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왕님입니다!”

모니터는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소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동그란 턱선과 볼살 때문에 약간 통통한 느낌이 드는 얼굴에, 당당하고 도전적인 눈빛을 심야의 고양이처럼 번뜩이고 있다.
빈나련은 푹신한 사무용 의자에 등을 기대고, 오른쪽 다리를 위로 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오른손을 뻗어 마우스를 붙잡았다. 동영상 재생기의 탐색 바를 약간 뒤로 잡아당겨 그 장면을 다시 보았다. 나련은 이 장면을 벌써 몇 번째 보고 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하고 있어서 학생회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왔어.”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나련은 최면에서 풀린 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만 살짝 돌려 여느 때처럼 바로 뒤에 다가와 선 효범을 보면서 물었다.

“두 사람 다?”
“응. 놀라지 마. 저 유명한 여왕님 선언을 한 아이, 알고 보니까 자기 이름을 말한 거였어. 이름이 여왕님이야. 순 한글 이름이래.”
“뭐?”

진지하던 나련의 얼굴에 당혹과 실망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길금윤이 인질로 삼았던 아이는 마트료나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이라나.”
“그래…….”

나련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기지개를 켜며 뒤로 기대었다. 상체에 밀린 등받이가 뒤로 확 넘어가면서 나련의 거꾸로 뒤집어진 얼굴이 뒤에 서 있던 효범을 마주보았다. 그 자세 그대로 나련이 반쯤 혼잣말처럼 말했다.

“바보 같아. 혼자서 흥분하고 궁금해 했던 게……”
“하지만 저 두 아이는 이미 유명해졌어.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 씨가 된다고 여왕님이란 아이가 정말 여왕 후보로 나설 수도 있어.”
“그거야 상관 안 해. 여왕 후보는 누구든 나설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화나는 게 뭔지 알아?”

나련은 말을 하면서 젖혔던 등을 바로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학생회장을 여왕의 심복, 여왕이 되기 위한 중단 단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여왕이 되어 학교를 휘어잡기만 하면 학생회장은 자기가 아끼는 후계자에게 넘겨주면 된다는 식이야.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신경이 곤두선 날카로운 목소리. 마음껏 드러내는 속내. 오직 효범의 앞에서만 볼 수 있는 나련의 감춰진 모습. 효범은 혼자만이 볼 수 있는 나련의 진실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 학생회장 자리가 필요해? 필요하면 가져가! 학생회장이 되고 싶어? 그러면 회장 자리를 주겠어! 하지만 그들은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이 학교의 학생회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행사를 기획하고, 그 모든 일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면 직접 해보고 깨닫는 수밖에 없어.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진정해, 나련아.”
“다른 아이들은 늘 내 뒤에서 수군거렸어. 자기들 위에 있는 듯이 행동한다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피땀을 흘렸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효범은 아마도 나련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처음 만난 이후 오늘까지, 올해로 십 년이 되는 그 긴 세월동안 효범은 나련의 곁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고 도와주고 지탱해주었다. 효범이 없었다면 나련은 한참 전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기쁨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련은 스스로 말했듯 긴 시간동안 남들의 위에, 앞에 있어 왔다. 초등학교 때는 1학년과 6학년을 제외하고 늘 반장이었고, 6학년 때는 학생회장이었다. 중학교 때는 1학년 때 반장, 2학년 때 부반장, 3학년 때 학생회장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1학년 때 반장, 2학년 때 학생회장을 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울음을 자주 터뜨렸던 초등학교 1학년 때와, 재미난 수학여행을 공약으로 내세워 인기를 독차지했던 잘 노는 아이에게 밀려서 졌던 중학교 2학년 때를 제외하면 모두 반장 아니면 전교 학생회장을 맡아왔다.

나련은 성적도 중학교까지 전교에서 한 자리 숫자의 등수를 유지해왔고, 영재들이 모인 영화궁 고등학교에서는 상당히 고전했지만 상위권에 포함되는 수준이었다. 교사들은 모두 성적우수 품행방정 교우원만이라는 모범적인 우등생의 표본으로 여겼고, 학급 아이들과 학생회 일원들도 모두 나련을 믿고 그에게 맡기면 다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련은 우수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른바 카리스마형 리더십의 소유자로 자신이 앞서 나가 길을 제시하며 모두에게 따르라고 명령하는 타입이었다. 타협도 나태도 대충 넘어감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인해 결벽증이라는 오해도 받고 반대하는 사람과 마찰도 많이 일어났지만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면 즉시 물러날 줄 아는 공정함도 갖추고 있었다.

카리스마가 있는 도도한 리더, 라는 것이 나련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혹은 고정관념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속내를 터놓고 서로의 집에 놀러 다니며 우애를 쌓아온 효범만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나련이 있다.

그 나련의 모습은 오직 단 둘이 있을 때만 볼 수 있었다. 자존심과 타인이 자신을 보는 시선과 기대라는 장벽이 늘 에워싸고 있는 나련은 부모에게조차 응석을 부리는 등의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마음 속 밑바닥에서 분노와 슬픔, 스트레스와 고뇌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언젠가는 화산이 분출하듯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무너지려는 자신을 안아줄 친구가 나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한 명 있었다.

“아냐, 그건 이제 됐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누가 여왕이 되려고 하든, 그래서 누굴 학생회장 자리에 앉히려고 하든지 상관 안 할 거야. 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점점 무뎌지며 가라앉았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웅크렸다.

“월랑님을…… 월랑님을 만났다니……”

나련의 몸이 점점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효범은 가만히 다가가서 뒤에서 끌어안았다. 덩치가 큰 효범이 팔을 두르자 나련의 작은 몸은 그 안에 묻힌 듯 했다. 나련의 큰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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