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식당과 그에 인접한 매점은 제법 많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은 2월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 많다는 느낌인데, 현재 재학생들은 신입생과 마찬가지로 거의 매일같이 수 명에서 십 수 명씩 학교측에서 제공하는 수상 버스를 타고 학교로 복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봄방학은 2월 말일까지이기 때문에 미리 올 의무는 없지만, 학업 준비나 기숙사를 정돈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재학생 대부분은 이미 학교에 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비좁은 학교에서 달리 갈 곳도 놀 장소도 없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몇 군데 되지 않는 TV가 있는 장소가 바로 식당이었기 때문에 이곳은 저녁때면 늘 장터처럼 떠들썩했다. 40인치는 넘을 듯한 큰 벽걸이 TV가 두 개, 그 외에도 기둥 옆을 비롯한 곳곳에 여러 대의 TV가 있어서 채널 경쟁은 생각보다 극심하지 않았다.
물론 채널 선택권은 상급생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기에 가장 큰 벽걸이 TV는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나 쇼프로가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그 외의 작은 화면에서는 경쟁에서 밀려난 동시간대의 비인기 방송이 흐르고 있었고, 그 중에서 두 대 정도는 교내방송만이 나오도록 설정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식당 외부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누군가, 아마도 방송부원이겠지만, 지금 식당을 촬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점에 들어가면서 마트료나는 이 학교에 며칠이나마 먼저 온 사람으로서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 시간은 사람이 많아서 계산을 하려면 줄을 서야 하니까 한 명이 모아서 계산을 하는 것이 빨리 걸린다고.
“그럼 오늘은 내가 쏠게.”
지란이 호기 있게 말하며 자신의 학생수첩을 꺼내어 골든벨을 울리듯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마트료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손을 저으며 말리려고 했다.
“아니, 내 말은 꼭 그런 뜻은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오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서 말야. 즐겁게 해줘서 고맙다는 의미라고나 할까?”
“우리가 뭐 재롱이라도 부린 것처럼 말한다?”
옆에서 핀잔을 주자 지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그럼 다음 타자는 여왕님아다. 다음엔 님아가 쏘셔.”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체링은 그렇게 툴툴대는 왕님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잡고 반쯤 끌고 가듯이 했다. 세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골라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지란이 온갖 과자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야, 마실 건 없어? 마실 거?”
“아 참. 깜박 했네. 마실 것은 님아가 좀 사와. 헤헤.”
혀를 살짝 내밀며 얼버무리자 왕님은 고래를 저으며 매점으로 향했다. 지란이 테이블에 과자를 쌓아놓고 자신의 과자 고르는 기준에 설명하고 있을 무렵 입구에 체육복을 입고 HDV 카메라를 든 여학생이 들어오자, TV에도 식당 내부의 모습이 비춰졌다. 신입생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만 껌벅이고 있었지만 재학생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저녁때면 학생회관, 기숙사, 식당 등을 볼 면서 마구잡이로 영상을 찍는 방송부의 괴짜이자 유일한 3학년이 되었으니 명실공히 방송부의 에이스가 된 서활인. 그는 먹잇감을 찾는 야수의 눈동자를 카메라에 투영한 듯 식당 내부를 예리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TV에 그 영상이 생방송처럼 그대로 비춰지고 있음은 물론, 그가 중얼거리는 말도 해설처럼 함께 들리고 있었다.
활인 _ 이제 식당에 들어왔습니다. 오오,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는군요. 신입생입니다, 신입생.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신입생이 왔습니다! 이러니까 제가 무슨 장사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럼 이쯤에서 신입생들을 몇 명 붙잡고 인터뷰를 해봐야겠죠? 제가 누굽니까. 예쁜 신입생들만 찍습니다. 여기는 영화궁 교내TV! 영비에스~! 이거 썰렁하네요. 그냥 인터뷰나 하죠. 저기요! 잠깐만요! 잠깐…….
활인 _ 아유, 도망갔어요. 왜들 이렇게 카메라를 무서워하시나 그래. 설마 제 소문이 벌써 퍼진 것은 아니겠죠? 흐흐. 자, 이번엔…… 오, 여기 신입생 세 사람이 사이좋게 모여서 다과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주 파티를 하네요, 파티를. 잠깐만요!
지란 _ 안녕하세요? (웃으며 손을 흔든다)
활인 _ 네, 안녕하세요? 반갑게 맞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흑. 혹시 오늘 오셨어요?
지란 _ 저랑 얘랑 얘는 오늘 같이 왔고요. 얘는 며칠 전에 왔는데 오늘 만나서 친해졌어요.
활인 _ 그러세요. 저는 방송부의 촬영걸 서활인이라고 하는데요, 잠시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지란 _ 네, 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다)
활인 _ 감사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모습! 역시 풋풋한 신입생의 모습은 이거죠!
지란 _ 와! 저쪽 TV에 내 얼굴이 나오네요?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웃는다)
활인 _ 그럼요. 이 학교 장비, 최신식으로 빵빵하답니다. 이 참에 방송부에 오실 생각 없으세요? 촬영도 하고요, 라디오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해요. 연극부나 영화부랑 손잡고 연기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그래요.
지란 _ 야, 대단하네요. 하지만 전 이미 다른 부서에 들어가려고 생각했는데…….
활인 _ 할 수 없죠 뭐, 흑흑입니다. 참 내 정신 좀 봐. 인터뷰를 해야지. 어디서 오셨어요. 참, 간단히 이름이랑 자기소개를 좀.
지란 _ 네. 저는 조지란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왔어요.
활인 _ 제주도의 공기는 어떤가요? 서울에 비하면 안 춥죠?
지란 _ 그렇네요. 근데 바람이 뭐랄까, 눅눅하다고 해야 하나, 공기도 그렇고 확실히 섬이라서……
활인 _ (말을 끊으며) 오! 여기 이쪽! 잠깐만 일어서 주세요!
마트료나 _ 네? 저, 저요?
활인 _ 예! 우리나라분이세요?
마트료나 _ 아, 아직 국적은 러시아지만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서, 곧 귀화를 할 생각인데요…….
활인 _ 잠깐만 일어나 봐요. (카메라를 들지 않은 손으로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킨다) 이름이 뭐예요?
마트료나 _ 마트료나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