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콘크리트로 만든 선착장을 지나 드디어 섬으로 들어섰다. 그렇지만 인공섬이라서 그런지, 해안의 모래밭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땅은 보도블럭과 대리석으로 만든 경계석 너머의 화단, 그리고 미관을 위해 깔아놓은 듯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잿빛 현무암이 보였다.
왕님은 걸음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바람에 녹아들어 있는 것은 바다의 냄새만이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꽃의 향기, 풀과 나무의 숨결이 섞여 있었다. 꽃 모양의 섬을 상상해서일까 생각했는데 섬 안으로 들어올수록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교문을 대신해서 놓은 듯한, 조각과 같은 인위적인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현무암 덩어리 두 개가 보도의 양 옆에 인왕처럼 버티고 있었고 그 너머 세상은 수벽(樹壁)으로 나뉘어진 자수화단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로크식 정원 특유의 기하학적이고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화원이었다.
아른한 향기와 아름다운 광경에 취했는지 발걸음이 느려지며 일행에서 뒤쳐진 왕님을 보고 지란이 가볍게 불렀지만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 걸 보아서 단단히 빠져든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조금 떨어진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키작은 소녀와 그만 부딪히고 말았다. 커다란 인조가죽제 옷가방을 양손으로 들고 끙끙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걷던 소녀는 비틀거리다 보도블럭 위로 넘어졌다. 지란이 놀라며 한달음에 달려왔고 왕님도 얼른 부축을 하며 물었다.
“괜찮니?”
“아, 예. 괜찮……아요.”
“미안해. 내가 잠깐 정신을 다른데 팔고 있어서.”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듭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일어나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털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색이 조금 짙고 눈과 코끝이 둥그런 것이 동양인이긴 해도 평균적인 한국인과는 꽤 다른 느낌이었다. 왕님은 저도모르게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것이 실례라는 걸 깨닫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지란이 쫓아와 가방에서 쏟아진 책을 주워담는 걸 보고 뒤늦게 도와주었다.
“여왕님아, 뭘 보고 있었길래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어?”
“응? 여기, 너무 아름답잖아.”
“쳇. 아름다우면 뭘 해. 어차피 학교인 걸. 우리가 경치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아니고, 결국 살다보면 금방 지겨워질 걸. 그보다 빨리 담기나 해. 근데 세상에, 이게 다 책이야?”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의 정체는, 터져나갈 듯 가득 담긴 책 덩어리 자체였다. 하지만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집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수십 권의 책 거의 다가 낡고 해진 소설이었다. 더구나 왕님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살인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표제. 그 외에도 로봇, 마법사 같은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검은 피부의 소녀는 그의 시선이 닿은 책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건 『그린 살인 사건』이에요. 반 다인의 대표작 중 하나죠. 내용 초기에 범인과 범행 동기까지 다 알려주는데도 처음 읽는 사람 대부분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버리게 만드는 점이 굉장한 작품이죠.”
여리고 갸날프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소녀의 입에서는 살인이나 범인 같은 낱말이 아무렇지도 앟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란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을 대하듯 쳐다보았다.
“아니 고등학교에 오는데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갖고 와? 그것도 소설책을……”
과자에 이불까지 싸가지고 왔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간지럽혔지만 왕님은 억지로 꿀꺽 삼켜야만 했다. 소녀는 입만 살짝 움직여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도서관이 크기는 크지만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서량이 많지 않다고 들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읽는 책은 추리소설이 대부분이고 SF와 판타지를 조금 읽고 있어서, 고등학교 도서관엔 아무래도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챙겨 왔죠. 아직 안 읽은 것도 많아요.”
소설이라고 해도 교과서에 실린 것을 제외하면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은 하이틴 로맨스나 빌려 읽는 정도인 지란에게는 감탄보다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독서광은 야구광이나 인형 수집광에 못지않게 낯설고 기묘한 존재였다. 그래서 오타쿠에 해당하는, 특히 컴퓨터 쪽에 몰두하는 사람을 영어로는 괴짜라는 뜻의 geek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대단하다, 대단해. 오늘 대단한 애들을 많이 보네. 과연 그 유명하다는 영화궁 고등학교야. 아무나 올 곳이 못되는 모양이야. 그런데 너…… 미안하지만 한국인이니?”
지란의 질문은 상대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실례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아니오. 전 유학생이에요. 국적은 인도지만 다람살라에서 나고 자란 장족(藏族)이에요.”
그 대답을 듣자 왕님은 소녀를 보며 받았던 이질적인 인상의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외모도 그랬고, 일부러 힘을 주어 또박또박 하는 발음도 그랬으며, 무언가 몸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스웨터에 검은 바지, 운동화 차림이라 겉모습은 우리나라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목에 두른 직조 목도리와 팔찌가 이국적인 느낌을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자 소녀는 더 잘 보라는 듯 팔을 들었다. 왼팔에만 세 개의 팔찌를 달고 있었는데 재질이 다른 듯 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나는 염주처럼 색색의 구슬을 꿰었고, 다른 하나는 금속 재질이고, 나머지 하나는 목재인데 티벳의 문자가 깨알처럼 새겨져 있었다. 소녀는 오른손을 들어 점자를 읽듯 검지로 팔찌를 쓸었다.
“옴마니밧메훔을 새겨놓은 팔찌예요. 할머니의 선물이죠. 이 육자진언은…… 음, 설명하기가 힘들다. 우리 티벳 사람들은 늘 말하고 갖고 다니는 경문이에요. 불교의 나무아미타불이나 기독교의 아멘과 비슷하다고 하면 알겠죠?”
“아, 그래…….”
지란의 목소리는 별로 흥미가 없지만 이야기에 동참은 해주마 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보다 지란의 흥미는 다른 쪽에 있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 학교에 들어왔니? 가만,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걸으면서 얘기하자. 자, 뭐하니, 여왕님아야는 가방을 같이 들어주고, 너도 우리랑 또래일 텐데 말 놓아도 돼. 넌 이름이 뭐니?”
“체링이라고 부르세요. 이름은 체링 룽계 족첸인데 한국사람들은 길어서 부르기 어려운가 봐요. 그리고 말은 다른 것을 배우지 않아서…….”
“체링? 귀여운 이름이네! 우리말도 잘 하고. 어려울 게 어딨어. 그냥 말끝의 ‘요’자만 떼면 돼.”
어느새 자연스레 왕님과 체링은 가방의 손잡이를 하나씩 나누어 잡고 나란히 걸었다. 지란은 그 주위를 맴돌며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몸 대신 입으로 일하는 사람, 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듯한 모습에 왕님은 절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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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에는 유람선처럼 보이는 배 한 척과 비슷한 정도 크기의 작은 화물선이 한 대 정박해 있었다. 화물선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화물을 내리고 지게차로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남자들이지만 선착장에서 화물을 내리는 사람은 전원 여자라는 점이었다. 나이는 노인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섬쪽의 인원은 지게차 운전수까지 모두 여성이었다. 남자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화물을 건네주기만 하고, 여자는 화물을 받아서 지게차로 싣는 등 자유로이 배와 섬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남자는 섬에 발조차 디딜 수 없는 것 같았고, 모두들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렴풋이 들은, ‘영화궁 고등학교는 금남구역’이라는 말이 피부로 와닿는 장면이었다.

“영화궁인지 아방궁인지 모르겠지만, 교사부터 청소하는 사람까지 전부 여자라더니 사실인 모양이네.”

멀미인지 속이 메슥거린다며 잠시 늘어져 있던 지란이 어느새 기운을 차리고 다시 불평스러운 목소리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배를 탄 적이 한 번도 없다던 지란은 여기 제주도에 올 때도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처음 경험한 뱃길을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여겼다. 10분 정도에 불과한 뱃길에 멀미를 느낀 것도 어쩌면 그런 심리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왕님은 손을 꼭 잡아주고 등을 쓸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그렇게 과자를 먹어대니까 속이 안 좋지 라고 장난스럽게 면박을 주며 기운을 내도록 애썼다.

“그런데 학교 이름부터 안내문에도 여고라는 말이 없는데 교직원까지 전부 여자라니, 교장은 무슨 생각으로 여자만 모아놓으려는 걸까?”
“그게 말이지, 이 학교 설립자가 외국인인데 레즈비언이라는 소문도 있어. 아무튼 학교는 교장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란다. 무슨 재단인가가 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이사회 멤버가 전부 여자로만 이루어져 있대. 직원 모집 공고에도 여자만 뽑는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잖아.”
“그런 일도 있었나?”

문득 다시 안내 책자를 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가방 안에 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제주공항에서 펼쳐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에 선명한데, 거기서 이제 쓸모없겠다 싶어서 버렸는지 갖고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지란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듯 팔짱을 끼고 약간 으스대며 말했다.

“너야 모르겠지. 우리 집에선 이 학교 만든다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거든. 처음엔 이상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여기가 완전히 외딴 섬이잖아. 남녀를 모아놓으면 좀 위험하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여자만 뽑는다는 얘기야.”

어느새 지란의 이야기에 주위에 있는 아이들도 주목하고 있었다. 곧 걔들끼리도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가장 많이 도마에 올려 놓은 화제거리는 과도한 소지품 검사 및 물품 압수였다.

“여기가 무슨 스파르타식 입시 학원인가? 그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 하진 않겠다. 거기서도 휴대폰 압수는 안 하지 않냐?”
“입시 학원에 가봤어?”
“당연히 안 가봤지. 스파르타 어쩌고 하는 기숙학원들은 다 재수학원이니까. 근데 우리는 뭐니. 이제 막 고등학교 들어가는데 바로 재수생 취급이야? 겉으로는 무슨 외국 유학생들이 줄을 서서 들어오니, 전국 석차 1%에 들어가야 입학할 수 있다니 하면서 바람을 불어넣더니 사실은 섬에 가둬놓고 공부만 시키려는 속셈이야.”
“어른들 하는 게 다 그렇지. 우리 엄마는 나보고 삼 년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지내래. 죽은 사람이 공부를 한다니?”
“내 생각엔 죽어서 지옥에 가라는 소리 같아. 공부만 하는 공부 지옥.”

아이들은 그래 그래,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한 마음으로 똘똘 뭉치고 있었다. 아이들 특유의 또래 심리와 학교에 대한 반발심이 하나로 융합되어 작은 수상 버스는 어느새 학생의 자율과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궐기 모임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배에 두 사람의 교직원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있는 듯 했다. 그 한 사람은 배를 조종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그 옆 조수석에 앉아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며 손자의 재롱을 즐기는 할머니 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여왕님은 배를 내린 화물선이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공부 지옥에는 발끝도 딛기 싫다는 듯 바삐 사라지는 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귓가를 간지럽히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로 흥분을 달래었다. 자연이 만든 장엄한 경관을 대하는 심정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설렘이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며 웅장한 큰북 소리가 되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 * * * * * * * * *


배에서 내리자 차가운 겨울의 바닷바람이 과격한 환영인사처럼 소녀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마구 흔들었다. 배에서완 달리 직접 섬에 발을 딛자 겪어보지 못한 이질적인 환경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눈높이에서 시선을 움직이면 한쪽에 희미한 제주도의 원경이, 구름에 감싸인 하얀 한라산이 보인다. 다른쪽에는 건물과 나무의 모습이, 고저가 없는 인공섬의 토지 위에 늘어선 건물들이 보인다. 그 외에는 온통 푸른 바다와 옅은 하늘, 흩뿌려진 구름 뿐이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신비로운 세계였다. 바다 위에 뜬 신기루처럼 아련하고 환상적인 세상.

승합차에 타고 내릴 때와 마찬가지로 손선지가 선두에 서서 양손을 벌리고 손짓을 하며 아까처럼 두 줄로 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은 잔뜩 늘어놓았던 불평과 불만을 접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관광객 모드로 돌아가서 독특한 풍경에 순수한 감탄을 보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팻말만 하나 들면 여지없이 관광 가이드로 보일 법한 선지의 안내가 이어졌다.

“우리 학교는 특별히 교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선착장을 지나면 바로 학교 내부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안내 책자를 봐서 아시겠지만 우리 학교는 다섯 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활짝 핀 꽃을 이미지로 만들었어요. 사실 위에서 보면 꽃보다 별 같기도 하지만 말예요. 그래서 정식 이름은 아니지만 별꽃이나 별꽃섬이라고 부르죠. 사실은 하나가 아직 완공이 되지 않아서 완전한 꽃 모양은 아니지만, 꽃잎 한 장이 벌레 먹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리얼한 모습이라고 할까요.”

몇몇 아이들이 킥킥 웃었다. 그들은 저마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꽃 모양의 섬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벌레 먹은 모습으로 찌그러진 꽃을 말이다. 덕분에 지나치게 인공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던 섬이 조금은 푸근하고 가깝게 느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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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red 2009-11-11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네요.
 

수상 버스는 천장이 낮아 들어가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실은 여고생 정도의 키는 서있어도 머리가 닿지 않지만, 낮아 보인다는 인상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것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시선을 옮기니 한쪽 구석 창가자리에 팔짱을 끼고 토라진 모습으로 앉은 지란이 보였다. 왕님은 말없이 옆자리에 앉으며 “아, 좋다!” 하고 외쳤다. 지란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좋기도 하겠다. 짐이 작아서.”
“그러게 어차피 필요없는 물건은 안 갖고 오면 좋았잖아.”
“야, 설마 무슨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소지품 검사를 해서 다 압수할 줄 누가 알았겠니? 여기 있는 애들 전부 휴대폰이랑 사복은 기본으로 챙겨왔을 텐데 그걸 다 빼앗겼으니 이제 무슨 낙으로 살아?”
“하긴. 요즘 애들은 휴대폰 없으면 물 없는 고기처럼 안절부절 못하니까…….”
“앗쭈, 여왕님아는 요즘 애들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 넌 휴대폰 없어?”
잠시 틈을 두고 생각했지만, 여왕님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은 없어.”
“진짜?”
“진짜.”
“진짜 정말?”
“진짜 정말!”
“진짜 진짜 정말?”
“진짜 진짜에 정말 참말이다!”
“……신기하네.”
“뭐가 신기해?”
“정말 오늘 처음 만났지만 너처럼 신기한 애는 처음 봤어.”
“난 네가 더 신기하다!”

때리는 시늉을 하자 지란은 그제야 찌푸린 표정을 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둘이는 그렇게 잠시 웃다가 숨을 골랐다. 어느덧 검사가 끝나고 모든 아이들이 수상 버스에 올라타자 직원들은 압수품을 담은 플라스틱 통을 승합차에 담은 후 두 사람은 차에 남고 두 사람은 배로 돌아왔다. 한 사람은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다른 사람, 손선지는 다시 관광 가이드 모드로 돌아가 조수석 옆에 선 채로 안내 멘트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배를 타고 약 오 분 정도 떨어진 영화궁 고등학교에 도착할 겁니다. 그곳에 가게 되면 가장 먼저 자기가 살게 될 방 번호를 배정받고 기숙사로 이동합니다. 그 다음엔 저녁식사를 하고 학교와 기숙사 생활에 대한 안내를 포함한 신입생 간담회가 있을 예정이니……”

멍하니 푸른 바다에 정신을 빼앗긴 왕님의 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상대적으로 손발이 찬 왕님에게는 더욱 더 따뜻하게, 차가운 바닷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지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과 손목을 주물럭거리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지란이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같은 반 되었으면 좋겠다. 너만 보고 있어도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아.”
“그러게.”

손을 맞잡으며 대답하곤 의자에 머리와 등을 기대었다. 이대로 한숨 더 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항해는 차로 이동했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짧았다. 눈을 좀 감았나 싶었는데 벌써부터 여자애들의 우와, 와아 하는 성가신 아우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뭔데 그리 호들갑인가 싶었는데 지란도 창가에 얼굴을 붙인 채로 저것 좀 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 불쑥, 학교가 나타났다. 검은 바위와 잿빛 방파제, 한가로이 떠있는 고깃배를 연상했던 여왕님도 망연자실, 그저 눈앞의 비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나무나 수풀 비슷한 초록색 덩어리들도 점점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공중정원도 아니고, 물 위에 건물이 떠 있을 수는 없는 거다. 소녀들은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머릿속에서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면서 바라보고는 있지만, 이것 역시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답은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섬의 진짜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 섬은 수면에서 십 미터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낮고 평평한 땅이었다. 그리고 섬의 전모가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싼, 섬보다는 좀 더 높아서 태풍이나 파도를 막아주는 인공 방파제 때문이었다. 사실은 섬 자체가 인공으로 만든 구조물이기 때문에 높이가 일정하게 평평한 것이었고, 따라서 멀리서 보면 건물만 바다 위에 불쑥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 리가 없는(안내 책자에는 간략한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아이들은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바다 위에 만든 인공섬.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공간. 오직 고등학교만이 존재하는, 학교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이를 위해서 얼마나 막대한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을지, 소녀들은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굳이 아무것도 없는 제주도 서쪽 해상에 이토록 거대한 인공섬을 만들었을까. 그저 대외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특이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나 무모한 시도였다. 아무리 세계적 재벌인 태북그룹이라지만 말이다. 그룹 휘하엔 건설회사도 있으니 만드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투자-후원이라는 이름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입학식조차 치르지 않은 학생들이 추측하기에는 일렀다. 지금은 그저 그 규모와 웅장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이 섬과 학교에 대해 소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경의의 표시요 첫인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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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이 2009-07-2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필자2님, 안녕하세요. 4회까지 단숨에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벌써 중독될 것 같아요.

pilza2 2009-07-24 2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실은 몰아서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조용히! 조용히 하세요. 여러분들이 협조를 잘 해주셔야 빨리 기숙사로 들어가서 쉴 수 있습니다. 늦어도 저녁식사 시간 전에는 각자의 방을 배정받아야 하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요. 제 앞에 있는 사람부터 여기 책상 앞에 두 줄로 서세요. 각자 가지고 온 짐을 다 갖고 계세요. 혹시 차에 두고 내린 것이 없나 지금 다시 확인하세요.”

아까는 신경도 쓰지 않아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항구 한 복판에 가로가 긴 책상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도 없이 책상만 있어서 뜬금없어 보였는데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소녀들은 투덜대고 소근대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책상 앞에 두 줄로 늘어섰다. 덕분에 왕님은 지란의 짐을 돌려줄 수 있어서 홀가분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자신이 가진 가방이 가장 작은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최소한 옷가방 하나 이상이었고 자기처럼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온 사람은 없었다. 다들 해외여행을 가는데 혼자만 소풍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떤 아이는 뭐가 없다면서 헐레벌떡 승합차로 뛰어가고, 다른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직 도착 안 했어. 지금 항구 비슷한 곳에 왔는데 무슨 소지품 검사를 한대……’ 라면서 엄마로 보이는 상대와 휴대폰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편 승합차 운전을 했던 여성과 수상 버스에 타고 있던 운전수를 포함한 두 사람까지, 모두 네 사람의 직원이 소녀들이 선 줄 맨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 똑같은 짙은 회색 양복에 검은 구두 차림이고 이십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둘씩 나누어 줄의 앞에 있는 책상의 뒤에 섰다. 한 사람은 서류철 비슷한 것을 집어들었고, 다른 한 사람이 손을 내밀며 맨 앞에 선 아이에게 말했다.

“자, 갖고 온 짐을 전부 이 책상 위에 올려 놓으세요.”

아이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어 쭈볏거리면서도 결국은 시키는 대로 했다. 젊은 여성들은 빠르고 능숙한 손길로 가방을 열고, 핸드백을 열고, 트렁크를 열고 안에 든 것을 다 꺼내어 헤집어 놓았다.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저 어, 어, 하고 염려섞인 탄식만 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길은 날카롭고 손길은 재빠르며 판단은 정확했다.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손에는 휴대폰, MP3플레이어, 노트북, 고데기, 화장품, 술병, 담배, 잡지, CD 등 부적절한 물품들이 걸려나왔다. 입학 안내 책자에서 반입 금지라고 못박아놓은 품목들이었다. 직원들은 가차없이 압수한 후 서류에 이름과 물품명을 기입하고는 집으로 반송할 거라고만 말한 후 책상 옆에 있었던 플라스틱 통 안에 던져 넣었다. 아이들은 울상이 되어서 부탁하고 사정하고 화를 내기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지란의 차례가 되었다. 직원들은 가장 많은 짐을 갖고 온 지란을 보며 반쯤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란은 기세에 눌릴세라 어디가 어때서! 라고 외치는 듯 일부러 건방진 표정을 만들어서 맞섰다. 가방을 연 단발머리 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쑥씹은 표정으로 지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과자들을 말이죠…… 꼭 갖고 가야 겠어요?”
아까 왕님에겐 옷과 이불이라더니, 짐의 반이 과자며 초컬릿이며 사탕에 캔디였다. 그런데도 왜소한 체구라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바로 뒤에 있던 왕님은 그 광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우와! 외국 과자들도 잔뜩 있네. 난 저런 거 처음 봐.”
“그치? 이건 영국 것이고 이건 일본…… 난 싸구려 과자는 안 먹거든.”
지란은 씩 웃으며 왕님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리곤 다시 건방진 표정으로 안면을 전환하고는 직원에게 따졌다.

“저기요. 안내 책자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과자를 갖고 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거든요? 내가 제주도 구석에 처박혀서 무슨 즐거움으로 살겠어요? 고작 과자나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겠다는데 그게 안 된단 말예요? 아니지, 고작은 아니에요. 이거 다 외국 과자거든요. 이중에 엄청 비싼 것도 있어요. 이 초컬릿 박스, 이건 휘트먼스(Whitman's)에서 나온 건데 24가지의 다른 재료를 넣은 초컬릿 모음이라고요. 가격이 봐요, 19.99달러. 25000원은 한다고요. 더구나 이건 우리나라에 팔지도 않아서 배송료 따지면 훨씬 비싸겠죠?”

“잠깐만요, 학생. 저희는 지금 과자가 비싸고 안 비싸고, 귀하고 안 귀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안내 책자에는 학업과 관계 없는 물품의 반입을 금지하며 이를 압수하여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그런 주의사항에 동의를 했다는 의미이고요. 따라서 이건 전부 압수입니다.”
“네? 말도 안 돼! 이런 법이 어딨어! 내가 지금 무슨 교도소에 오는 것도 아니고!”

지란이 불평불만을 토로하든 말든 직원들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계속 했다. 그들은 지란이 가져온 외출복, 파자마, 속옷 할 것 없이 옷이란 옷은 전부 압수했고, 베개와 이불마저 알레르기 어쩌고 하는 핑계를 깨끗이 무시하고 압수했다.

“저희가 제공하는 침구는 위생적으로 세탁하고 살균처리를 할 것입니다. 전염의 가능성이 있는 병이 아니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요. 만약 그래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전속 의사가 있으니 언제라도 진찰을 받으세요.”

단발머리의 직원은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지란의 짐을 정리했다. 워낙 시간이 많이 걸려서 옆 줄은 벌써 다 끝나가고 마지막 학생이 검사를 받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그 뒤로 이동해서 다시 두 줄의 길이가 비슷해지자 왕님의 차례가 되었다.

작은 가방 하나. 안에 든 것도 머리빗, 칫솔, 핸드 크림, 로션, 멀미약, 탁상시계,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단발머리의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띤 얼굴을 왕님은 처음 보았다. 그의 가슴에 붙은 명찰에 손선지라는 이름이 보였다. 선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삼 년째 이 일을 하는데 이렇게 짐이 작은 학생은 처음이에요. 고맙습니다.”
딱히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왕님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선지는 그럼에도 사무적인 태도를 잊지 않았다.

“빗이나 칫솔은 갖고 가도 상관은 없는데 무상으로 지급됩니다. 로션이나 샴푸 같은 것도요. 책은 갖고 들어가도 되고요. 하지만 시계는 안 돼요. 전자제품은 무조건 금지거든요.”
“건전지로 작동하는 거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할 수 없죠, 뭐. 이거 보낼 때 배송료 내야 하나요?”
“그럴 리가요. 그 정도는 학교측에서 해드립니다. 여기까지 힘들고 갖고 온 걸 빼앗는 것도 미안한데 돈까지 물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자, 배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선지는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손을 뻗어 배를 가리켰다. 결국 왕님의 소지품 검사가 가장 짧게 끝났고 압수 품목도 전자시계 하나로 가장 적었다. 다른 아이들은 별종을 본다는 듯한 눈길로 배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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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괜히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걱정과 불안을 다 뱉어내고 싶다는 듯이. 그리고 그 자리엔 짜고 습한 바닷바람이 가득 들어찼다. 숨을 내쉬어도 하얀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왕님은 벗어 놓은 목도리를 내려다보며 괜히 가져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연 제주도다 싶었다. 왕님이 고향 강원도에서 느끼는 겨울의 시작은 늘 눈과 하얀 입김이었는데, 한겨울인 2월임에도 제주도는 바람이 세게 불어서 차게 느껴지는 것만 빼면 겨울 같지도 않았다. 여기서라면 추위 걱정 없이 편하게 삼 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했다. 하지만 여름은 어쩌지?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최고의 관광지 제주에서 맞는 여름이니까 어떻게든 즐겁게 보낼 수 있겠지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벌써부터 오지도 않은 더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따뜻한 아열대의 겨울을 만끽하면 된다.

멀리서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학생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일렬로 줄을 서세요, 하고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손짓을 해가며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누가 어깨를 툭 치길래 돌아보니 승합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조지란이다. 제주도에 와서 처음 만났지만 몇 마디 주고받다가 금방 친해졌다. 하긴 여기 있는 아이들 모두 옆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함께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야 할 상대들이니 얼른 마음을 열고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여왕님아, 내 짐 하나만 들어줄래?”
지란은 바퀴 달린 여행 가방에 숄더백에 트렁크에 더플백 비슷한 것까지 무려 네 개의 짐을 승합차 짐칸에서 내려놓고는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뭘 이렇게 많이 싸왔어? 안내 책자에는 짐은 최대한 간소하게 가져오라고 했잖아. 웬만한 건 학교에서 다 준다고…….”
“이거 거의 다 옷이야. 아무리 다 준다고 해도 옷은 교복이랑 체육복 그런 거밖에 안 줄 거 아냐. 글구 난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불이랑 베개도 따로 챙겨왔어.”
“아, 그러세요…….”

왕님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더플백을 들어 어깨에 울러멨다. 지란은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여행 가방을 끌고 앞장섰다. 돌돌돌 바퀴가 시멘트 바닥 위를 구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사실은 저래 보여도 어느 사장님이나 고위공무원의 따님이 아닐까. 왕님은 지란의 등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좁은 등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지란의 정체를 써놓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부터 이들이 향하는 학교는 예사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영화궁(永華宮) 고등학교. 그 이름만 놓고 보면 아무런 수식어가 없어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이자 국제계열 특수목적 고등학교인 데다가 오직 여학생만 입학이 가능한 사실상의 여고다. 재단법인 영화궁 재단이 설립하고 세계 100대 기업에 드는 한국 기업인 태북그룹이 후원하여 만든 이 학교는 개교한지 이제 팔 년째이지만 기업가와 정치가의 여식과 전세계에서 온 유학생 및 교포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입학금 및 수업료, 기숙사비 등 납입해야 할 금액이 일반 고등학교의 열 배가 넘는 속칭 귀족학교이지만 공모전 입상자나 성적 우수자를 무료로 받아들이는 장학생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가히 국내 최고의 인재 집합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학교를 세상에 알린 이유는 학교 자체의 특이함 때문이었다. 제주도 서쪽 해상의 섬 위에 자리잡았다는 지리적인 독특함이 개교 당시부터 세간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고, 태북그룹의 3세들-물론 그 중에서 딸들-이 차례로 이 학교를 나와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제주도의 서쪽. 지도를 살펴봐도 별다른 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학교는 대체 바다 위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런 학교가 있기라도 한 걸까. 그저 학생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꿈꿔보는 환상의 학교가 아닐까.

왕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제주도의 서쪽에 있는 섬이라면 차귀도와 와도라는 섬이 지도에 나올 정도 크기이고 더 북쪽에는 비양도라는 섬도 있다. 그 외에는 혹시 지도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암초라면 모를까 딱히 다른 섬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들이 배를 타고 떠나려는 이곳은 그 두 섬의 중간 정도 되는 위치의 작은 항구였다. 관광지도 아니고 작은 고기잡이 배 몇 척만 정박되어 있는 정말 작은 항구로 주위는 계단형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약간 떨어진 해안에는 수산종묘 배양장이 보였다. 왕님은 조그만 여행용 제주도 지도를 펼쳐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섬이 어디에 있다는 걸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가 있을 정도의 섬이면 마을까지는 아니어도 집과 항구가 있는 제법 큰 섬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차귀도까지 가는 거라면 자동차로 더 남쪽까지 가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편할 테고 말이다.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 곧, 지란의 말 대로라면 10분도 안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왕님은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속으로 셋을 센 후 떴다.

눈을 감은 순간 지나간 세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계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후 왕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풍을 가는 듯 떠들썩하고 즐거운 아이들의 무리에 끼여서 그 자신도 지지 않을 미소띤 얼굴을 한 채로 배를 향해 걸어갔다. 항구에서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얗고 납작한 수상 버스는 고즈넉한 시골의 항구 풍경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수묵으로 그린 풍경화 한 구석에 조악하게 붙여넣은 UFO 그림처럼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학생들을 안내하는 여성은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지만 작은 체구에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라 멀리서 보면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의 화장이 진하고 하의가 바지인 양복을 입고 있어 가까이에서 보면 확실히 학생보다는 교사라는 인상이었다. 수상 버스 안에도 운전수 말고 또 한 명의 여성이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어 이것이 유니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 상의에 사진이 박힌 이름표를 달고 있고 허리엔 무전기를 차고 있어서 할인점의 보안요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만큼 가까이에 모였다고 판단하자 평소에 내는 정도의 성량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 배에 타기 전에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하도록 하겠어요.”
순식간에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소지품 검사라니 무슨 소리야? 여기가 무슨 극기훈련장인가? 뭘 압수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설마, 술이나 담배가 있나 검사하려는 거겠지. 소녀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생각을 여과없이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 속을 흐르는 하나의 공통된 생각은 있었다. 신입생으로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기숙사로 가는데 무슨 소지품 검사가 필요하냐는 의문과 불만, 그리고 약간의 불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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