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괜히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걱정과 불안을 다 뱉어내고 싶다는 듯이. 그리고 그 자리엔 짜고 습한 바닷바람이 가득 들어찼다. 숨을 내쉬어도 하얀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왕님은 벗어 놓은 목도리를 내려다보며 괜히 가져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연 제주도다 싶었다. 왕님이 고향 강원도에서 느끼는 겨울의 시작은 늘 눈과 하얀 입김이었는데, 한겨울인 2월임에도 제주도는 바람이 세게 불어서 차게 느껴지는 것만 빼면 겨울 같지도 않았다. 여기서라면 추위 걱정 없이 편하게 삼 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했다. 하지만 여름은 어쩌지?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최고의 관광지 제주에서 맞는 여름이니까 어떻게든 즐겁게 보낼 수 있겠지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벌써부터 오지도 않은 더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따뜻한 아열대의 겨울을 만끽하면 된다.

멀리서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학생들을 불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일렬로 줄을 서세요, 하고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손짓을 해가며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누가 어깨를 툭 치길래 돌아보니 승합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조지란이다. 제주도에 와서 처음 만났지만 몇 마디 주고받다가 금방 친해졌다. 하긴 여기 있는 아이들 모두 옆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 함께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야 할 상대들이니 얼른 마음을 열고 지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여왕님아, 내 짐 하나만 들어줄래?”
지란은 바퀴 달린 여행 가방에 숄더백에 트렁크에 더플백 비슷한 것까지 무려 네 개의 짐을 승합차 짐칸에서 내려놓고는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뭘 이렇게 많이 싸왔어? 안내 책자에는 짐은 최대한 간소하게 가져오라고 했잖아. 웬만한 건 학교에서 다 준다고…….”
“이거 거의 다 옷이야. 아무리 다 준다고 해도 옷은 교복이랑 체육복 그런 거밖에 안 줄 거 아냐. 글구 난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불이랑 베개도 따로 챙겨왔어.”
“아, 그러세요…….”

왕님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더플백을 들어 어깨에 울러멨다. 지란은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여행 가방을 끌고 앞장섰다. 돌돌돌 바퀴가 시멘트 바닥 위를 구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사실은 저래 보여도 어느 사장님이나 고위공무원의 따님이 아닐까. 왕님은 지란의 등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좁은 등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지란의 정체를 써놓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부터 이들이 향하는 학교는 예사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영화궁(永華宮) 고등학교. 그 이름만 놓고 보면 아무런 수식어가 없어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이자 국제계열 특수목적 고등학교인 데다가 오직 여학생만 입학이 가능한 사실상의 여고다. 재단법인 영화궁 재단이 설립하고 세계 100대 기업에 드는 한국 기업인 태북그룹이 후원하여 만든 이 학교는 개교한지 이제 팔 년째이지만 기업가와 정치가의 여식과 전세계에서 온 유학생 및 교포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입학금 및 수업료, 기숙사비 등 납입해야 할 금액이 일반 고등학교의 열 배가 넘는 속칭 귀족학교이지만 공모전 입상자나 성적 우수자를 무료로 받아들이는 장학생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가히 국내 최고의 인재 집합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학교를 세상에 알린 이유는 학교 자체의 특이함 때문이었다. 제주도 서쪽 해상의 섬 위에 자리잡았다는 지리적인 독특함이 개교 당시부터 세간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고, 태북그룹의 3세들-물론 그 중에서 딸들-이 차례로 이 학교를 나와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제주도의 서쪽. 지도를 살펴봐도 별다른 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학교는 대체 바다 위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런 학교가 있기라도 한 걸까. 그저 학생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꿈꿔보는 환상의 학교가 아닐까.

왕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제주도의 서쪽에 있는 섬이라면 차귀도와 와도라는 섬이 지도에 나올 정도 크기이고 더 북쪽에는 비양도라는 섬도 있다. 그 외에는 혹시 지도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암초라면 모를까 딱히 다른 섬이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들이 배를 타고 떠나려는 이곳은 그 두 섬의 중간 정도 되는 위치의 작은 항구였다. 관광지도 아니고 작은 고기잡이 배 몇 척만 정박되어 있는 정말 작은 항구로 주위는 계단형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약간 떨어진 해안에는 수산종묘 배양장이 보였다. 왕님은 조그만 여행용 제주도 지도를 펼쳐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섬이 어디에 있다는 걸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가 있을 정도의 섬이면 마을까지는 아니어도 집과 항구가 있는 제법 큰 섬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차귀도까지 가는 거라면 자동차로 더 남쪽까지 가는 것이 훨씬 빠르고 간편할 테고 말이다.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 곧, 지란의 말 대로라면 10분도 안 걸리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왕님은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눈을 꼭 감고 속으로 셋을 센 후 떴다.

눈을 감은 순간 지나간 세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계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후 왕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풍을 가는 듯 떠들썩하고 즐거운 아이들의 무리에 끼여서 그 자신도 지지 않을 미소띤 얼굴을 한 채로 배를 향해 걸어갔다. 항구에서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얗고 납작한 수상 버스는 고즈넉한 시골의 항구 풍경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수묵으로 그린 풍경화 한 구석에 조악하게 붙여넣은 UFO 그림처럼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학생들을 안내하는 여성은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지만 작은 체구에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라 멀리서 보면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의 화장이 진하고 하의가 바지인 양복을 입고 있어 가까이에서 보면 확실히 학생보다는 교사라는 인상이었다. 수상 버스 안에도 운전수 말고 또 한 명의 여성이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어 이것이 유니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 상의에 사진이 박힌 이름표를 달고 있고 허리엔 무전기를 차고 있어서 할인점의 보안요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이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만큼 가까이에 모였다고 판단하자 평소에 내는 정도의 성량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 지금부터 배에 타기 전에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하도록 하겠어요.”
순식간에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소지품 검사라니 무슨 소리야? 여기가 무슨 극기훈련장인가? 뭘 압수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설마, 술이나 담배가 있나 검사하려는 거겠지. 소녀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생각을 여과없이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 속을 흐르는 하나의 공통된 생각은 있었다. 신입생으로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기숙사로 가는데 무슨 소지품 검사가 필요하냐는 의문과 불만, 그리고 약간의 불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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