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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밟다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글을 읽으면서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우연치 않게도 같은 일본 작가인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떠올려야만 했다. 이른바 일본식 환상소설에서 느껴지는 묘한 동질감이랄까. 하지만 환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너무나 달랐다. 카와카미 히로미의 소설에서는 일상과 비일상, 현실과 환상을 억지로 경계지으려 하지 않는 초현실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모래의 여자』의 주인공은 현실과 유리된 공간에 유배된다. 계속된 부조리에 맞서고 극복하려고 하다가 좌절하고 때론 순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뱀을 밟다」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펼쳐지는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긴다. 담담하고 무기력한 반응,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주위의 현상에 충격적으로 반응해왔을까? TV와 신문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무감각하듯 우리 주위,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 역시 처음에는 놀랍거나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이내 익숙해지지 않는가.
주인공은 뱀을 만났고, 뱀은 어머니 행세를 하고, 알고 보니 일하는 집 주인댁도 뱀이랑 살고, 점차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뱀은 한술 더 떠서 주인공을 자신의 세계로 유혹한다. 「뱀을 밟다」에서의 환상적인 공간(이세계? 이렇게 표현하면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올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은 『모래의 여자』에서와 같이 현실에서 격리되어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다. 두 액체가 섞이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서서히, 현실과 환상은 융합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걸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었는지, 황당하면서도 '이게 끝이야?'라고 되뇌이게 만드는 , 어딘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현재진행형의 결말로 양측은 화합이 아닌 대립으로 마무리짓는다.
소설의 본령이 '그럴싸하지만 꾸며낸 이야기'라면 카와카미 히로미는 스스로의 소설을 거짓말이라고 부르면서 그 극한을 추구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중편 「사라지다」가 수록작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커지고 작아지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위치를 실제 물리적인 변화로 치환한 기발한 환상소설로, 판타지 소설의 외연을 넓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그 외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SF에서 다뤄질 만한 양자역학이라는 소재를 환상소설로 응용시킨 짧지만 인상적인 단편이다.
본 단편집, 특히 표제작 「뱀을 밟다」는 어디에나 신이 있어(신령이든 귀신이든) 신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이 혼재된 일본에서 가능한 소설이라는 느낌이었다. 겐유 소큐의 소설이 일상과 격리된 듯한 느낌의 승려에게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잡아내었다면, 카와카미 히로미의 소설은 일상적인 인물들이 초현실적인 상황에서 빚어내는 이야기를 그려내었다. 내가 읽어서 느낀 일본의 소설은 무국적적이라고 말하기 힘든, 일본만의 색깔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외국의 장르를 수입하여 우수한 결과물을 배출한 SF와 추리소설쪽이 그러한데, 카와카미 히로미의 본 단편집 역시 일본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괜찮은 환상소설의 한 예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