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님은 끓어 넘칠 듯한 분노를 억누르려 주먹을 꽉 쥐었지만 얼굴만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자근자근 씹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내 이름 웃긴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되는 거 같은데, 도정아?”
“뭐? 뭐, 뭐라고?”
도정, 아니 정은 예상도 못한 상대의 반격에 웃음을 그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그렇게 맞받아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는 듯 했다.
“네 이름이 북도정이잖아. 그러니까 도정이지.”
“뭐? 너 바보니? 내가 어디 집안 사람인지 모르는 거야?”
“알지. 세상 무섭고 법 무서운 것도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정도는. 그렇다고 우리가 널 아가씨라고 불러줄 리 없다는 건 너도 알 테고.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너도 우리랑 똑같은 동급생이니까, 앞으론 도정이라고 부를게. 잘 지내자, 도정아.”
도정이 된 정의 얼굴은 카멜레온 정도가 아니라 별을 먹은 슈퍼마리오처럼 붉으락푸르락 번쩍번쩍 했다. 친구가 놀림감이 된 것에 혼자 분을 삭이던 지란은 반격의 기회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배를 잡고 있는 힘껏 목소리를 높이며 웃어대었다.
“하하하! 난 실례 안 하고 웃을게! 도정이가 뭐야 도정이가! 아하하하하!”
“도정(搗精)이라면 곡식의 낱알을 찧어 껍질을 벗기는 일이라고 하네요. 맞죠?”
체링이 주머니에서 작은 국어사전을 꺼내 펼쳐들고는 말했다. 웃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말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 왕님과 마트료나까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체링은 이유도 잘 모른 채 친구들이 웃으니까 따라 웃었고, 회의실 안은 네 명의 웃음소리로 금세 떠들썩해졌다. 반면 맞은편의 세 사람은 분노와 창피함을 곱씹고 있을 뿐이었고.
아이들은 절반쯤 회의실을 나갔지만 아직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콧대 높은 재벌가 따님이 놀림감이 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런 수모, 이런 창피라니. 겪어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만은 싫었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도정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몸을 홱 돌렸다.
“잘 지내자고? 얼마나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보겠어.”
그렇게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기더니 반쯤 걷고 반쯤 뛰듯 하면서 회의실 문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두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밀치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친위대의 도움으로 병목 현상을 무시하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도 귀한 집 따님다워 보였다.
“어딜 감히 사람을 깔보고…… 매운맛 좀 봤겠지?”
왕님이 한결 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씩씩거리며 웃음을 뱉어내던 지란이 한 마디 보태었다.
“야, 조만간 이거 전교에 퍼질 것 같아. 내가 장담할게. 쟤 이름은 사흘 내로 도정이가 될 거야. 태북그룹 3세, 그 이름은 도정이! 아우 웃겨, 내 배, 내 배 살려…….”
“이름이나 생긴 걸로 사람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았겠지.”
“맞아, 맞아. 나도 맨날 지랄이라고 불리면서 내가 뭘 해도 지랄한다고 놀려대서 말야.”
“글쎄, 이름만 가지고 그렇게 불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너도 별로 싫어하는 기색도 없고.”
“야, 너까지 그러기야?”
지란이 덤벼들어 팔로 목을 조르고 두 다리로 허리를 감았다. 둘은 서로 붙잡고 밀고 당기고 했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그렇고 본인들도 전혀 싸우는 모습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저 껴안고 장난치는 정도였는데, 그렇게 둘이서 깔깔대며 놀다가 지쳤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쯤엔 어느새 회의실에 그들 네 사람만 남은 상태였다. 열린 문틈으로 채향이 얼굴만 내밀며 말했다.
“너희들 나올 때 불 끄고 나와라. 문은 안 잠궈도 돼.”
“네.”
마트료나가 대표로 대답을 하자 얼굴이 사라졌다. 헐레벌떡 나와서 주위를 살피니 복도 저편에 멀어지는 채향과 한송이 교장의 모습이 보였다. 교장은 아직도 채향의 허리춤을 껴안고 있었는데 꽤 추워하는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를 들썩이며 재채기를 했다.
“잇치!”
“추우세요, 교장 선생님? 어머, 이것 좀 봐. 콧물이 흐르잖아요!”
“응, 응.”
철부지 아이처럼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자 채향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코를 꼼꼼하게 닦아주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콧물을 흘리면 체면이 서겠어요? 손수건 드린 거 어쨌어요?”
“잊어버린 거 같애.”
“제가 뭐랬어요. 손수건이랑, 휴지랑, 약은 꼭 챙기라고…… 어제 드린 감기약 드셨어요?”
“……아니.”
진흙 속을 파고들어가는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목소리. 채향은 짐짓 화가 난 듯 양손을 허리에 대고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안 되겠네. 예방접종 맞으셔야겠어요. 내일 맞으러 가는 거예요, 알았죠? 교장 선생님이 감기에 걸려서 콧물을 줄줄 흘리면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우리 교장 선생님은 코쟁이래요~ 하고 놀리면 좋겠어요?”
“그래도 주사는 싫어~!”
칭얼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은 멀어져갔다. 흡사 엄마와 딸을 보는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지란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을 꼬면서 반쯤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아유~! 아무리 봐도 귀여워!”
“야, 떠들었더니 배고픈데 뭐 먹으러 가자.”
왕님이 그의 등을 쿡 찌르며 한 말이었다.
* * * * * * * * * *
영화궁 고등학교의 학생수첩은 그 이름과는 달리 PDA에 가까운 외형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학생에게 소지가 허용된 유일한 전자제품이기도 했는데,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의 가죽으로 된 커버를 열면 커버 안쪽엔 사진과 이름, 학번이 적힌 일반적인 학생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안에는 얇은 전자수첩이 들어 있다.
특수하게 주문제작을 한 제품인지, 뒷면에 새겨진 영화궁의 마크 이외에는 특별한 상표가 그려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표준의 이어폰 접속 단자와 전원 케이블을 연결하는 구멍 이외에는 어떤 버튼이나 입출력 포트도 없이 액정화면만이 자리하고 있다.
전원은 항상 켜진 상태이고 함께 지급된 전용 크래들에 꽂아서 충전하는 방식이며 모든 조작은 터치 패널인 화면에 직접 하도록 되어 있는데, 손가락 혹은 닌텐도DS처럼 수납된 플라스틱 펜을 꺼내어 누르거나 쓸 수 있다. 그 외형이나 크기, 쓰임새를 볼 때 애플의 아이폰(iPhone)과 가장 흡사하게 보였다.
이 학생수첩은 시계, 알람, 수업시간표, 출석 체크, 메모, 학교 측의 전달사항을 알리거나 교사들이 과제를 줄 때도 쓰이는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이 바로 식사를 하거나 물건을 살 때 전자화폐로 쓰인다는 점이다.
입학할 때 현금의 지참을 일체 금지한 이 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식사와 의복, 생필품을 무료로 지급(물론 어느 정도는 입학금 및 수업료에 포함되지만)하는데 대신 이 수첩을 단말기에 찍어서 수령했음을(혹은 제때 식사를 했음을) 확인해야 하며, 개인이 구매하는 매점, 이발소 같은 곳에서도 이것을 찍어 지불을 대신하게 되고, 학기가 끝나면 요금이 합산되어 가정으로 청구서가 날아가게 되는 방식이다.
이런 지불방식을 조지란은 놀이공원 같다고 표현했고, 여왕님 역시 테마 파크와 같은 느낌이 나는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