생물학자가 개척한 새로운 분야에서는 전혀 다른 관점 즉,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이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살아가는 목적은 더 많은 유전자를 복제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여태껏 질문조차 하지 않던 수많은 인간 사회의 현상의 답을 주고 있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성적으로 적극적인가하는 질문에도 어느 정도의 답이 나와 있으며, 인간이 이타적 행위들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이 생존기계라는 사회생물학적 명제가 옳든지 그르던지 중요한 것은, 삶의 이유와 의미에대한 자연과학적 접근법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접근은 인문과학적 접근이 대부분이었으며, 여태껏 주장되어진 많은 삶의 의미라는 것이 나에게는 현자들의 따분한 말장난으로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과학적 접근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나는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여태껏 제기돼 왔던 인문 사회과학적 질문들을 해결하는 단초들을 사회생물학에서 찾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앞으로는 사회 인문과학의 바탕을 이루는 학문이 되리라 나는 짐작한다. 마치 화학이 생물학의 바탕이 되고, 물리학이 화학의 바탕이 되고, 수학이 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그동안 우리를 억누르던 수 많은 도그마(dogma)를 무너뜨릴 것이며,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의 장을 열어줄 것이다.

사회생물학의 예를 통해 보여 주었듯이 인간과 우주의 그 수 많은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과학인 것이다. 소설로 인간을 이해하시겠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와 삶의 천양지색의 양태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즉 나열은 할 수 있어도 거기에서 본질을 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같다. 이러한 이유로 학교 수업에서는 과학과 공학을 배우고, 독서을 통해서는 사회 인문과학적 축적을 위해서 부단히 힘쓰고 있는 중이다.

물론 독서를 통해서 얻는 정서적 고양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새로운 감정을 일깨우는 것이다. 사람의 경험이 유한하고 그에 따르는 감정 또한 유한하기때문에 우리의 삶은 경험을 벗어날 수 없지만, 독서라는 간접 경험을 통하여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뜨거운 것과 매운 것을 똑같이 hot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우리 한국사람들의 맛에 대한 감각은 다를 수 있다. 즉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감각과 감정을 일깨움으로써 풍부한 감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나는 시를 읽는다. 특히 서정주와 오세영을 많이 읽었는데, 역시나 삶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비록 과학은 아닐지라도)과 철학을 나에게 던져준다. 또한 앞으로는 소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흥미위주의 대중소설은 읽지 않을 것이다.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적으며, 거기서 느끼는 짜릿함 또한 덜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논어와 같은 경전들이 주는 강렬한 삶의 메세지를 얻는 것도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그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앞의 세대를 살아간 많은 성인들의 목소리와 정신을 느끼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축적하는데에 대단히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내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닐진데, 이러한 어떠함의 축적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나의 인격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나는 독서를 한다.

결국 독서란 우주와의 지적인 호흡이며 상호 규정의 과정이다. 또한 독서는 깨달음의 단초이며, 새로운 '나'로의 지향이다. 신학자 에크하르트가 어떠한 행위를 하느냐 보다 어떠한 됨됨이를 가질것이가를 더욱 고민하라고 했듯이, 이러한 과학적 깨달음과 우주적 호흡을 통해서 진정 세계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고 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나의 어떠함이 더욱 풍요로와 질 수 있을 터이고, 누군가 나의 가슴을 들쳐봐도 더 좋은 됨됨이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진정한 사랑과 이해로 이어지고, 이는 어려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불의에 대한 분노와 온갖 허구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짓 희망에 대한 조소, 인간 전체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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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5-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독서취향이네요. 전공이 공대인 것도 같고요(기계는 아닙니다만)
저도 재미보다는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그래서 문학보다는 과학, 인문, 사회쪽 책을 좋아하구요.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종종 들를게요^^

개척자 2004-05-2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모르는 사람과도 교감할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 없군요.

marine 2004-06-2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상당히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글들입니다^^
저도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님 수준보다는 한 수 아래인 것 같네요^^
사실 저도 "베스트셀러"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좋은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과연 무엇이 좋은 책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쉽게 읽히지 않는 고전을 끙끙거리며 기를 쓰고 읽어야 올바른 독서인지, 아니면 그저 나에게 뭔가 느낌을 주는 책이면 다 괜찮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