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조용히 하세요. 여러분들이 협조를 잘 해주셔야 빨리 기숙사로 들어가서 쉴 수 있습니다. 늦어도 저녁식사 시간 전에는 각자의 방을 배정받아야 하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요. 제 앞에 있는 사람부터 여기 책상 앞에 두 줄로 서세요. 각자 가지고 온 짐을 다 갖고 계세요. 혹시 차에 두고 내린 것이 없나 지금 다시 확인하세요.”

아까는 신경도 쓰지 않아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항구 한 복판에 가로가 긴 책상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도 없이 책상만 있어서 뜬금없어 보였는데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소녀들은 투덜대고 소근대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책상 앞에 두 줄로 늘어섰다. 덕분에 왕님은 지란의 짐을 돌려줄 수 있어서 홀가분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자신이 가진 가방이 가장 작은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최소한 옷가방 하나 이상이었고 자기처럼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온 사람은 없었다. 다들 해외여행을 가는데 혼자만 소풍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떤 아이는 뭐가 없다면서 헐레벌떡 승합차로 뛰어가고, 다른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직 도착 안 했어. 지금 항구 비슷한 곳에 왔는데 무슨 소지품 검사를 한대……’ 라면서 엄마로 보이는 상대와 휴대폰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편 승합차 운전을 했던 여성과 수상 버스에 타고 있던 운전수를 포함한 두 사람까지, 모두 네 사람의 직원이 소녀들이 선 줄 맨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 똑같은 짙은 회색 양복에 검은 구두 차림이고 이십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둘씩 나누어 줄의 앞에 있는 책상의 뒤에 섰다. 한 사람은 서류철 비슷한 것을 집어들었고, 다른 한 사람이 손을 내밀며 맨 앞에 선 아이에게 말했다.

“자, 갖고 온 짐을 전부 이 책상 위에 올려 놓으세요.”

아이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이 들어 쭈볏거리면서도 결국은 시키는 대로 했다. 젊은 여성들은 빠르고 능숙한 손길로 가방을 열고, 핸드백을 열고, 트렁크를 열고 안에 든 것을 다 꺼내어 헤집어 놓았다.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저 어, 어, 하고 염려섞인 탄식만 할 뿐이었다. 그들의 눈길은 날카롭고 손길은 재빠르며 판단은 정확했다.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손에는 휴대폰, MP3플레이어, 노트북, 고데기, 화장품, 술병, 담배, 잡지, CD 등 부적절한 물품들이 걸려나왔다. 입학 안내 책자에서 반입 금지라고 못박아놓은 품목들이었다. 직원들은 가차없이 압수한 후 서류에 이름과 물품명을 기입하고는 집으로 반송할 거라고만 말한 후 책상 옆에 있었던 플라스틱 통 안에 던져 넣었다. 아이들은 울상이 되어서 부탁하고 사정하고 화를 내기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지란의 차례가 되었다. 직원들은 가장 많은 짐을 갖고 온 지란을 보며 반쯤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란은 기세에 눌릴세라 어디가 어때서! 라고 외치는 듯 일부러 건방진 표정을 만들어서 맞섰다. 가방을 연 단발머리 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쑥씹은 표정으로 지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과자들을 말이죠…… 꼭 갖고 가야 겠어요?”
아까 왕님에겐 옷과 이불이라더니, 짐의 반이 과자며 초컬릿이며 사탕에 캔디였다. 그런데도 왜소한 체구라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바로 뒤에 있던 왕님은 그 광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우와! 외국 과자들도 잔뜩 있네. 난 저런 거 처음 봐.”
“그치? 이건 영국 것이고 이건 일본…… 난 싸구려 과자는 안 먹거든.”
지란은 씩 웃으며 왕님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리곤 다시 건방진 표정으로 안면을 전환하고는 직원에게 따졌다.

“저기요. 안내 책자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과자를 갖고 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거든요? 내가 제주도 구석에 처박혀서 무슨 즐거움으로 살겠어요? 고작 과자나 먹으면서 외로움을 달래겠다는데 그게 안 된단 말예요? 아니지, 고작은 아니에요. 이거 다 외국 과자거든요. 이중에 엄청 비싼 것도 있어요. 이 초컬릿 박스, 이건 휘트먼스(Whitman's)에서 나온 건데 24가지의 다른 재료를 넣은 초컬릿 모음이라고요. 가격이 봐요, 19.99달러. 25000원은 한다고요. 더구나 이건 우리나라에 팔지도 않아서 배송료 따지면 훨씬 비싸겠죠?”

“잠깐만요, 학생. 저희는 지금 과자가 비싸고 안 비싸고, 귀하고 안 귀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안내 책자에는 학업과 관계 없는 물품의 반입을 금지하며 이를 압수하여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그런 주의사항에 동의를 했다는 의미이고요. 따라서 이건 전부 압수입니다.”
“네? 말도 안 돼! 이런 법이 어딨어! 내가 지금 무슨 교도소에 오는 것도 아니고!”

지란이 불평불만을 토로하든 말든 직원들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계속 했다. 그들은 지란이 가져온 외출복, 파자마, 속옷 할 것 없이 옷이란 옷은 전부 압수했고, 베개와 이불마저 알레르기 어쩌고 하는 핑계를 깨끗이 무시하고 압수했다.

“저희가 제공하는 침구는 위생적으로 세탁하고 살균처리를 할 것입니다. 전염의 가능성이 있는 병이 아니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요. 만약 그래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전속 의사가 있으니 언제라도 진찰을 받으세요.”

단발머리의 직원은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지란의 짐을 정리했다. 워낙 시간이 많이 걸려서 옆 줄은 벌써 다 끝나가고 마지막 학생이 검사를 받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그 뒤로 이동해서 다시 두 줄의 길이가 비슷해지자 왕님의 차례가 되었다.

작은 가방 하나. 안에 든 것도 머리빗, 칫솔, 핸드 크림, 로션, 멀미약, 탁상시계,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단발머리의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띤 얼굴을 왕님은 처음 보았다. 그의 가슴에 붙은 명찰에 손선지라는 이름이 보였다. 선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삼 년째 이 일을 하는데 이렇게 짐이 작은 학생은 처음이에요. 고맙습니다.”
딱히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서 왕님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선지는 그럼에도 사무적인 태도를 잊지 않았다.

“빗이나 칫솔은 갖고 가도 상관은 없는데 무상으로 지급됩니다. 로션이나 샴푸 같은 것도요. 책은 갖고 들어가도 되고요. 하지만 시계는 안 돼요. 전자제품은 무조건 금지거든요.”
“건전지로 작동하는 거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할 수 없죠, 뭐. 이거 보낼 때 배송료 내야 하나요?”
“그럴 리가요. 그 정도는 학교측에서 해드립니다. 여기까지 힘들고 갖고 온 걸 빼앗는 것도 미안한데 돈까지 물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자, 배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선지는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로 손을 뻗어 배를 가리켰다. 결국 왕님의 소지품 검사가 가장 짧게 끝났고 압수 품목도 전자시계 하나로 가장 적었다. 다른 아이들은 별종을 본다는 듯한 눈길로 배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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