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콘크리트로 만든 선착장을 지나 드디어 섬으로 들어섰다. 그렇지만 인공섬이라서 그런지, 해안의 모래밭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땅은 보도블럭과 대리석으로 만든 경계석 너머의 화단, 그리고 미관을 위해 깔아놓은 듯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잿빛 현무암이 보였다.
왕님은 걸음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바람에 녹아들어 있는 것은 바다의 냄새만이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꽃의 향기, 풀과 나무의 숨결이 섞여 있었다. 꽃 모양의 섬을 상상해서일까 생각했는데 섬 안으로 들어올수록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교문을 대신해서 놓은 듯한, 조각과 같은 인위적인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현무암 덩어리 두 개가 보도의 양 옆에 인왕처럼 버티고 있었고 그 너머 세상은 수벽(樹壁)으로 나뉘어진 자수화단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로크식 정원 특유의 기하학적이고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화원이었다.
아른한 향기와 아름다운 광경에 취했는지 발걸음이 느려지며 일행에서 뒤쳐진 왕님을 보고 지란이 가볍게 불렀지만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 걸 보아서 단단히 빠져든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조금 떨어진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키작은 소녀와 그만 부딪히고 말았다. 커다란 인조가죽제 옷가방을 양손으로 들고 끙끙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걷던 소녀는 비틀거리다 보도블럭 위로 넘어졌다. 지란이 놀라며 한달음에 달려왔고 왕님도 얼른 부축을 하며 물었다.
“괜찮니?”
“아, 예. 괜찮……아요.”
“미안해. 내가 잠깐 정신을 다른데 팔고 있어서.”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듭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일어나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털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색이 조금 짙고 눈과 코끝이 둥그런 것이 동양인이긴 해도 평균적인 한국인과는 꽤 다른 느낌이었다. 왕님은 저도모르게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것이 실례라는 걸 깨닫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지란이 쫓아와 가방에서 쏟아진 책을 주워담는 걸 보고 뒤늦게 도와주었다.
“여왕님아, 뭘 보고 있었길래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어?”
“응? 여기, 너무 아름답잖아.”
“쳇. 아름다우면 뭘 해. 어차피 학교인 걸. 우리가 경치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아니고, 결국 살다보면 금방 지겨워질 걸. 그보다 빨리 담기나 해. 근데 세상에, 이게 다 책이야?”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의 정체는, 터져나갈 듯 가득 담긴 책 덩어리 자체였다. 하지만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집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수십 권의 책 거의 다가 낡고 해진 소설이었다. 더구나 왕님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살인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표제. 그 외에도 로봇, 마법사 같은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검은 피부의 소녀는 그의 시선이 닿은 책을 집어들고 말했다.
“이건 『그린 살인 사건』이에요. 반 다인의 대표작 중 하나죠. 내용 초기에 범인과 범행 동기까지 다 알려주는데도 처음 읽는 사람 대부분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버리게 만드는 점이 굉장한 작품이죠.”
여리고 갸날프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소녀의 입에서는 살인이나 범인 같은 낱말이 아무렇지도 앟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란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을 대하듯 쳐다보았다.
“아니 고등학교에 오는데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갖고 와? 그것도 소설책을……”
과자에 이불까지 싸가지고 왔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간지럽혔지만 왕님은 억지로 꿀꺽 삼켜야만 했다. 소녀는 입만 살짝 움직여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도서관이 크기는 크지만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서량이 많지 않다고 들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읽는 책은 추리소설이 대부분이고 SF와 판타지를 조금 읽고 있어서, 고등학교 도서관엔 아무래도 많지 않을 것 같아서 조금 챙겨 왔죠. 아직 안 읽은 것도 많아요.”
소설이라고 해도 교과서에 실린 것을 제외하면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은 하이틴 로맨스나 빌려 읽는 정도인 지란에게는 감탄보다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독서광은 야구광이나 인형 수집광에 못지않게 낯설고 기묘한 존재였다. 그래서 오타쿠에 해당하는, 특히 컴퓨터 쪽에 몰두하는 사람을 영어로는 괴짜라는 뜻의 geek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대단하다, 대단해. 오늘 대단한 애들을 많이 보네. 과연 그 유명하다는 영화궁 고등학교야. 아무나 올 곳이 못되는 모양이야. 그런데 너…… 미안하지만 한국인이니?”
지란의 질문은 상대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실례가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아니오. 전 유학생이에요. 국적은 인도지만 다람살라에서 나고 자란 장족(藏族)이에요.”
그 대답을 듣자 왕님은 소녀를 보며 받았던 이질적인 인상의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외모도 그랬고, 일부러 힘을 주어 또박또박 하는 발음도 그랬으며, 무언가 몸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스웨터에 검은 바지, 운동화 차림이라 겉모습은 우리나라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목에 두른 직조 목도리와 팔찌가 이국적인 느낌을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자 소녀는 더 잘 보라는 듯 팔을 들었다. 왼팔에만 세 개의 팔찌를 달고 있었는데 재질이 다른 듯 했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나는 염주처럼 색색의 구슬을 꿰었고, 다른 하나는 금속 재질이고, 나머지 하나는 목재인데 티벳의 문자가 깨알처럼 새겨져 있었다. 소녀는 오른손을 들어 점자를 읽듯 검지로 팔찌를 쓸었다.
“옴마니밧메훔을 새겨놓은 팔찌예요. 할머니의 선물이죠. 이 육자진언은…… 음, 설명하기가 힘들다. 우리 티벳 사람들은 늘 말하고 갖고 다니는 경문이에요. 불교의 나무아미타불이나 기독교의 아멘과 비슷하다고 하면 알겠죠?”
“아, 그래…….”
지란의 목소리는 별로 흥미가 없지만 이야기에 동참은 해주마 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보다 지란의 흥미는 다른 쪽에 있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 학교에 들어왔니? 가만,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걸으면서 얘기하자. 자, 뭐하니, 여왕님아야는 가방을 같이 들어주고, 너도 우리랑 또래일 텐데 말 놓아도 돼. 넌 이름이 뭐니?”
“체링이라고 부르세요. 이름은 체링 룽계 족첸인데 한국사람들은 길어서 부르기 어려운가 봐요. 그리고 말은 다른 것을 배우지 않아서…….”
“체링? 귀여운 이름이네! 우리말도 잘 하고. 어려울 게 어딨어. 그냥 말끝의 ‘요’자만 떼면 돼.”
어느새 자연스레 왕님과 체링은 가방의 손잡이를 하나씩 나누어 잡고 나란히 걸었다. 지란은 그 주위를 맴돌며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몸 대신 입으로 일하는 사람, 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듯한 모습에 왕님은 절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