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식당과 그에 인접한 매점은 제법 많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은 2월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 많다는 느낌인데, 현재 재학생들은 신입생과 마찬가지로 거의 매일같이 수 명에서 십 수 명씩 학교측에서 제공하는 수상 버스를 타고 학교로 복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봄방학은 2월 말일까지이기 때문에 미리 올 의무는 없지만, 학업 준비나 기숙사를 정돈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재학생 대부분은 이미 학교에 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비좁은 학교에서 달리 갈 곳도 놀 장소도 없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몇 군데 되지 않는 TV가 있는 장소가 바로 식당이었기 때문에 이곳은 저녁때면 늘 장터처럼 떠들썩했다. 40인치는 넘을 듯한 큰 벽걸이 TV가 두 개, 그 외에도 기둥 옆을 비롯한 곳곳에 여러 대의 TV가 있어서 채널 경쟁은 생각보다 극심하지 않았다.
물론 채널 선택권은 상급생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가장 큰 벽걸이 TV는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나 쇼프로가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외의 작은 화면에서는 경쟁에서 밀려난 동시간대의 비인기 방송이 흐르고 있었고, 그 중에서 두 대 정도는 교내방송만이 나오도록 설정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식당 외부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누군가, 아마도 방송부원이겠지만, 지금 식당을 촬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점에 들어가면서 마트료나는 이 학교에 며칠이나마 먼저 온 사람으로서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 시간은 사람이 많아서 계산을 하려면 줄을 서야 하니까 한 명이 모아서 계산을 하는 것이 빨리 걸린다고.

“그럼 오늘은 내가 쏠게.”
지란이 호기 있게 말하며 자신의 학생수첩을 꺼내어 골든벨을 울리듯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마트료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손을 저으며 말리려고 했다.

“아니, 내 말은 꼭 그런 뜻은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오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서 말야. 즐겁게 해줘서 고맙다는 의미라고나 할까?”
“우리가 뭐 재롱이라도 부린 것처럼 말한다?”

옆에서 핀잔을 주자 지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그럼 다음 타자는 여왕님아다. 다음엔 님아가 쏘셔.”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체링은 그렇게 툴툴대는 왕님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잡고 반쯤 끌고 가듯이 했다. 세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지란이 온갖 과자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야, 마실 건 없어? 마실 거?”
“아 참. 깜박 했네. 마실 것은 님아가 좀 사와. 헤헤.”

혀를 살짝 내밀며 얼버무리자 왕님은 고래를 저으며 매점으로 향했다. 지란이 테이블에 과자를 쌓아놓고 자신의 과자 고르는 기준에 설명하고 있을 무렵 입구에 체육복을 입고 HDV 카메라를 든 여학생이 들어오자, TV에도 식당 내부의 모습이 비춰졌다. 신입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만 껌벅이고 있었지만 재학생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저녁때면 학생회관, 기숙사, 식당 등을 볼 면서 마구잡이로 영상을 찍는 방송부의 괴짜이자 유일한 3학년이 되었으니 명실공히 방송부의 에이스가 된 서활인. 그는 먹잇감을 찾는 야수의 눈동자를 카메라에 투영한 듯 식당 내부를 예리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TV에 그 영상이 생방송처럼 그대로 비춰지고 있음은 물론, 그가 중얼거리는 말도 해설처럼 함께 들리고 있었다.


활인 _ 이제 식당에 들어왔습니다. 오오,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는군요. 신입생입니다, 신입생.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신입생이 왔습니다! 이러니까 제가 무슨 장사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럼 이쯤에서 신입생들을 몇 명 붙잡고 인터뷰를 해봐야겠죠? 제가 누굽니까. 예쁜 신입생들만 찍습니다. 여기는 영화궁 교내TV! 영비에스~! 이거 썰렁하네요. 그냥 인터뷰나 하죠. 저기요! 잠깐만요! 잠깐…….

활인 _ 아유, 도망갔어요. 왜들 이렇게 카메라를 무서워하시나 그래. 설마 제 소문이 벌써 퍼진 것은 아니겠죠? 흐흐. 자, 이번엔…… 오, 여기 신입생 세 사람이 사이좋게 모여서 다과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주 파티를 하네요, 파티를. 잠깐만요!

지란 _ 안녕하세요? (웃으며 손을 흔든다)

활인 _ 네, 안녕하세요? 반갑게 맞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흑. 혹시 오늘 오셨어요?

지란 _ 저랑 얘랑 얘는 오늘 같이 왔고요. 얘는 며칠 전에 왔는데 오늘 만나서 친해졌어요.

활인 _ 그러세요. 저는 방송부의 촬영걸 서활인이라고 하는데요, 잠시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지란 _ 네,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다)

활인 _ 감사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모습! 역시 풋풋한 신입생의 모습은 이거죠!

지란 _ 와! 저쪽 TV에 내 얼굴이 나오네요?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웃는다)

활인 _ 그럼요. 이 학교 장비, 최신식으로 빵빵하답니다. 이 참에 방송부에 오실 생각 없으세요? 촬영도 하고요, 라디오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해요. 연극부나 영화부랑 손잡고 연기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그래요.

지란 _ 야, 대단하네요. 하지만 전 이미 다른 부서에 들어가려고 생각했는데…….

활인 _ 할 수 없죠 뭐, 흑흑입니다. 참 내 정신 좀 봐. 인터뷰를 해야지. 어디서 오셨어요. 참, 간단히 이름이랑 자기소개를 좀.

지란 _ 네. 저는 조지란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왔어요.

활인 _ 제주도의 공기는 어떤가요? 서울에 비하면 안 춥죠?

지란 _ 그렇네요. 근데 바람이 뭐랄까, 눅눅하다고 해야 하나, 공기도 그렇고 확실히 섬이라서……

활인 _ (말을 끊으며) 오! 여기 이쪽! 잠깐만 일어서 주세요!

마트료나 _ 네? 저, 저요?

활인 _ 예! 우리나라분이세요?

마트료나 _ 아, 아직 국적은 러시아지만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서, 곧 귀화를 할 생각인데요…….

활인 _ 잠깐만 일어나 봐요. (카메라를 들지 않은 손으로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킨다) 이름이 뭐예요?

마트료나 _ 마트료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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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님은 끓어 넘칠 듯한 분노를 억누르려 주먹을 꽉 쥐었지만 얼굴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자근자근 씹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내 이름 웃긴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되는 거 같은데, 도정아?”
“뭐? 뭐, 뭐라고?”

도정, 아니 정은 예상도 못한 상대의 반격에 웃음을 그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그렇게 맞받아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듯 했다.

“네 이름이 북도정이잖아. 그러니까 도정이지.”
“뭐? 너 바보니? 내가 어디 집안 사람인지 모르는 거야?”
“알지. 세상 무섭고 법 무서운 것도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정도는. 그렇다고 우리가 널 아가씨라고 불러줄 리 없다는 건 너도 알 테고.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너도 우리랑 똑같은 동급생이니까, 앞으론 도정이라고 부를게. 잘 지내자, 도정아.”

도정이 된 정의 얼굴은 카멜레온 정도가 아니라 별을 먹은 슈퍼마리오처럼 붉으락푸르락 번쩍번쩍 했다. 친구가 놀림감이 된 것에 혼자 분을 삭이던 지란은 반격의 기회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배를 잡고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이며 웃어대었다.

“하하하! 난 실례 안 하고 웃을게! 도정이가 뭐야 도정이가! 아하하하하!”
“도정(搗精)이라면 곡식의 낱알을 찧어 껍질을 벗기는 일이라고 하네요. 맞죠?”

체링이 주머니에서 작은 국어사전을 꺼내 펼쳐들고는 말했다. 웃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말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 왕님과 마트료나까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체링은 이유도 잘 모른 채 친구들이 웃으니까 따라 웃었고, 회의실 안은 네 명의 웃음소리로 금세 떠들썩해졌다. 반면 맞은편의 세 사람은 분노와 창피함을 곱씹고 있을 뿐이었고.

아이들은 절반쯤 회의실을 나갔지만 아직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콧대 높은 재벌가 따님이 놀림감이 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런 수모, 이런 창피라니. 겪어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만은 싫었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도정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몸을 홱 돌렸다.

“잘 지내자고? 얼마나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보겠어.”

그렇게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기더니 반쯤 걷고 반쯤 뛰듯 하면서 회의실 문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두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밀치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친위대의 도움으로 병목 현상을 무시하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도 귀한 집 따님다워 보였다.

“어딜 감히 사람을 깔보고…… 매운맛 좀 봤겠지?”
왕님이 한결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씩씩거리며 웃음을 뱉어내던 지란이 한 마디 보태었다.

“야, 조만간 이거 전교에 퍼질 것 같아. 내가 장담할게. 쟤 이름은 사흘 내로 도정이가 될 거야. 태북그룹 3세, 그 이름은 도정이! 아우 웃겨, 내 배, 내 배 살려…….”
“이름이나 생긴 걸로 사람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겠지.”
“맞아, 맞아. 나도 맨날 지랄이라고 불리면서 내가 뭘 해도 지랄한다고 놀려대서 말야.”
“글쎄, 이름만 가지고 그렇게 불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너도 별로 싫어하는 기색도 없고.”
“야, 너까지 그러기야?”

지란이 덤벼들어 팔로 목을 조르고 두 다리로 허리를 감았다. 둘은 서로 붙잡고 밀고 당기고 했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그렇고 본인들도 전혀 싸우는 모습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저 껴안고 장난치는 정도였는데, 그렇게 둘이서 깔깔대며 놀다가 지쳤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쯤엔 어느새 회의실에 그들 네 사람만 남은 상태였다. 열린 문틈으로 채향이 얼굴만 내밀며 말했다.

“너희들 나올 때 불 끄고 나와라. 문은 안 잠궈도 돼.”
“네.”

마트료나가 대표로 대답을 하자 얼굴이 사라졌다. 헐레벌떡 나와서 주위를 살피니 복도 저편에 멀어지는 채향과 한송이 교장의 모습이 보였다. 교장은 아직도 채향의 허리춤을 껴안고 있었는데 꽤 추워하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들썩이며 재채기를 했다.

“잇치!”
“추우세요, 교장 선생님? 어머, 이것 좀 봐. 콧물이 흐르잖아요!”
“응, 응.”

철부지 아이처럼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자 채향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코를 꼼꼼하게 닦아주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콧물을 흘리면 체면이 서겠어요? 손수건 드린 거 어쨌어요?”
“잊어버린 거 같애.”
“제가 뭐랬어요. 손수건이랑, 휴지랑, 약은 꼭 챙기라고…… 어제 드린 감기약 드셨어요?”
“……아니.”

진흙 속을 파고들어가는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목소리. 채향은 짐짓 화가 난 듯 양손을 허리에 대고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안 되겠네. 예방접종 맞으셔야겠어요. 내일 맞으러 가는 거예요, 알았죠? 교장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서 콧물을 줄줄 흘리면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우리 교장 선생님은 코쟁이래요~ 하고 놀리면 좋겠어요?”
“그래도 주사는 싫어~!”

칭얼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은 멀어져갔다. 흡사 엄마와 딸을 보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지란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을 꼬면서 반쯤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아유~! 아무리 봐도 귀여워!”
“야, 떠들었더니 배고픈데 뭐 먹으러 가자.”

왕님이 그의 등을 쿡 찌르며 한 말이었다.


* * * * * * * * * *


영화궁 고등학교의 학생수첩은 그 이름과는 달리 PDA에 가까운 외형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학생에게 소지가 허용된 유일한 전자제품이기도 했는데,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가죽으로 된 커버를 열면 커버 안쪽엔 사진과 이름, 학번이 적힌 일반적인 학생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안에는 얇은 전자수첩이 들어 있다.
특수하게 주문제작을 한 제품인지, 뒷면에 새겨진 영화궁의 마크 이외에는 특별한 상표가 그려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표준의 이어폰 접속 단자와 전원 케이블을 연결하는 구멍 이외에는 어떤 버튼이나 입출력 포트도 없이 액정화면만이 자리하고 있다.
전원은 항상 켜진 상태이고 함께 지급된 전용 크래들에 꽂아서 충전하는 방식이며 모든 조작은 터치 패널인 화면에 직접 하도록 되어 있는데, 손가락 혹은 닌텐도DS처럼 수납된 플라스틱 펜을 꺼내어 누르거나 쓸 수 있다. 그 외형이나 크기, 쓰임새를 볼 때 애플의 아이폰(iPhone)과 가장 흡사하게 보였다.

이 학생수첩은 시계, 알람, 수업시간표, 출석 체크, 메모, 학교 측의 전달사항을 알리거나 교사들이 과제를 줄 때도 쓰이는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이 바로 식사를 하거나 물건을 살 때 전자화폐로 쓰인다는 점이다.
입학할 때 현금의 지참을 일체 금지한 이 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식사와 의복, 생필품을 무료로 지급(물론 어느 정도는 입학금 및 수업료에 포함되지만)하는데 대신 이 수첩을 단말기에 찍어서 수령했음을(혹은 제때 식사를 했음을) 확인해야 하며, 개인이 구매하는 매점, 이발소 같은 곳에서도 이것을 찍어 지불을 대신하게 되고, 학기가 끝나면 요금이 합산되어 가정으로 청구서가 날아가게 되는 방식이다.

이런 지불방식을 조지란은 놀이공원 같다고 표현했고, 여왕님 역시 테마 파크와 같은 느낌이 나는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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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이 서로 빨리 나가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문 앞이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에 여왕님과 조지란만은 구석에 앉은 여자아이를 향해 경쟁하듯 달려갔다. 그리고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강아지라도 본 듯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살짝 꼬집는 등의 애정 표현을 잔뜩 퍼부어주었다.

“어쩜, 귀여워! 귀여워!”
“안녕? 너 혹시 여기 입학하는 거니?”
“넌 이름이 뭐야? 난 조지란이라고 해.”
“난 여왕님이야. 본명이라고.”

아이는 두 사람의 공세에 휩쓸려 아아, 우우 정도의 소리밖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트료나와 체링이 어디 좀 보자며 어깨 너머로 비집고 들어오자 그들의 동작에 빈틈이 생겼고 간신히 아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어우…… 전 교장이에요…….”
“어머나? 이름이 교장이야? 이 학교에는 여왕도 있고 교장도 있고 별의 별 게 다 있네.”
“이름 가지고 사람 놀리지 마. 그러는 너는 이름이 지란이가 뭐냐?”
“알아, 알아. 내 별명 지랄인 거. 근데 얘, 너 이름이 교장이면 성은 뭐니?”
“잠깐만요, 학생들.”

그때 차갑고 무게 있는 목소리가 그들의 들뜬 수다를 착 가라앉혔다. 순간 난방이 꺼진 듯이 주위 공기가 싸늘해졌다. 모두들 손과 입을 멈추고 눈만 움직여 자신들의 뒤에 있는 깻잎머리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늦게 들어왔으니 모를 수도 있겠군. 다시 소개를 하지요. 우선 저는 교무주임이자 교장 선생님의 업무보조를 맡고 있는 관채향이라고 합니다.”

깻잎머리 선생님, 즉 관채향은 자기소개를 한 후 그 아이를 바라보며 지극히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 학생들을 위해 직접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소녀는 밝은 표정으로 채향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트라이앵글을 두드리듯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궁 고등학교의 교장 한송이입니다.”
“그래 안녀…… 뭐? 교오자앙?”

태연히 인사를 받던 왕님은 화들짝 놀라며 전염병 환자라도 본 듯 몸을 뒤로 확 젖혔다. 그 바람에 의자에 부딪혀 뒤로 넘어질 뻔 했는데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진 않은 지란이 붙잡아주는 바람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아무튼 어안이 벙벙하기로는 지란과 체링도 왕님에 못지않았는데, 그 아이, 아니 한송이 교장 선생님은 말을 마친 후 채향에게로 바짝 다가가서 살짝 껴안았다. 키 차이가 상당히 났기에 허리 아래를 안은 형상이었다. 채향은 얼어붙은 소녀들의 얼굴을 보곤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학생들도 모두 처음에는 놀라거나 믿지 않았으니까 걱정 말아요. 제가 간략하게 더 소개해드리자면 우리 교장 선생님께선 비록 연령은 어리지만 명석한 두뇌와 두터운 학식을 갖추신 분입니다. 저를 포함해 여기 있는 어느 누구라도 교장 선생님과 지식 및 지혜를 겨루어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점입가경이었다. 어린 아이에다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 단순히 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라 교장을 맡을 정도의 학식을 갖추었단 말인가? 말로는 쉽지만 교장이라는 직책이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맡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아직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의무교육은 어떻게 하나? 학력이야 머리가 좋으니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는 가능할 것이고, 석박사 학위도 선입견으로 평가에 불리할 수는 있어도 나이제한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크게 구애받는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경력과 연륜이 중시되는 교장이라는 직책을 그렇게 간단하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이 학교는 자사고이고 영화궁 재단에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니 교장 임명에 대한 권한은 이사회, 즉 재단쪽이 쥐고 있을 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생각해볼 수 있는 케이스는 이 아이가 이사장의 딸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인맥에 의해 주어졌다는 경우이다.
실질적으로 이사회가 학교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면 허울뿐인 교장 자리에는 누가 앉아 있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들에게 반항하거나 걸림돌이 되지 않을 어린아이가 최적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생각을 너무 깊고 심각하게 했던 모양이다. 등 뒤에서 풋, 하고 썩은 자두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왕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다분히 비웃는 듯한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난 공주님, 태북그룹 3세 북도 정이었다. 그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도도한 표정을 짓고는 미개인을 깔보는 듯한 태도로 마음껏 비웃고 있었다. 그의 뒤에도 두 명의 여자애가 서서 그를 흉내내는 듯 비슷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제법 빠른 시간에 친구를 사귀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만, 진실은 재벌가 영애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따라지들일 것이다.

왕님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무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귀티가 흐르고 고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도도한 재벌가 따님만 있었을 뿐이니, 지란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다들 떠받들어주는 것에만 익숙하다보니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배려 같은 걸 느끼는 감각이 퇴화되어버린 모습.

무시하고 가려고 했으나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눈빛과 마주치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딱히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름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원래 가볍게 비웃고는 쩔쩔매는 상대방을 놔두고 싸늘하게 등을 돌려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가려고 했던 북도 정은 그 상대가 돌연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깜짝 놀라며 일순 긴장하여 숨을 멈추었다. 설마 중학교 때 껌 좀 씹었던 아이를 잘못 건드린 걸까?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좀 어색하긴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자 잠깐이나마 겁을 먹었던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네가 북도 정이니? 만나서 반갑다. 난 여왕님이라고 해. 참고로 본명이고 순 한글이름이야.”
“여왕님? 그게 이름이라고? 풋! 실례지만 나 좀 웃을게. 호호호호…!”

그러더니 셋이서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이고 손으로 입을 가리는 등 내숭을 적절히 떠는 척 하면서도 실컷 비웃고 있었다. 순간 긴장했던 기색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듯이 아까보다 더 크게 깔깔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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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간담회는 서도(西島)에 있는 학생회관 건물 2층의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형식적인 행사이긴 했지만 입학식 이전에 하는 유일한 공식 행사기 때문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식당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손선지가 특별히 강조하며 말했었다. 그 내용은 섬에 처음 도착한 예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교장의 간단한 인사와 교무주임에 의한 학교의 소개, 기숙사를 비롯한 건물의 안내,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주의사항 같은 것을 전달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사람이 대회의실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8시 30분 정도 되어서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잡았던 손을 풀고 그 자리에 선 채로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왕님이 총대를 매야겠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손등으로 커다란 문을 똑똑 두드렸다. 회의실 문은 커다란 데다가 방음의 목적인지 음악실처럼 가장자리 외에는 인조가죽을 덧씌워놓았고 두 개의 손잡이는 세로로 길쭉한 목재여서 손잡이 바로 옆의 좁은 공간을 두드려야 했다.

처음엔 아무런 반응이 없길래 들리지 않은 건가 싶어서 조금 더 세게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열림과 동시에 따뜻한 공기가 눈에 보일 듯 묵직하게 번져 나왔고 술렁거리는 소리가 귀에 확 들어와서 회의실의 난방과 방음이 상당히 잘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을 열어 준 것은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교장 선생님이라기엔 아무래도 너무 젊어 보였다. 앞머리가 잘 펴진 상태로 이마에 착 달라붙은 일명 깻잎머리를 하고 있었고, 테가 가느다란 안경에 짙은 화장을 하고 감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수수한 양복에 비해 블라우스는 윤기가 흐르고 목 주위와 손등을 덮은 레이스가 눈에 띄는 등 무척이나 화려했다.

깻잎머리 선생님이 네 사람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더니 맨 앞에 서있는 여왕님에게 대표로 물었다.

“아직 오지 않은 건 세 사람인데, 한 명은 누구지?”
“네? 그게요, 얘는 며칠 전에 왔는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잠깐 누워 있었거든요. 우리가 문병을 하다가 데려다줄 겸 해서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키자 그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길을 돌렸다. 예리한 눈동자가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그렇다면 네가 마…… 마트……?”
“마트료나입니다.”

조금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정정했다. 한국에서 보낸 중학교 시절, 그의 별명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마트였다. ‘너 무슨 마트니? 이 마트니, 저 마트니?’하는 식의 말장난은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 마트료나. 좋아, 간담회에 한 번만 참석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들어와.”

네 사람은 깻잎머리 선생님의 뒤를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호기심에 가득찬 소녀들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했다. 눈썰미 있는 아이들은 그 중에서 세 사람은 제주공항에서부터 자신과 같은 버스와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온 신입생임을 기억해내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 호리호리한 체구에 허리까지 오는 갈색머리를 한 저 인형처럼 깜찍한 아이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맨 앞 좌석에 앉게 되었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앉도록 하면 으레 맨 뒷자리로 몰려서 앞자리가 비게 마련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지각생들에게 비어 있던 앞자리를 가리켰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접이식 의자에 앉고 나니 정면에는 영화궁의 지도가 보였다. 100인치는 될 법한 커다란 벽걸이형 스크린에 빔프로젝터에서 나온 영상을 띄워 놓고 있었다. 그 앞에 선 깻잎머리 선생님이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이곳저곳을 비추면서 건물의 위치 같은 것을 설명했다.

딱히 주의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줄곧 찬 바닷바람을 받으며 걸어오느라 기운이 빠지기도 했고 선생님의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단조로운 톤의 설명이 지루하기도 해서 여왕님은 괜히 손을 비비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는 데에만 열중했다. 몸이 따스한 공기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모든 중량이 눈꺼풀으로 밀집되는 느낌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왼쪽으로 최대한 돌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눈을 뜨니 줄지어 놓은 의자들의 행렬과는 조금 떨어진 가장자리에 의자를 하나 놓고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초등학교 3~4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인데 연한 체크무늬가 들어간 회색 아동용 정장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단발로 깔끔하게 빗어 넘겼으며 광을 들인 듯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검고 굽이 두꺼운 구두를 신고 있었다. 발끝을 세워야 겨우 땅에 닿을 정도의 상태였는데 이럴 경우 보통 아이라면 다리를 흔들 텐데 이 아이는 가정교육을 굉장히 잘 받았는지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자세로 얌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위로 올라간 그 시선은 아마도 깻잎머리 선생님을 향해 있을 것이다.

왕님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오던 잠도 잊고 팔꿈치로 옆에 앉은 지란의 팔을 살짝 치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왼쪽에 있는 저 아이 좀 봐. 누굴까?”
“글쎄. 따로 앉아 있는 걸로 봐서 신입생은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 너무 어리고 말야.”
“내가 보기엔 저 선생님 딸 같은데. 계속 선생님을 보고 있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도 같네. 근데 별로 안 닮았거든?”

통통한 볼살이 귀여운 어린 아이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어른의 얼굴을 섣불리 비교해봤자 닮지 않은 게 당연할 것이다. 둘이서 소곤대며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다 추측이며 상상이니 결국 궁금증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역시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선생님의 설명이 일단락되고 있던 참이었다.

“건물은 이 정도로 설명하면 되겠죠? 무엇보다 자신의 발로 걷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혹시 질문하실 것이 있나요? 없겠죠? 그럼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모두들,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참, 내일부터는 지급받은 의복을 착용하셔야 합니다. 내일 일정은 오늘 지급받은 학생수첩에서 알려줄 테니 꼭 확인하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마치겠습니다’ 이후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친다는 말 한 마디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각기 재잘대며 의자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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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잼 있게 잘 읽었습니다.
소설을 맛깔스럽게 잘 쓰시네요.~~

pilza2 2009-08-10 19:4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마트료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님은 물어보기도 전에 그 표정을 보고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를 알아채고 답했다.

“널 병원에 데려오고나서 의사 선생님에게서 이름을 들어서 알았어. 나도 너랑 같은 신입생이야. 여기 있는 우리 셋은 오늘 막 여기에 와서 몰랐는데, 이미 학교측에는 우리 사진이랑 신상명세 같은 것이 전부 입력이 된 모양이야. 병원에서도 우리 진료기록이 남는대. 그래야 치료하기도 쉽고 그렇겠지.”
“네가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응.”

고개를 끄덕이자 돌연 마트료나는 돌아서며 왕님에게로 다가왔다. 의외의 행동에 놀라서 흠칫 물러서자 도망치기라도 할 듯이 양손을 꼭 감싸쥐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이 어딘지 기억해? 내가 어디에 쓰러져 있었는지 알고 있어?”
“어, 응. 대충 기억하는데.”
“나를 거기로 데려다줘. 부탁이야. 거기가 어딘지,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 제발 부탁할게.”
“글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벌써 해도 져서 어둡고……”
“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거기로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누군데? 같은 학생이야? 아니면 선생님?”
“교복을 입고 있었어. 아마도 우리 선배겠지.”
“그러면 나중에라도 교내를 돌아다니다보면……”
“안 돼! 그래서는 만날 수 없어. 분명해. 거기가 아니면 안 돼.”

왕님은 거절의 말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느꼈다. 그 이유는 무얼까. 이 소녀의 눈빛이 너무나도 애절해서일까, 목소리가 지극히도 간절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보는 사람을 어지럽게 만드는 예쁜 얼굴 때문일까.

“잠깐만. 어디를 가든 좋은데 오늘은 안 되잖아.”
모두의 시선이 지란을 향했다. 지란은 팔짱을 풀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8시부터 신입생 간담회라고. 잊었어? 이미 8시는 넘었으니 어차피 지각이겠지만, 아예 안 가면 나중에 한 소리 들을지도 몰라.”
“그래, 우리 빨리 가요!”

체링도 의자에서 일어나며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마트료나만이 문 앞을 가로막듯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이 자리에 마치 없는 것처럼 말없이 있던 의사 선생님이 하품을 길게 하더니 마트료나 앞으로 다가갔다. 저절로 경계하듯 몸을 움츠렸지만, 의사는 그의 곁을 지나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병실을 나서다가 문득 생각난 듯 슬쩍 돌아보며 한 마디를 던졌다.

“일단 교무주임에게 신입생 한 명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해뒀지만, 너희들 세 명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일단은 참석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바다에 빠져서 지금쯤 동중국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뜨악한 얼굴의 세 사람을 남기고 의사는 문을 닫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기분 나쁜 농담이었지만, 새삼 자기들이 망망대해 한복판에 있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왕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럼 할 수 없지. 마트료나, 넌 여기 누워서 한숨 더 자. 그곳은 내일 가자.”
“…….”

마트료나는 굳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오늘 밤에 다시 거기로 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알았다. 겨우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다.

“나도 갈게. 같이 가.”
“너도 신입생 간담회에 참석하겠다는 거야? 오늘 온 사람들만 가는 것 아니었나?”
“맞아. 하지만 난 어차피 할 것도 없고, 길도 모르겠어. 그렇다고 여기 가만히 누워 있기도 싫어. 무엇보다…… 혼자 있기가 두려워.”

병원은 기숙사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해가 지고 어둡다고 해도 길을 몰라서 못 간다는 것은 핑계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혼자 있기 두렵다는 말을, 그것도 가냘프고 예쁜 얼굴의 소녀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왕님은 함께 가자며 손을 덥석 쥐었다. 당황스러워하자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였다.

“어두우니까 조심해야지. 이러고 가면 안전해.”

어느새 나머지 한 손은 조지란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미소녀를 여왕님아 혼자 차지하게 놔둘 순 없지! 히히.”
“그럼 나는 어쩌죠? 어쩌지?”
“체링 너는 허리를 안고 졸래졸래 따라오렴.”

체링은 지란의 짓궂은 말을 듣고 조금은 부끄러워했지만 분위기에 이끌린 듯 용기를 내어 양손으로 마트료나의 허리를 붙잡고 열차놀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뒤따라갔다. 마트료나는 양손과 허리를 세 아이들에게 점령당한 상태로 반쯤 끌려가다시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워낙 구김 없고 밝게 웃는 아이들인지라 차마 화를 내거나 뿌리칠 수가 없었다. 맞닿는 피부의 느낌, 와닿는 따스한 숨결, 타인이라는 존재가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고 마트료나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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