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아이들이 서로 빨리 나가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문 앞이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에 여왕님과 조지란만은 구석에 앉은 여자아이를 향해 경쟁하듯 달려갔다. 그리고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강아지라도 본 듯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살짝 꼬집는 등의 애정 표현을 잔뜩 퍼부어주었다.
“어쩜, 귀여워! 귀여워!”
“안녕? 너 혹시 여기 입학하는 거니?”
“넌 이름이 뭐야? 난 조지란이라고 해.”
“난 여왕님이야. 본명이라고.”
아이는 두 사람의 공세에 휩쓸려 아아, 우우 정도의 소리밖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트료나와 체링이 어디 좀 보자며 어깨 너머로 비집고 들어오자 그들의 동작에 빈틈이 생겼고 간신히 아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어우…… 전 교장이에요…….”
“어머나? 이름이 교장이야? 이 학교에는 여왕도 있고 교장도 있고 별의 별 게 다 있네.”
“이름 가지고 사람 놀리지 마. 그러는 너는 이름이 지란이가 뭐냐?”
“알아, 알아. 내 별명 지랄인 거. 근데 얘, 너 이름이 교장이면 성은 뭐니?”
“잠깐만요, 학생들.”
그때 차갑고 무게 있는 목소리가 그들의 들뜬 수다를 착 가라앉혔다. 순간 난방이 꺼진 듯이 주위 공기가 싸늘해졌다. 모두들 손과 입을 멈추고 눈만 움직여 자신들의 뒤에 있는 깻잎머리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늦게 들어왔으니 모를 수도 있겠군. 다시 소개를 하지요. 우선 저는 교무주임이자 교장 선생님의 업무보조를 맡고 있는 관채향이라고 합니다.”
깻잎머리 선생님, 즉 관채향은 자기소개를 한 후 그 아이를 바라보며 지극히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 학생들을 위해 직접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소녀는 밝은 표정으로 채향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트라이앵글을 두드리듯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궁 고등학교의 교장 한송이입니다.”
“그래 안녀…… 뭐? 교오자앙?”
태연히 인사를 받던 왕님은 화들짝 놀라며 전염병 환자라도 본 듯 몸을 뒤로 확 젖혔다. 그 바람에 의자에 부딪혀 뒤로 넘어질 뻔 했는데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진 않은 지란이 붙잡아주는 바람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아무튼 어안이 벙벙하기로는 지란과 체링도 왕님에 못지않았는데, 그 아이, 아니 한송이 교장 선생님은 말을 마친 후 채향에게로 바짝 다가가서 살짝 껴안았다. 키 차이가 상당히 났기에 허리 아래를 안은 형상이었다. 채향은 얼어붙은 소녀들의 얼굴을 보곤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학생들도 모두 처음에는 놀라거나 믿지 않았으니까 걱정 말아요. 제가 간략하게 더 소개해드리자면 우리 교장 선생님께선 비록 연령은 어리지만 명석한 두뇌와 두터운 학식을 갖추신 분입니다. 저를 포함해 여기 있는 어느 누구라도 교장 선생님과 지식 및 지혜를 겨루어서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점입가경이었다. 어린 아이에다가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 단순히 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라 교장을 맡을 정도의 학식을 갖추었단 말인가? 말로는 쉽지만 교장이라는 직책이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맡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아직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의무교육은 어떻게 하나? 학력이야 머리가 좋으니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는 가능할 것이고, 석박사 학위도 선입견으로 평가에 불리할 수는 있어도 나이제한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크게 구애받는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경력과 연륜이 중시되는 교장이라는 직책을 그렇게 간단하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이 학교는 자사고이고 영화궁 재단에서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니 교장 임명에 대한 권한은 이사회, 즉 재단쪽이 쥐고 있을 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생각해볼 수 있는 케이스는 이 아이가 이사장의 딸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인맥에 의해 주어졌다는 경우이다.
실질적으로 이사회가 학교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면 허울뿐인 교장 자리에는 누가 앉아 있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들에게 반항하거나 걸림돌이 되지 않을 어린아이가 최적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생각을 너무 깊고 심각하게 했던 모양이다. 등 뒤에서 풋, 하고 썩은 자두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왕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다분히 비웃는 듯한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헬리콥터를 타고 나타난 공주님, 태북그룹 3세 북도 정이었다. 그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도도한 표정을 짓고는 미개인을 깔보는 듯한 태도로 마음껏 비웃고 있었다. 그의 뒤에도 두 명의 여자애가 서서 그를 흉내내는 듯 비슷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제법 빠른 시간에 친구를 사귀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만, 진실은 재벌가 영애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따라지들일 것이다.
왕님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무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귀티가 흐르고 고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도도한 재벌가 따님만 있었을 뿐이니, 지란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다들 떠받들어주는 것에만 익숙하다보니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배려 같은 걸 느끼는 감각이 퇴화되어버린 모습.
무시하고 가려고 했으나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눈빛과 마주치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딱히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름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원래 가볍게 비웃고는 쩔쩔매는 상대방을 놔두고 싸늘하게 등을 돌려 그 자리를 유유히 빠져나가려고 했던 북도 정은 그 상대가 돌연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깜짝 놀라며 일순 긴장하여 숨을 멈추었다. 설마 중학교 때 껌 좀 씹었던 아이를 잘못 건드린 걸까? 그런 생각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좀 어색하긴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자 잠깐이나마 겁을 먹었던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여겨질 정도로 안심이 되었다.
“네가 북도 정이니? 만나서 반갑다. 난 여왕님이라고 해. 참고로 본명이고 순 한글이름이야.”
“여왕님? 그게 이름이라고? 풋! 실례지만 나 좀 웃을게. 호호호호…!”
그러더니 셋이서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이고 손으로 입을 가리는 등 내숭을 적절히 떠는 척 하면서도 실컷 비웃고 있었다. 순간 긴장했던 기색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듯이 아까보다 더 크게 깔깔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