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 _ 러시아요? 러시아에서 살다 오셨어요?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 지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살짝 들린다)
마트료나 _ 네. 블라디보스토크요.
활인 _ 아하, 예. 갑자기 불러서 놀라셨죠? 제가 깜놀해서 그래요, 깜놀. 완전 깜놀이야. 난 무슨 누가 등신대 인형을 갖다가 앉혀 놓은 줄 알았어.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난 지금 무슨 아이돌 잡지 브로마이드 펼쳐놓고 찍고 있는 거 같거든요.
마트료나 _ …….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돌린다)
활인 _ 아니, 잠깐만. 카메라 좀 봐요, 에이, 왜 그래! 뭘 빼고 그래! 자자, 이 언니를 바라봐요. 혹시 방송부 들어올 생각……
마트료나 _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다)
활인 _ 아, 그러세요. 또 흑흑입니다.
마트료나 _ 그런데 저기, 이 방송이 지금 전교에 흐르고 있는 건가요?
활인 _ 물론이죠! 사실 다들 TV를 보려고 하지 이런 몰카 같은 거 보려고는 안 하지만요. 그래도 몇 대는 채널이 이걸로 고정되어 있어서 보기 싫어도 보이는 거죠. 식당에는 저쪽에 있고, 학생회관이랑 기숙사 입구에도 있고, 교사(敎舍) 안의 TV는 꺼져 있겠지만 채널이 맞춰져 있어서 언제든 볼 수 있고요.
마트료나 _ 그럼 제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 학교에 계신 선배님이시거든요?
활인 _ 오! 교내 TV도 사랑을 싣는 것인가?! 물론 좋죠! 이거 잘만 하면 새로운 방송 포맷이 나오겠는데? 만나고 싶은 사람을 공개적으로 찾는다! 공개 고백도 좋고! 이거 짱인데?
마트료나 _ 저기, 그 분은 머리카락이 길고, 매우 아름다운 분이세요. 조그만 자주색 망토를 두르고 있고, 명찰 대신에 보석으로 만든 왕관 모양 뱃지를 달고 계셨어요. 혹시 아시나요?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분 중에 누구 아시는 분 없나요? 혹시, 저를 보고 계시나요?
활인 _ 잠, 잠깐만, 블라디 양! 아니, 블라디가 아니지, 이름이……
지란 _ (카메라 옆에서 목소리만) 마트료나.
활인 _ 그래, 마트료나 양. 왕관이라니, 그럼 설마, 설마 네가 여왕을 만났단 말이야? 어디서? 어떻게?
마트료나 _ 여왕……이요?
활인 _ 모르는 거야? 신입생이라서? 하지만 그 분은 졸업식에 나오지 않은 이후로 행방불명되었다고!
식당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트료나도, 지란도, 체링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직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기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마트료나의 머릿속은 생크림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여왕이라고 불리고 있었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 알게 된 것은 아직 그 두 가지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의미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던 것이다.
활인 _ 졸업식 전날까지도 멀쩡히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난리도 아니었지. 모두들 찾는다고 이 작은 섬을 뒤지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결국 이사회에서 찾지 말라고 하면서 흐지부지되었어. 벌써 보름은 된 것 같은데.
마트료나 _ 말도 안 돼. 전 오늘 만났어요.
활인 _ 어디에서?
마트료나 _ 그건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당장 말해!”
여학생 하나가 사람들을 거칠게 떠밀며 마트료나를 향해 달려왔다. 푸른색 줄무늬가 들어간 잠바와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2학년으로 올라가는 학생이었다.
그는 마트료나의 목을 조르기라도 할 듯 양손으로 움켜쥐고 악을 쓰듯 외쳤다.
“당장 말하란 말야! 내 말 안 들려?!”
마트료나는 놀라고 목이 졸려 아프기도 해서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지란과 체링은 무척 놀랐지만 워낙 무섭게 들이닥치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말리지도 못했고, 활인은 이 상황에서도 촬영하기에 바빴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건·사고는 촬영해야만 하는 멋진 장면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얼른 말해! 얼른! 월랑님을 어디서 만났냐고!”
월랑.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마트료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입을 통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진정해, 금윤아!”
그를 아는 몇몇 학생들이 달려왔으나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일제히 멈춰섰다. 그의 왼손이 마트료나의 목을 휘감아 조르고 있고, 오른손이 점퍼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왔다. 손에 쥔 뾰족한 쇠붙이가 형광등 빛을 반사하여 반짝하고 빛났다. TV화면에 광기가 어린 듯한 두 눈과, 반짝이는 칼날이 고스란히 비춰졌다.
“가까이 오지 마!”
비명처럼 질러대는 고함소리. 금윤이 쥔 칼끝이 마트료나의 목을 향했다.
“가까이 오면, 확 그어버릴 거야. 못 할 것 같아? 못 할 것 같지?”
“하악!”
마트료나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숨을 들이쉬었다. 목살을 누르는 금속의 차갑고 예리한 느낌이 전해졌다. 가벼운 전류가 온몸을 훑고 돌아다니는 듯 했고, 아마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어때? 여기서 내가 힘만 조금 주면 끝장이야. 분명 여기쯤에 동맥이 있겠지? 이래도 장난 같아?”
카메라로 근접 촬영하여 알 수 있듯이, 흉기는 스테이크와 같은 양식이 나올 때 식당에서 제공하는 스텐레스제 나이프였다.
다행히 식칼처럼 날카롭지는 않지만, 칼날의 한쪽 면이 미세한 톱날처럼 세공되어 있어 연약한 소녀의 살을 찢고 동맥을 자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월랑님, 월랑님을 불러줘. 우리의 여왕님을 데려와. 얼른! 어서!”
금윤은 카메라를 향해 악을 쓰듯 외쳤다. 누구를 향해서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본인은 무척 심각하고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만은 전해졌다.
“월랑님. 혹시 보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어서 와주세요! 우리를 놔두고 어디로 가신 거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