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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3 때 수아는 키가 무지 컸습니다.(1번이 제일 큰 학생인데 수아는 3번이고 저는 11번이었습니다) 시험이 가까워 오면서 쉬는 시간에도 모두들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푸념조로 "공부하기 싫어 미치겠다"고 하자 웅크리고 수학문제를 풀고 있던 수아가 몸을 돌리더니 그 당시에 쓰던 시험지 연습장을 내밀고는 가운데 삼각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내게 "넌 이 삼각형의 비밀을 전부 알고싶지 않니?" 전 할말을 잃고 수아가 마치 외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 볼 수 밖에 없었지요.
- 배수아의 친구가 쓴 글 중에서
수학이라면 질색을 하는 터라 모르는 사실에는 입을 다물 줄 알아야 한다는 평소 소신대로라면 이 글은 쓰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나는 '아끼고 어루만지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존경했다. 때로는 애무도 하고 때로는 무릎을 꿇기도 하면서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박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다는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소수의 비밀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 책을 붙잡고 있을 때 한국일보 3월 17일자 과학섹션에 '가장 큰 소수를 찾아라'는 칼럼이 눈에 띄었다. '수학자들은 왜 이렇게 큰 소수를 찾는 일에 관심을 쏟는 것일까. 소수를 찾는 것 자체가 수학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오늘날 소수는 암호학에서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주 큰 두 소수를 곱해 수를 만들고, 그 수가 어떤 두 소수의 곱인지 알아야 암호를 풀 수 있다.'
말하자면 박사가 사랑한 소수는 '신의 수첩에만 기록돼 있는 진리를 한 줄씩 베껴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수첩이 어디에 있고, 언제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평생에 걸쳐 이 지구와 우주에 숨겨진 암호의 비밀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진리찾기인 셈이다.
그리고 이 완벽한 세계는 아아, 너무 조용하다.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학하게 자리하여, 덜고 더할 여지도 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따라서 조용하다는 말은 최대의 찬사였다.'
생각해보면 그런 상태를 사랑한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네델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떠올렸다.
'왜 그렇게 고기의 위치를 바꾸는 거지?' '프라이팬 한가운데 하고 테두리 쪽하고 온도가 다르니까요. 고루 구우려면 이렇게 간혹 위치를 바꿔줘야 해요.' '아아, 제일 좋은 장소를 독차지하지 않도록 서로 양보를 하는 것이로군.' 이 부분을 읽을 때
'수프에 들어갈 순서대로 야채를 늘여놓는 건가?' '아닙니다' '흰색 야채들은 따로 떼어놓았군. 그리고 주홍색과 자주색. 이 둘은 나란히 있지 않군. 그건 왜 그렇지?' '그 색깔들은 나란히 있으면 서로 싸우니까요'를 연상한 것은 나 혼자 뿐일까.
파출부와 그리트는 수식과 예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부엌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있었다. 박사와 화가를 만나기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이처럼 수학이나 진리, 비밀, 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오늘도 시험지 연습장이나 광고지 뒷면에 삼각형이나 소수를 끄적거리며 그 비밀을 찾기 위해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씨름을 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수학의 '수'자만 대해도 심각한 공황상태가 되버리는 내가 그 아름다운 세계를 최초로 발견한 것은 문학이론 수업 시간이었다. 시를 쓰려면 나는 키츠처럼 나이팅게일이 지저귀거나 셸리처럼 서쪽으로 바람이 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속판과 콤파스라는 딱딱한 소재로도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언뜻 보면 혼돈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수학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완벽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시인 존 던에 따르면 사랑은 콤파스와 같은 것. '우리의 영혼이 만일 둘이라면 콤파스의 다리처럼 한데 붙은 둘. 그대의 영혼은 한 다리를 따라 움직이는 또 하나의 고정된 다리. 하나는 늘 중심에 서있어 상대가 멀리 떠나갈 때 그리로 귀를 기울이고. 상대가 돌아올때 둘은 함께 일어선다'는 거라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박사에게는 수식이라는 미(美)가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소수'와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로 이루어진 진(眞)과 선(善)이었던 셈이다.
박사처럼 진리로 가득찬 신의 수첩이 그 숨겨진 비밀을 내게도 허락할 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나도 수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는 오일러의 법칙 eπi+1=0 을 실생활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비록 하나의 식에 수학에서 가장중요한 상수 5개(e,π,i,1,0)가 모두 나오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식이라는 증명을 내 어리석은 머리로는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는 작가도 전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실패한 거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름다운 수식으로 빛나는 소설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그 경계 너머를 보여주고 증명하려고 하다 갑자기 힘이 빠져 멈춰선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끝으로 갈 수록 조금 지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안타깝지만 모든 비밀은 한신 전 경기 이후 박사의 기억과 함께 갇혀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미정의 시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를 옮기면서 지난 며칠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박사에 대한 기억을 떠나보내자. 단언컨대 80분 밖에 지속되지 못하는 야구박사의 수식 역시 그 처녀만큼 고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아끼는 고독 또한 완전수 28의 등번호를 하고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보이지 않을만큼 멀리 날아간 박사의 수식이었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어느날 방망이에 맞고 혼자 날아가는 공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채 공기 속을 회전하는 공에서 넌 터질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두터운 장갑 안으로 숨어드는 공에선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을 만났다 그런 게 야구라고 불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넌 왠지 고독이라 부르고 싶었다 야구는 고독이라 불리는 편이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가장 아끼는 고독은 보이지 않을만큼 멀리 날아간 공이라고 고백했다 그 공이 그렇게 사라진 건 그만큼 고독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성미정 '야구처녀의 고독은 둥글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