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보통 책을 읽을 때에는 끝까지 다 읽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보통 내용이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지루할 때 그렇지만 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설에 반대할 때, 또는 너무 수준이 낮을 때도 그러하다. 이 책의 수준은 적당한 편이며 그다지 지루하지도 않지만, 전개 되고 있는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읽으면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았다. 비교적 세련된 글쓰기 방식과 적절한 자료 인용에도 불구하고 주장하는 바가 나의 이해와는 상충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우선 나를 거슬리게 한다. 본인은 공학도이며 대학원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것이라는, 공학이 인류의 복지를 무한히 확장해 줄것이라는 희망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많은 현대인들이 과학 기술이라는 우상에 빠져있다는 비유에도 동감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자연 과학적 이해가 저자가 말하는 바알 종교와 등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섬겼던 대표적 우상인 바알Baal 종교는 욕구 충족의 수단이라는 본질에 있어 과학과 동일하다. 바알 종교는 자연의 소생력을 신격화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로 이 종교의 기본적 가설은 인간이 적절한 종교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그의 가정과 가축, 땅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바알 종교가 추구한 것은 사실 오늘날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바알 종교는 과학처럼 불안하고 확실치 못한 삶의 환경에서 안전과 번영, 복리를 얻기 위해 자연을 제어하고 지배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을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바알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33)" 

저자는 용감하게도 과학을 수십세기 전의 종교와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한다. 그 본질이라는 것이 과학과 바알 종교가 동일한 목적 즉, 자연에 대한 통제력과 생산력을 얻기 위한 믿음의 체계였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글쓰기인가! 과학과 바알이 본질에 있어 동일하다? 이 자리가 사색과 진지한 성찰의 자리라는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육두문자를 쓰지 않게끔 하는구나~! 바알 종교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바알 종교가 인류에게 어떤 유익한 유산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의 열매인 기술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내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믿음의 체계라고? 웃기지 말라. 과학은 앎의 체계요 지식의 체계다. 비록 인간이 인식과 이해에 있어서 태생적 한계를 지니기때문에 과학이라는 앎의 체계도 불완전한 면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이 믿음이라는 저자의 말은 심히 유감스럽다. 만약 과학이 믿음이라면, 내가 단연코 말하건데 그 어디에도 지식이나 앎은 있을 수 없다.

자연 과학은 그 어떤 학문 보다도 더 진리에 가깝다. 절대 진리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절대 진리에 가장 가까운 어떤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실험 상태와 환경을 적절히 조절만 할 수 있다면 똑같은 실험 결과를 거의 무제한으로 반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물리학적인 성과인 것이다. 또한 달과 지구가 공전하는 주기가 일정한 것, 그리고 수 많은 물리적 현상의 그 반복성이라는 것이 자연 과학의 승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과학을 기술이라는 특정 용도로만 한정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과학이 어떻게 인류의 복지를 기술적 용도로만 쓰일 수 있겠는가? 과학은 바로 우주에 대한 궁극적 이해를 위한 인간의 이성적 활동의 최고봉이다. 온갖 종교 전통들, 철학적 전통들에서 나타나는 기만적이고 잘못된 이해들을 일순간에 청소할 수 있는 것이 또한 과학인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 있는 몇몇 모순들까지도 말이다. 30페이지에서도 저자는 과학을 "과학적인 믿음은 신학적인 믿음을 판정하는 통제적 믿음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다시 말하거니와 과학은 믿음이 아니다. 저자여, 그대는 과학을 모르니 과학을 운운하지 말라. 만약 과학을 믿음이라 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앎, 지식은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인식은 내가 있다는 명제도 믿음이 되는 것이다. 알겠는가?

또 다른 저자의 말을 살펴보자:

"신의 존재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우리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결정보다도 중요한 결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할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 많은 종교적 전통들에서 얻을 수 있는 내면의 성찰, 예술적 영감, 영혼의 안식들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성경과 기독교도 그러한 전통중에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또 무어란 말인가?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오~, 저자여, 믿음은 앎에 대한 빈약한 대용품이다. 이해가 또는 앎이 찾아 오기전에는 믿음을 가지지 말자고 나는 주장한다. 신이 있다고 믿는 것도, 신이 없다고 믿는 것도 나에게는 다 쓸모 없는 일이다. 그렇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며, 그렇다고 그 무지를 믿음으로 대치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종교적 전통을 통해서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영혼의 휴식을 핑계로 신앙을 주장하지도 말자.

이 책에서 종교 전반에 관한 비판적 성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온통 기독교적 교설에 대한 논의들, 그것도 대체로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불교나 유교, 도교, 이슬람교는 종교도 아닌가? 한마디로 실패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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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ria-patri 2005-11-1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태하교수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으며 다만 댓글만 읽고 감히 한마디 합니다. 루트2의 근사값이 1.414라는 명제를 믿는 믿음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는 구별된 믿음이지요. 아미 이교수도 제가 읽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책에서 말하는 믿음 또는 신념은 전자쪽이 아닐런지요.

marine 2006-02-0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과학을 단순한 기술만능주의 같은 태도로 보는 것은 불만이었어요 지적하신 바로 그 부분이 매우 거슬렸고 저자가 과학에 대해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자연과학은 단순히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잡다한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생성 원리를 밝혀 가는,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사고체계라고 생각합니다 과학만능주의 하면서 종교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분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칼 세이건이나 리처드 도킨스의 교양서적을 권해 주고 싶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종교철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 점은 마음에 들었어요
종교를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철학의 언어로, 이성적인 관점에서 사유하자는 종교철학은 앞으로도 신앙 생활 하는데 매우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토끼사냥꾼 2006-08-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적인 관점과 중심으로 써 내려간 책입니다. 종교라는 범주가 아님을 명시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말이죠..
서문도 조금 맘에 들지 않는 내용이 있어 시작부터 기분이 상했습니다. 민족종교와 기독교의 충돌, 왜 충돌이 일어났는지가 중요하지 민족종교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죠...관점을 너무 기독교적 중심적으로 해석하는것이 찜찜했습니다.

이정 2008-11-07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않는가,? 이 문제는 오랜과거부터 이어져 왔다.
과연 어떤것이 질실인가, 그렇다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수있는가, 아니다. 없다..
또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지않는다는 것을 입증할수있는가?? 이또한 아니다. 없다.

이 논제는 입증. 또는 반증 할수도없는것이다. 그래서, 및져야 본전이니까..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개척자 2010-08-2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님 그럼 이것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소의 신체를 가지는 동물이 화성의 지하 1km의 동굴에 살고 있다는 명제를 반증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밎져야 본전이니 그냥 저도 믿어볼까요ㅋ?

ㅇㅇ 2019-03-11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용한 글로만 봐서는 이태하씨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종교, 주술과 같은 것을 조잡하지만 자연지배의 시도로 볼 수 있죠. 자연과학의 등장도 17세기에 마찬가지의 욕구 위에서 등장합니다. 많은 점에서 다르지만 적어도 저런 지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봐야겠죠. 님은 ‘자연과학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참이라 해도 그로부터 자연과학이 자연지배의 욕구를 배제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베이컨이나 데까르뜨만 읽어도 당시 사람들의 바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현대인들의 마음만 들여다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요. 또한 자연과학이 전제하는 ‘계산가능성‘개념은 설명과 예측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길 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죠.

ㅇㅇ 2019-03-11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게다가 마지막 신의 존재를 묻는 부분에서는 이태하씨의 생각을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종교철학의 담론을 기독교가 주도해 왔기에, 종교철학의 문제들이 기독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문제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종교들에 한해, 그런 믿음이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는게 이태하 씨의 주장이라면, 그게 님이 말하는 믿기 전에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종교들에게 있어서도 저런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겁니다. 그러니 호교론이 발생하는 것이고요. 9년 전 글이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글을 무성의하게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