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왕님입니다!”

모니터는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소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동그란 턱선과 볼살 때문에 약간 통통한 느낌이 드는 얼굴에, 당당하고 도전적인 눈빛을 심야의 고양이처럼 번뜩이고 있다.
빈나련은 푹신한 사무용 의자에 등을 기대고, 오른쪽 다리를 위로 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오른손을 뻗어 마우스를 붙잡았다. 동영상 재생기의 탐색 바를 약간 뒤로 잡아당겨 그 장면을 다시 보았다. 나련은 이 장면을 벌써 몇 번째 보고 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하고 있어서 학생회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왔어.”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나련은 최면에서 풀린 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만 살짝 돌려 여느 때처럼 바로 뒤에 다가와 선 효범을 보면서 물었다.

“두 사람 다?”
“응. 놀라지 마. 저 유명한 여왕님 선언을 한 아이, 알고 보니까 자기 이름을 말한 거였어. 이름이 여왕님이야. 순 한글 이름이래.”
“뭐?”

진지하던 나련의 얼굴에 당혹과 실망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길금윤이 인질로 삼았던 아이는 마트료나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이라나.”
“그래…….”

나련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기지개를 켜며 뒤로 기대었다. 상체에 밀린 등받이가 뒤로 확 넘어가면서 나련의 거꾸로 뒤집어진 얼굴이 뒤에 서 있던 효범을 마주보았다. 그 자세 그대로 나련이 반쯤 혼잣말처럼 말했다.

“바보 같아. 혼자서 흥분하고 궁금해 했던 게……”
“하지만 저 두 아이는 이미 유명해졌어.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 씨가 된다고 여왕님이란 아이가 정말 여왕 후보로 나설 수도 있어.”
“그거야 상관 안 해. 여왕 후보는 누구든 나설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화나는 게 뭔지 알아?”

나련은 말을 하면서 젖혔던 등을 바로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학생회장을 여왕의 심복, 여왕이 되기 위한 중단 단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여왕이 되어 학교를 휘어잡기만 하면 학생회장은 자기가 아끼는 후계자에게 넘겨주면 된다는 식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신경이 곤두선 날카로운 목소리. 마음껏 드러내는 속내. 오직 효범의 앞에서만 볼 수 있는 나련의 감춰진 모습. 효범은 혼자만이 볼 수 있는 나련의 진실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 학생회장 자리가 필요해? 필요하면 가져가! 학생회장이 되고 싶어? 그러면 회장 자리를 주겠어! 하지만 그들은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이 학교의 학생회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행사를 기획하고, 그 모든 일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면 직접 해보고 깨닫는 수밖에 없어.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진정해, 나련아.”
“다른 아이들은 늘 내 뒤에서 수군거렸어. 자기들 위에 있는 듯이 행동한다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피땀을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효범은 아마도 나련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처음 만난 이후 오늘까지, 올해로 십 년이 되는 그 긴 세월동안 효범은 나련의 곁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고 도와주고 지탱해주었다. 효범이 없었다면 나련은 한참 전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기쁨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련은 스스로 말했듯 긴 시간동안 남들의 위에, 앞에 있어 왔다. 초등학교 때는 1학년과 6학년을 제외하고 늘 반장이었고, 6학년 때는 학생회장이었다. 중학교 때는 1학년 때 반장, 2학년 때 부반장, 3학년 때 학생회장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1학년 때 반장, 2학년 때 학생회장을 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울음을 자주 터뜨렸던 초등학교 1학년 때와, 재미난 수학여행을 공약으로 내세워 인기를 독차지했던 잘 노는 아이에게 밀려서 졌던 중학교 2학년 때를 제외하면 모두 반장 아니면 전교 학생회장을 맡아왔다.

나련은 성적도 중학교까지 전교에서 한 자리 숫자의 등수를 유지해왔고, 영재들이 모인 영화궁 고등학교에서는 상당히 고전했지만 상위권에 포함되는 수준이었다. 교사들은 모두 성적우수 품행방정 교우원만이라는 모범적인 우등생의 표본으로 여겼고, 학급 아이들과 학생회 일원들도 모두 나련을 믿고 그에게 맡기면 다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련은 우수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른바 카리스마형 리더십의 소유자로 자신이 앞서 나가 길을 제시하며 모두에게 따르라고 명령하는 타입이었다. 타협도 나태도 대충 넘어감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인해 결벽증이라는 오해도 받고 반대하는 사람과 마찰도 많이 일어났지만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면 즉시 물러날 줄 아는 공정함도 갖추고 있었다.

카리스마가 있는 도도한 리더, 라는 것이 나련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혹은 고정관념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속내를 터놓고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며 우애를 쌓아온 효범만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나련이 있다.

그 나련의 모습은 오직 단 둘이 있을 때만 볼 수 있었다. 자존심과 타인이 자신을 보는 시선과 기대라는 장벽이 늘 에워싸고 있는 나련은 부모에게조차 응석을 부리는 등의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마음 속 밑바닥에서 분노와 슬픔, 스트레스와 고뇌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언젠가는 화산이 분출하듯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무너지려는 자신을 안아줄 친구가 나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한 명 있었다.

“아냐, 그건 이제 됐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누가 여왕이 되려고 하든, 그래서 누굴 학생회장 자리에 앉히려고 하든지 상관 안 할 거야. 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점점 무뎌지며 가라앉았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웅크렸다.

“월랑님을…… 월랑님을 만났다니……”

나련의 몸이 점점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효범은 가만히 다가가서 뒤에서 끌어안았다. 덩치가 큰 효범이 팔을 두르자 나련의 작은 몸은 그 안에 묻힌 듯 했다. 나련의 큰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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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임벨 소리)

마경 _ 영화궁 고등학교!

마경,익희 _ (동시에) 방과후 교내방송!

(시그널 음악)

마경 _ 안녕하세요.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재학생 분들은 새로운 교실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기쁘고 설레실 거예요. 저도 학기 첫날부터 방송을 시작하게 되어서 무척 설렙니다. 저는 2학년 1반이 되었어요! 방송부원 마경입니다. 우리 방송부에 말이죠, 경사가 생겼어요.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방송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찾아온 신입생이 있지 뭐예요. 안 그래도 3학년 선배들이 졸업하면서 부원이 줄어서 폐부 위기까지 맞은 우리는, 어서 와~! 하고 두 팔을 벌려 맞아줬죠. 그래서, 바로 여기에, 제 바로 앞에 모셨습니다! 자, 자기소개해주세요.

익희 _ 안녕하세요. 1학년 3반, 오익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다 마이크에 이마를 살짝 부딪치는 소리)

마경 _ 우후후. 귀여워라. (웃음)

익희 _ 죄, 죄송합니다. (쑥스럽게 웃는다)

마경 _ 어떻게 방송부에 들어올 생각을 다 했어? 아니, 너무 너무 착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보통은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선배들이 붙잡고 권유도 하고 그러잖아?

익희 _ 말씀드렸듯이, 전 중학교 때도 방송부였어요.

마경 _ 이 방송 들으시는 학우들은 모르니까 제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우리 익희 양은 장래 아나운서나 성우가 되는 것이 꿈이랍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부터 방송부를 했고 교내방송도 혼자서 진행하고 그랬대요. 어머나, 엘리트네.

익희 _ 아녜요. 별 거 아니었어요, 중학교 교내방송 정도야…….

마경 _ 우리 방송부는 안 그래도 사람이 없던 판에 이런 인재가 들어왔으니 그냥 묵힐 수야 없잖아요?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두 사람이 함께 방과후 교내방송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저 밖에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계신 우리 디렉터 겸 엔지니어 겸 작가 겸 해서 혼자 다 하고 있는 사람이 방송부의 일당백, 공양이에요. 공양이 그러자고 했으니 해야지? 방송부 일은 쟤가 다 하고 있거든.

익희 _ 부장님은요?

마경 _ 우리 활어 부장님은 지금도 교내 어딘가를 촬영하고 계실 걸.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익희 _ (작은 목소리로) 부, 부장님을 내버려두는 건가요…….

마경 _ 사실 우리 교내방송이 크게 두 종류 있거든. 점심시간이랑 방과후. 일단 점심시간 방송은 나 혼자 하기로 했어. 아무래도 선생님들도 들으시니까 얌전히, 점잖게 학생들의 사연도 읽어주고 클래식 음악도 틀고 그렇게…… 뭐랄까, FM 라디오풍?

익희 _ FM인가요…….

마경 _ 그리고 이제 방과후 방송은 지금처럼 릴랙~스하게 가는 거야. 어차피 들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걸랑? 시간도 형식도 정해놓은 게 없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돼.

익희 _ 그럼 작년에도 이런 식으로 했나요?

마경 _ 응. 작년엔 신입생인 공양이랑 나랑 교대로 방송을 했다니까. 활어 선배는 그때도 카메라 들고 돌아다녔고, 3학년 선배들은 입시준비 때문에 활동을 거의 안 했으니까. 엄청 힘들었다구~. 그치만 이젠 이렇게, 귀엽고 똑똑한 후배가 들어왔으니, 나도 릴랙~스, 릴랙스!

익희 _ 어우, 과찬이세요.

마경 _ 자,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할까나……. 오늘 입학식 어땠어?

익희 _ 입학식요? 강당이 엄청 크고 깨끗했어요.

마경 _ 그치? 이 학교 아직 십 년도 안 되었으니까. 시설들이 다 깨끗하고 좋아. 수영장 안 가봤지? 여름에 기대하렴.

익희 _ 정말 기대돼요. 참, 교장 선생님은 언제 봐도 놀라워요.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마경 _ 글쎄, 교무주임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아.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고. 열 살은 안 넘었을 걸?

익희 _ 어떻게 교장이 되셨을까요?

마경 _ 그건 뭐 우리 학교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해두렴.

익희 _ 대형 모니터로 교장 선생님 모습이 나온 것도 대단했고요, 관현악부 선배님들이 애국가랑 교가랑 연주하는 것도 멋졌고요, 재학생 대표로 연설하신 학생회장님도 너무 멋있었어요.

마경 _ 빈나련 선배님이 좀 많이 멋지시지. 차기 여왕 후보 1순위잖니.

익희 _ 근데 저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었는데요, 우리 학교에는 학생회장 말고 여왕이라는 직책이 있잖아요. 정확히 둘이 어떻게 다른 거죠?

마경 _ 음……. 그래, 첫 방송에 걸맞는 화제인 것 같아. 과연 엘리트! (웃음)

익희 _ 아우, 그만 하시라니까요.

마경 _ 마침 이 방송을 듣는 신입생들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네. 학생회장과 여왕의 차이라면……? 대통령과 왕의 차이, 라고 할까?

익희 _ 하지만 이 학교가 왕국은 아니잖아요.

마경 _ 아, 그래. 영국이나 일본을 생각해봐. 그 나라엔 왕이 있고, 또 총리나 수상이 있잖니?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총리나 수상이고 왕은 아니지? 그것과 비슷해. 우리 학교는 말이지, 여왕이 학생회장을 지명해서 뽑을 수 있어. 학생회의 찬반 투표를 거치긴 하지만, 학생들의 투표로 정하는 것이 아냐.

익희 _ 아……. 그런가요?

마경 _ 영국이나 일본의 왕을 보고 그러잖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우리 학교의 여왕도 마찬가지야. 학생회에 관련된 실무는 학생회장이 맡고 있고 여왕은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야. 학생만이 아니라 이 학교, 섬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이란 얘기지. 그래서 여왕은 학적상으로 학생회가 아니고 이사회 소속이 돼. 그래서 이사회 건물에서 열리는 중요 회의에 참석할 권리를 가진대. 이거야 나도 안 가봐서 어떤 회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익희 _ 그래도 뭔가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마경 _ 그치? 그리고 학생회장은 반드시 2학년이 학기 초에 임명되어 1년간 맡도록 정해져 있지만, 여왕은 종신제도야. 즉위하는 순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여왕인 거지. 졸업하고 나면 새 여왕을 뽑는 거고.

익희 _ 그럼 1학년이 여왕이 되면 3년동안 죽 여왕으로 있는 거네요?

마경 _ 근데 선배들에게 들어보니까 그런 경우는 없었대. 대부분 3학년이었고, 2학년이 여왕이 된 경우도 예외적인 일이라고 하니까. 학생회장을 맡았던 사람이 여왕이 되는 경우가 가장 많았대.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이름도 알려지고 지지도 받으니까 그렇겠지.

익희 _ 그럼 여왕은 어떻게 뽑나요? 투표로요?

마경 _ 투표를 두 번 하게 돼. 후보는 추천인 열 명만 있으면 누구든 될 수 있지만, 학생 전체가 투표를 해서 일정 이상의 표를 얻어야만 결선에 나갈 수 있대. 근데 결선투표는 비밀리에 치뤄진다는 거야. 왕은 뭐 뽑는 게 아니라 정해지는 거라나? 듣기로는 가톨릭 교황 선출을 따라한 거라는데, 이사회에서 정한 사람들이 폐쇄된 공간에 모여서 뽑힐 때까지 계속 투표를 한대.

익희 _ 그러다 영영 안 뽑히면요?

마경 _ 그건 나도 모르겠어.

익희 _ 비밀리에 하면 부정행위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마경 _ 지난번 투표에선 CCTV로 투표장 모습을 보여줬어. 내 기억으로 일주일 정도 걸린 것 같은데, 사람들이 투표실 안에서 먹고 자면서 나가지도 못했지 뭐니.

익희 _ 작년에 투표를 했나보죠?

마경 _ 응. 전임 여왕인 초월랑님도 2학년 때 학생회장이었고 3학년이 되어 여왕에 선출되셨거든. 정말 예쁘고 인기도 많은 분이셨지.

익희 _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여왕 선출에 관심이 많은 거였군요. 반 아이들도 그 이야기를 했어요.

마경 _ 어머나, 그래? 신입생들도 벌써 알고 있구나?

익희 _ 네. 며칠 전에 신입생 중 한 명이 여왕이 될 거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일이 있다고, 다들 그 얘기 하던데요.

마경 _ 아아, 그거 나도 들었어. 우리 활어 부장님이 특종을 잡았다고 뻐기던 그 일 말이지? 학교가 온통 그 이야기로 화제만발~ 이라는 느낌? 우리 방송에선 나중에 여왕 후보들을 모셔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거든. 그 신입생도 나왔으면 좋겠다. 혹시 같은 반이니?

익희 _ 아뇨. 제가 듣기로 예술계열 특기생이라고 하던데요.

마경 _ 그럼 6반이겠구나. 우리 학교는 학년 공통으로 1에서 3반이 문과, 4와 5반이 이과, 6반이 예과거든. 그림, 음악, 무용, 연기 같은 특기생들은 다 예과에 들어가.

익희 _ 체육계열은 없나봐요.

마경 _ 응. 아쉽게도 없어. 사방이 바다고 수영장도 크니까 수영선수를 데려오면 참 좋을 텐데, 그치?

익희 _ 선배님, 바다는 좀…….

마경 _ 자, 그러면, 응? (잠시 마이크에서 떨어져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 우리 방송 디렉터인 공양이 그만 끝내자네요. 그럼 방과후 방송은 끝~.

익희 _ 예? 벌써요?

마경 _ 너도 내일부터 수업 시작하니까 준비도 하고 예습도 하고 바쁠 거 아니니? 오늘은 푹 쉬고, 잠 많이 자고, 내일 본격적으로 방송하자, 응?

익희 _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마경 _ 자, 그럼 학우 여러분들도 잘 쉬시고, 공부도 열심히 하세요. 고등학교 시절은 중요하답니다. (웃음)

익희 _ (기어드는 목소리로) 남 일처럼 말씀하시네요…….

마경 _ 영화궁 고등학교 방과후 교내방송은 이만 마칠게요. 진행자는 마경, 그리고?

익희 _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 오익희입니다, 아니 오익희였습니다!

마경 _ 그럼 안녕~!

익희 _ 아, 안녕!

(마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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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교차하는 시선들


입학식이 다가올수록 신입생의 하루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이미 입학 예정자들은 모두 학교에 들어와 방을 배정받은 상태였는데, 섬에 오게 되면 첫날은 교장과 교무주임이 주관하는 간담회에 참석하여 간단한 환영인사와 학교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는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병원에서 간단한 건강진단을 포함한 신체검사를 받는다. 여기에서 잰 치수에 의해 교복과 체육복, 구두와 운동화와 슬리퍼, 수영복, 평상복, 속옷 등 의류를 지급받고 교과서, 필기구는 물론 칫솔, 타올, 로션 등의 생활용품도 지급받는다. 학기 초에 일괄적으로 지급받는 것은 무료(장학생 이외에는 수업료에 포함된 형태로)이고 이후 필기구를 매점에서 산다든지 하는 경우는 학생수첩에 금액이 전산으로 기록되어 학기가 끝난 후 가정으로 청구서가 보내진다.

일반 고등학교의 열 배가 넘는 수업료 때문에 귀족학교라는 원성도 듣고 있지만 그 대신 학생에 대한 대우와 복지 수준은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기숙사는 2인 1실이고 같은 학년의 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별적으로 침대, 옷장, 책걸상이 하나씩 제공된다. 화장실, 냉장고, 시스템 에어컨(주로 대형 건물에 설치하는 냉난방 에어컨으로 한 대의 실외기에 복수의 실내기를 연결하는 방식)이 방마다 하나씩 있는 대신 학생이어서 그런지 TV는 없다.
TV는 층마다 있는 휴게실, 식당과 목욕탕 등에 있으며, 컴퓨터도 휴게실과 컴퓨터실 등에 있으나 내부 인트라넷만 연결되어 있고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공중전화도 없이 모든 전화는 내선으로 연결되어 있다(외부 전화는 교환원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모든 시설이 우수하면서도 통신 쪽에 있어서는 재수학원 수준으로 낙후되어 있는데, 이는 학교를 의도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이사회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학식 날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동안의 분주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되는 듯, 아침에 강당에서 입학식을 치르고, 앞으로 1년동안 지낼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공식 일정은 끝이 났다. 시간표 같은 것은 학생수첩에 다운로드 되었기 때문에 받아 적을 필요조차 없었다. 또한 일반 교실보다 더 널찍한 교실의 뒤에는 개인별로 커다란 캐비닛이 지급되어 어지간한 필기구는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물론 방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하는 착실한 학생들은 갖고 다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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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아주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만약 이게 연극이라면 무서울 정도의 연기력이었겠지만,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보고 있자면 진심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처음 보는 신입생의 목에 칼을 겨누면서까지 애타게 찾고 있는 인물. 과연 그는 누구일까. 신입생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재학생들은 인질이 된 아이와 인질극을 벌이는 금윤을 걱정하면서도 내심 사라진 월랑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직 카메라만이 정면에서 당당히 마주보고 있을 뿐인 대치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한 치 앞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이쯤 해두시지?”

카메라보다 몇 발짝 앞까지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던 마트료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살짝 뜨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왕님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금윤이 윽박지르듯 말했지만 왕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페트병과 종이컵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이쯤 해두라니까. 초면에 반말해서 미안하지만, 선배가 선배 같아야 말이지. 후배 목에 칼이나 겨누고 말야. 그리고 이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나 중학교 때 병으로 2년 꿇어서 나이는 열여덟이야. 곧 열아홉 되겠네.”

“닥쳐! 누가 네 얘기 듣재? 당장 꺼져!”
“내가 촛불이야, 꺼지게? 그거 고기 써는 나이프 같은데, 그걸로 눌러서는 상처도 안 나니까 헛고생하지 마슈.”
“뭐, 뭐라고?”

금윤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반면 왕님은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마트료나는 인질이라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용감할까.

“그걸로 잘라진다고 쳐도, 그래서 어쩔 건데? 거기 경동맥 있는 건 알고 계시나? 그걸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피가 말이지, 화단에 물 주다가 고무호스를 놓으면 자기가 막 춤추듯이 흔들거리며 사방으로 물을 뿌리잖아? 그렇게 돼. 시뻘건 피가 여기 주위에 흥건하게 뿌려질 거라고. 인간 분수가 되는 거야.”
“흐윽……”

금윤의 얼굴이 공포로 창백해졌다. 본인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미처 상상도 못해본 듯 했다. 하긴 그걸 안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했겠나 싶었다.

“사람이 피를 뿌리면서 죽는 걸 봤어? 삼류 호러 영화 말고 실제로 말야. 난 봤어. 우리 아빠는, 내 눈앞에서, 나한테 피를 퍼부으면서 죽어갔어. 난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고. 아빠의 피로 샤워를 하면서 나는 동맥이 잘린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봤다고!”

이제 왕님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금윤은 칼을 쥔 손을 비롯해 온몸을 바람 앞의 깃발처럼 심하게 떨고 있어 무력해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금윤의 손목을 재빨리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나이프를 빼앗았다.
공기가 빠져나간 풍선처럼 금윤은 힘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빨을 부딪혀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얼굴이 이내 붉어지더니 넘쳐흐르는 눈물로 뒤덮였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며 월랑의 이름을 불렀다.

“난 그저…… 그 분을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인데……”

그 다음 말은 울먹임에 섞여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왕님은 긴장이 풀리자 기운도 빠져서 곧 쓰러질 듯한 마트료나를 부둥켜안았다. 눈치도 없이 잿빛 양복을 입은 교직원들이 이제야 앞다투어 몰려왔다. 경비실의 CCTV 화면에 비치는 인질극 영상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미 상황이 끝났음을 알고 길금윤을 데리고 들어올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도 그는 병원에서 간단한 진찰을 받은 후 교칙 위반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웅성대던 소녀들의 목소리도 예전처럼 가라앉고 진정된 분위기가 되자, 정신없이 촬영에만 몰두하던 활인이 다시 인터뷰를 하겠노라 덤벼들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도 지칠 줄 모르게 덤벼드는 그 모습을 보면 과연 활어(活魚)라는 별명이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활인 _ 잠깐만요! 잠깐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왕님 _ 네? (손을 내저으며) 지금 마트료나가 지쳐보여서 기숙사에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은데요. 나중에 얘기할 수 없을까요?

활인 _ 잠깐이면 돼요. 신입생이죠?

왕님 _ 예. 보시다시피. (사복을 입은 자기 몸을 가리킨다)

활인 _ 아, 네네. 정말 대단했어요! 용감하기도 했고! 하지만 좀 위험한 상황이지 않았나요? 인질범을 섣불리 도발했다가 화가 나서 정말로 인질을 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왕님 _ 그거야 사람에 따라 다르죠. 제가 봤을 때 그 사람은 그런 행동이 처음이고 무척 충동적으로 보였어요. 뭐랄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나섰죠, 뭐.

활인 _ 야, 대단하네요. 그런 거 보통은 잘 모르거든요? 경호원 같은 쪽에 관심 있으세요? 경호학과에 가고 싶다든지.

왕님 _ 그런 생각 전혀 없고요. 저기, 이제 가야 하니까 비켜주세요.

활인 _ 아하, 네. 잠깐만요! 이름을 안 물어봤어! 입학식도 하기 전에 혜성처럼 나타난 우리 스타의 이름도 안 물어보다니 저도 참 리포터 자격이 없네요. 이름이 뭐예요?

왕님 _ (뒷머리를 긁으며 잠시 주저하다가) ……여왕님인데요.

활인 _ 네? 뭐라고요?

왕님 _ (조금 화가 나서 아까보다 큰 목소리로) 저는 여왕님입니다! 됐죠?


왕님은 마트료나를 부축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활인은 멍하니 카메라로 그 뒷모습만 잡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멘트를 이을 수 있었다.

활인 _ 이거 지금, 제가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전교의 학우 여러분. 아직 입학도 안 한 신입생이 말이죠, 신입생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선언했습니다. 다들 들으셨나요? 들으셨겠죠? 이거 생방송이지만 녹화도 하고 있으니까 내일 다시 틀어드릴게요! 여왕, 여왕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여왕이 되겠다고 전교생을 상대로 선언을 했습니다! 신입생이, 입학식도 하기 전에, 이야, 내가 이 학교의 전설이라 불리는 얘기들을 숱하게 들었지만 오늘처럼 충격적인 일은 처음인 것 같네요. 목에 칼을 들이댄 인질범을 가볍게 제압하더니 자기가 여왕이 될 거라고 당당하게 선언을 했습니다. 자, 영화궁의 아리따운 학우 여러분, 주목해주십시오. 앞으로 저 신입생이 이 학교에 돌풍을, 아니 돌풍이 뭐야, 아주 태풍을 몰고 올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름을 못 들었네!



* * * * * * * * * *


“너 정말 멋졌어. 난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는데.”
“뭐, 운이 좋았다고 할까. 처음부터 마트료나를 노렸다면 내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까 그 말…… 진짜야?”
“응? 아빠 이야기? 사실 난 연극 특기생으로 들어왔어. 무용·연기 콩쿠르에서 상 받은 적이 있거든.”
“진짜?”
“진짜 정말이야. 중학교 때 뮤지컬 부문.”

“근데 사실 내가 물어본 건 2년 꿇은 건데? 진짜면 왕님 언니야 라고 불러야 되는 거잖아?”
“아! 그, 그건, 다, 당연히 연극, 연기지. 연기야, 연기. 그냥 반말하고 싶어서 둘러댄 거야.”
“그런가? 아무튼 그 휘릭 다가가서 홱 하고 칼 빼앗는 동작이 춤추듯 유연하다 했더니 역시나~. 뮤지컬 배우셨어? 앞으로 알아서 모실게! 하하.”

발랄하게 웃는 지란을 보면서 왕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진땀의 폭포가 느껴졌다. 나이도, 아버지도 모두 사실이었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물론 뮤지컬로 콩쿠르에서 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겨우 사귀게 된 친구들이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는 없었기에. 그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밝은 학생으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어두운 과거는 가장 먼저 벗어 던져야 하는 허물에 불과했다.

한편 활인은 헐레벌떡 식당 밖으로 쫓아 나왔지만 이미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학교 안에 있는 한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 영화궁 고등학교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 벗어날 길은 없다.
홀연히 사라져서 많은 이들을 슬프고 궁금하게 만든 전임 여왕 초월랑. 그 역시 목격자가 있는 이상 곧 나타날 것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그는 여왕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아서, 여왕 자리를 순순히 내놓고 싶지 않아서 졸업을 거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학교의 여왕 자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혜성처럼 나타난 신입생의 선전포고와도 같은 포부는 과연 이루어 질런지.

“이야, 올해는 진짜 재미있겠는 걸.”

활인은 카메라를 끄고 어깨에서 내리며 혼잣말을 했다. 기분은 후련했고 특종을 찍었다는 성취감에 마음도 들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일이 더욱 기대되는 걸지도. 이 기분 좋은 흥분상태가 한동안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제2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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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 2009-08-2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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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red 2009-11-1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벌써 2장이 끝났다-고 느낄만큼 흡입력 있는 전개라 몰입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pilza2 2009-11-13 23: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장 단위로 몰아서 읽으시면 더 좋을 거예요.
저도 다른 분의 글을 읽을 때 감질나서 종종 그렇게 하죠.^^;
 

활인 _ 러시아요? 러시아에서 살다 오셨어요?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 지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살짝 들린다)

마트료나 _ 네. 블라디보스토크요.

활인 _ 아하, 예. 갑자기 불러서 놀라셨죠? 제가 깜놀해서 그래요, 깜놀. 완전 깜놀이야. 난 무슨 누가 등신대 인형을 갖다가 앉혀 놓은 줄 알았어.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난 지금 무슨 아이돌 잡지 브로마이드 펼쳐놓고 찍고 있는 거 같거든요.

마트료나 _ …….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돌린다)

활인 _ 아니, 잠깐만. 카메라 좀 봐요, 에이, 왜 그래! 뭘 빼고 그래! 자자, 이 언니를 바라봐요. 혹시 방송부 들어올 생각……

마트료나 _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다)

활인 _ 아, 그러세요. 또 흑흑입니다.

마트료나 _ 그런데 저기, 이 방송이 지금 전교에 흐르고 있는 건가요?

활인 _ 물론이죠! 사실 다들 TV를 보려고 하지 이런 몰카 같은 거 보려고는 안 하지만요. 그래도 몇 대는 채널이 이걸로 고정되어 있어서 보기 싫어도 보이는 거죠. 식당에는 저쪽에 있고, 학생회관이랑 기숙사 입구에도 있고, 교사(敎舍) 안의 TV는 꺼져 있겠지만 채널이 맞춰져 있어서 언제든 볼 수 있고요.

마트료나 _ 그럼 제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 학교에 계신 선배님이시거든요?

활인 _ 오! 교내 TV도 사랑을 싣는 것인가?! 물론 좋죠! 이거 잘만 하면 새로운 방송 포맷이 나오겠는데? 만나고 싶은 사람을 공개적으로 찾는다! 공개 고백도 좋고! 이거 짱인데?

마트료나 _ 저기, 그 분은 머리카락이 길고, 매우 아름다운 분이세요. 조그만 자주색 망토를 두르고 있고, 명찰 대신에 보석으로 만든 왕관 모양 뱃지를 달고 계셨어요. 혹시 아시나요?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분 중에 누구 아시는 분 없나요? 혹시, 저를 보고 계시나요?

활인 _ 잠, 잠깐만, 블라디 양! 아니, 블라디가 아니지, 이름이……

지란 _ (카메라 옆에서 목소리만) 마트료나.

활인 _ 그래, 마트료나 양. 왕관이라니, 그럼 설마, 설마 네가 여왕을 만났단 말이야? 어디서? 어떻게?

마트료나 _ 여왕……이요?

활인 _ 모르는 거야? 신입생이라서? 하지만 그 분은 졸업식에 나오지 않은 이후로 행방불명되었다고!



식당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트료나도, 지란도, 체링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직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마트료나의 머릿속은 생크림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여왕이라고 불리고 있었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 알게 된 것은 아직 그 두 가지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의미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던 것이다.


활인 _ 졸업식 전날까지도 멀쩡히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난리도 아니었지. 모두들 찾는다고 이 작은 섬을 뒤지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결국 이사회에서 찾지 말라고 하면서 흐지부지되었어. 벌써 보름은 된 것 같은데.

마트료나 _ 말도 안 돼. 전 오늘 만났어요.

활인 _ 어디에서?

마트료나 _ 그건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당장 말해!”

여학생 하나가 사람들을 거칠게 떠밀며 마트료나를 향해 달려왔다. 푸른색 줄무늬가 들어간 잠바와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2학년으로 올라가는 학생이었다.
그는 마트료나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듯 양손으로 움켜쥐고 악을 쓰듯 외쳤다.

“당장 말하란 말야! 내 말 안 들려?!”

마트료나는 놀라고 목이 졸려 아프기도 해서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지란과 체링은 무척 놀랐지만 워낙 무섭게 들이닥치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말리지도 못했고, 활인은 이 상황에서도 촬영하기에 바빴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건·사고는 촬영해야만 하는 멋진 장면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얼른 말해! 얼른! 월랑님을 어디서 만났냐고!”

월랑.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마트료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입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진정해, 금윤아!”

그를 아는 몇몇 학생들이 달려왔으나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일제히 멈춰섰다. 그의 왼손이 마트료나의 목을 휘감아 조르고 있고, 오른손이 점퍼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왔다. 손에 쥔 뾰족한 쇠붙이가 형광등 빛을 반사하여 반짝하고 빛났다. TV화면에 광기가 어린 듯한 두 눈과, 반짝이는 칼날이 고스란히 비춰졌다.

“가까이 오지 마!”

비명처럼 질러대는 고함소리. 금윤이 쥔 칼끝이 마트료나의 목을 향했다.

“가까이 오면, 확 그어버릴 거야. 못 할 것 같아? 못 할 것 같지?”
“하악!”

마트료나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숨을 들이쉬었다. 목살을 누르는 금속의 차갑고 예리한 느낌이 전해졌다. 가벼운 전류가 온몸을 훑고 돌아다니는 듯 했고, 아마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어때? 여기서 내가 힘만 조금 주면 끝장이야. 분명 여기쯤에 동맥이 있겠지? 이래도 장난 같아?”

카메라로 근접 촬영하여 알 수 있듯이, 흉기는 스테이크와 같은 양식이 나올 때 식당에서 제공하는 스텐레스제 나이프였다.
다행히 식칼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칼날의 한쪽 면이 미세한 톱날처럼 세공되어 있어 연약한 소녀의 살을 찢고 동맥을 자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월랑님, 월랑님을 불러줘. 우리의 여왕님을 데려와. 얼른! 어서!”

금윤은 카메라를 향해 악을 쓰듯 외쳤다. 누구를 향해서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본인은 무척 심각하고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만은 전해졌다.

“월랑님. 혹시 보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어서 와주세요! 우리를 놔두고 어디로 가신 거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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