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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모짜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
1968년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책이라곤 교과서와 마오쩌둥의 '붉은 어록'밖에 없던 시절, 단지 지식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재교육을 받기 위해 농촌으로 추방되었던 젊은 지식인 다이 시지에는 소설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무 거창한 지 모르지만) 문학은 어떻게 혁명을 배반하는가, 아니 다른 식으로 말하면 문학은 어떻게 혁명을 완성하는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프랑스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연애소설 '위르쉴 미루에' 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책들은 분명 혁명의 방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권의 책으로 인해 첩첩산중 시골로 보내져 평생 재교육을 받다 죽는다고 해도 시원찮을 부르주아 지식인 청년이 마오쩌둥 흉내를 내며 산골 소녀를 재교육하는 일이 생겨난다. 교재는 서양문학이요, 수업방식은 연애 실습, 학생은 단 한 명 바느질하는 소녀였다.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하는 처녀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겠다. 그애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산골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혈기 넘치는 두 청년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발자크 소설과 함께 시작한 '사소한 인간실험'은 마오쩌둥의 '위대한 인간실험'이 끝내 이루지 못한 혁명을 불과 4개월만에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발자크는 그애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손을 올려놓은 진짜 마법사야. 그애는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몽상에 잠긴 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지. 그애는 자신의 살갗에 닿는 발자크의 말들이 행복과 지성을 갖다줄 거라고 말했어.
정말 소설이 마술처럼 한 인간을 바꿔놓았다. 그 독서의 결과로 바느질하는 소녀는 '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디자인을 흉내낸 브래지어를 만들어 걸치고 도시의 고등학생처럼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이런 진흙 투성이에선 사흘도 못 버틸 새하얀 테니스화까지 신게 된다.
말해봐, 하찮은 부르주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뭐지?
다행히 여기까지는 그저 사랑만세요 문학만세다. 그러나 책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변화를 불러 온다. 처음에는 타고난 입담의 소유자인 친구 뤄야말로 사람들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 넘치게 만드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안경잡이에게서 책이 잔뜩 든 가방을 훔친 다음에도 뤄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발자크 소설에만 탐닉할 뿐이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문학의 다른 광맥을 발견한다.
나는 뤄가 유독 푹 빠진 발자크의 작품들을 내버려두고, 내 열아홉살의 경박함과 진지함으로 플로베르와 고골리, 멜빌, 로맹 롤랑과 차례차례 사랑에 빠졌다. '장크리스토프'와 뜨거운 사랑에 빠진 나는 처음으로 그 책을 뤄와 나의 공동재산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나의 몫이 된다. 지금부터는 단순히 줄거리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과감히 뺄 건 빼고 살을 붙일 건 붙이면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구전문학과 소설이 엄연히 다르듯이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뤄가 이르지 못한 작가의 길을 나는 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네 이야기 솜씨가 나를 능가하는걸. 넌 작가가 되면 좋겠어. 뤄가 속삭였다.
우연히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발자크 소설 하나로 뤄와 바느질하는 소녀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나는 소설에 빠지게 되었다. 책 한 권이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다면 애초에 마오쩌둥이 발자크 소설을 위험하다고 금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문학작품은 (적어도 위대한 문학작품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위험한 혁명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다!
하지만 난 발자크의 프랑스 아가씨가 아니라구. 난 두메산골에 사는 촌뜨기야. 난 그런 식으로 뤄를 기쁘게 해주는 게 정말 좋았어.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하던 바느질하는 소녀는 발자크 소설을 만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단지 뤄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차가운 강물 속으로 3번이나 뛰어 들어갔던 바느질하는 소녀는 물뱀에게 물리게 되고 (성서의 상징을 빌린다면) 50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지만 그 대신 그토록 원하던 지혜를 얻게 된다. 그 지혜란 과연 무엇인가?
가슴 아프지만 결과는 이렇다. 발자크 소설이 그 재교육의 결과로 위대한 혁명을 완성하는 날, 저명한 치과의사의 아들로 위험한 낭떠러지 옆 통로를 엉금엉금 기어서 건너간 낭만적인 연인이자 발자크의 숭배자인 뤄는 울면서 자신들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모든 책을 불사르게 된다. 왜냐고? 이유는 소설 끝머리에 나와 있다. 비로소 혁명이 완성된 것이다.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걸.
작가의 자전적인 체험을 담고 있는 이 성장소설은 서슬퍼런 문화대혁명 시기를 담고 있지만 그 기억이 무섭다기 보다는 안타깝고 불행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애틋함이 물씬 묻어난다. 작가의 말처럼 동쪽의 어느 나라와 달리 중국인들은 고통뿐인 상황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낙천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너무나 매력적인 작가 다이 시지에는 분명 불행한 기억을 이기는 힘이 유머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가공할 만한 영상시대에 문학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에게 내 지지를 보내고 싶다. 안타깝지만 이 리뷰는 책의 매력을 1/10도 못 살리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 'D 콤플렉스'가 너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