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시의 마법사 - 제1권 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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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본의아니게 르귄의 명함에 '예언자'를 추가해야 할지도 모를 기념비적인 소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인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판타지의 문제점을 여실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몇몇 작품의 대중적 흥행으로 인해 촉발된 이른바 판타지 붐은 그 안에 숨어있던 '그림자'가 튀어나와 범람하며 장르 자체를 망쳐놓고 몰락에 이를 위기에 처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민없는 글쓰기가 낳은 말초적 재미의 추구는 곧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인공이 자기 마음대로 깽판치고 다니는 이야기를 낳았다.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들이 왜 저급하고 무가치한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강한 힘은 그만큼의 책임이 필요하며, (마법의) 힘은 사용된 만큼 (자연의) 균형을 일그러뜨린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가치를 인정받아 재간되었지만 더 늦기 전에 재조명되어 다행이며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거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한 장르의 원전으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은 『반지의 제왕』이 하나의 세계를 그리는데 주력했던 것에 반해 『어스시의 마법사』는 넓은 바다 안의 작은 섬들이라는 무대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을 추상적인 인식을 통해 배제시킨 후 게드, 아르하 등 개개의 인물에 촛점을 맞춘다. 그래서 전자에서의 인물이 세계를 구성하는 부속물처럼 느껴지는 것에 반해 후자는 인물을 위해 세계를 그려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판타지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소설답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젤다의 전설 바람의 지휘봉』 등 후대의 수많은 창작물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느낄 수 있으며 언어의 힘, 빛과 그림자, 균형과 질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미로찾기와 성장 등 고전적인 상징과 은유가 가득하다.

침묵 속의 말, 빛과 그림자의 합일 등 동양적인 사상이 짙게 묻어나는 본 소설의 상징은 지금이야 식상한 클리셰로 여기질지 몰라도 처음 발표된 1970년대 서구권에서 신선하고 독특하게 받아들여졌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인류학자 아버지와 역사학자 남편을 둔 그녀의 이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다양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명작인 『빼앗긴 자들』 역시 다른 사회구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나는데, 이러한 점이 그녀를 단순한 장르소설 작가 이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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