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버스는 천장이 낮아 들어가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사실은 여고생 정도의 키는 서있어도 머리가 닿지 않지만, 낮아 보인다는 인상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것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대부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시선을 옮기니 한쪽 구석 창가자리에 팔짱을 끼고 토라진 모습으로 앉은 지란이 보였다. 왕님은 말없이 옆자리에 앉으며 “아, 좋다!” 하고 외쳤다. 지란이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좋기도 하겠다. 짐이 작아서.”
“그러게 어차피 필요없는 물건은 안 갖고 오면 좋았잖아.”
“야, 설마 무슨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소지품 검사를 해서 다 압수할 줄 누가 알았겠니? 여기 있는 애들 전부 휴대폰이랑 사복은 기본으로 챙겨왔을 텐데 그걸 다 빼앗겼으니 이제 무슨 낙으로 살아?”
“하긴. 요즘 애들은 휴대폰 없으면 물 없는 고기처럼 안절부절 못하니까…….”
“앗쭈, 여왕님아는 요즘 애들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 넌 휴대폰 없어?”
잠시 틈을 두고 생각했지만, 여왕님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은 없어.”
“진짜?”
“진짜.”
“진짜 정말?”
“진짜 정말!”
“진짜 진짜 정말?”
“진짜 진짜에 정말 참말이다!”
“……신기하네.”
“뭐가 신기해?”
“정말 오늘 처음 만났지만 너처럼 신기한 애는 처음 봤어.”
“난 네가 더 신기하다!”

때리는 시늉을 하자 지란은 그제야 찌푸린 표정을 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둘이는 그렇게 잠시 웃다가 숨을 골랐다. 어느덧 검사가 끝나고 모든 아이들이 수상 버스에 올라타자 직원들은 압수품을 담은 플라스틱 통을 승합차에 담은 후 두 사람은 차에 남고 두 사람은 배로 돌아왔다. 한 사람은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다른 사람, 손선지는 다시 관광 가이드 모드로 돌아가 조수석 옆에 선 채로 안내 멘트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배를 타고 약 오 분 정도 떨어진 영화궁 고등학교에 도착할 겁니다. 그곳에 가게 되면 가장 먼저 자기가 살게 될 방 번호를 배정받고 기숙사로 이동합니다. 그 다음엔 저녁식사를 하고 학교와 기숙사 생활에 대한 안내를 포함한 신입생 간담회가 있을 예정이니……”

멍하니 푸른 바다에 정신을 빼앗긴 왕님의 손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상대적으로 손발이 찬 왕님에게는 더욱 더 따뜻하게, 차가운 바닷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지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과 손목을 주물럭거리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지란이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같은 반 되었으면 좋겠다. 너만 보고 있어도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아.”
“그러게.”

손을 맞잡으며 대답하곤 의자에 머리와 등을 기대었다. 이대로 한숨 더 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항해는 차로 이동했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짧았다. 눈을 좀 감았나 싶었는데 벌써부터 여자애들의 우와, 와아 하는 성가신 아우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뭔데 그리 호들갑인가 싶었는데 지란도 창가에 얼굴을 붙인 채로 저것 좀 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바다 한 가운데에 불쑥, 학교가 나타났다. 검은 바위와 잿빛 방파제, 한가로이 떠있는 고깃배를 연상했던 여왕님도 망연자실, 그저 눈앞의 비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나무나 수풀 비슷한 초록색 덩어리들도 점점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공중정원도 아니고, 물 위에 건물이 떠 있을 수는 없는 거다. 소녀들은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머릿속에서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면서 바라보고는 있지만, 이것 역시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답은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섬의 진짜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 섬은 수면에서 십 미터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낮고 평평한 땅이었다. 그리고 섬의 전모가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싼, 섬보다는 좀 더 높아서 태풍이나 파도를 막아주는 인공 방파제 때문이었다. 사실은 섬 자체가 인공으로 만든 구조물이기 때문에 높이가 일정하게 평평한 것이었고, 따라서 멀리서 보면 건물만 바다 위에 불쑥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 리가 없는(안내 책자에는 간략한 섬의 모습이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아이들은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바다 위에 만든 인공섬.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공간. 오직 고등학교만이 존재하는, 학교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이를 위해서 얼마나 막대한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을지, 소녀들은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굳이 아무것도 없는 제주도 서쪽 해상에 이토록 거대한 인공섬을 만들었을까. 그저 대외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특이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나 무모한 시도였다. 아무리 세계적 재벌인 태북그룹이라지만 말이다. 그룹 휘하엔 건설회사도 있으니 만드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투자-후원이라는 이름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입학식조차 치르지 않은 학생들이 추측하기에는 일렀다. 지금은 그저 그 규모와 웅장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이 섬과 학교에 대해 소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경의의 표시요 첫인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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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이 2009-07-2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필자2님, 안녕하세요. 4회까지 단숨에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벌써 중독될 것 같아요.

pilza2 2009-07-24 2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실은 몰아서 읽으시길 권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