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장정일의 [독서일기 1]에 실린 1994년 7월 11일자 일기를 보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평론을 할 수 없으리란 대오각성을 하게' 된 장정일이 처녀막처럼 질기던 책 수집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아내를 시켜 헌책방에 책을 팔아치우는 일화가 나오는데, 재가 들러붙을까봐 담배도 태우지 않을 정도로 아끼고 보살폈던 책을 갖다 버리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나는 의심이 많은 독자다) '자신의 방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창천동 92-6번지 연세대학교 근처에 있는 헌책방. 지나치게 늘어나는 책들로 안 그래도 좁은 방이 더 좁다고 생각하는 나는 종종 그 헌책방에 택시를 타고 가서 정가의 0.8할에 처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온다. (앤 패디먼의 표현대로라면 철저한 '궁정식 연애'의 소유자인 내가 방출하는 책들은 귀퉁이 한번 접지 않은 흠잡을 데 없는 상태라 새 책으로 팔아도 무방한데!)

악명높은 그 할아버지는 값을 계산한 다음 늘 다시 한번 더 셈을 해 처음 가격이 틀렸다고 값을 깎는 억지를 부리는데, 나는 그러시라고 대꾸하고 얼마 되지도 않는 지폐를 받아챙긴 다음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사먹는 만행을 부리곤 한다.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는 옷을 버리듯이 내버리는' 못된 버릇만은 같지만 창천동 92-6번지에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책을 빼앗긴(?) 나와 달리 20여년에 걸쳐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책을 빼앗아 올 수 있었던 헬렌 한프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었으리라!

그 헌책방의 이름은 'MARKS & CO'이고 그 곳을 대신해 책과 편지를 보내온 사람은 프랭크 도엘. 이 책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실제 이야기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대륙 뉴욕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보내는 주문서와 구대륙 런던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보내는 주문확인서였다. 그러나 헬렌 한프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6파운드짜리 햄을 보내면서부터 그 주문서는 편지가 되고 흥미진진한 '84번가의 비밀문서'(우리나라 텔레비전에 방영된 생뚱맞은 영화 제목)로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신세계를 대표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중앙난방이 끊기는 방에서 닥치는대로 드라마 대본이며 백과사전 항목 따위를 쓰며, '그러니까, 그냥 멍하니 앉아 있지만 말고, 뭔가를 좀 찾아보라고요! 그 서점이 어떻게 계속 돌아가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군요'라고 궁시렁거리는 '어쩌다 책에 특이한 취향을 갖게'되었다는 희곡작가 헬렌 한프 맞은편에는,

구세계를 대표하며 그녀 표현대로라면 '저 점잖은 영국인의 자제심에 구멍을 내보려고 애쓰는 중이랍니다. 그분한테 궤양이 생긴다면 아마 그건 제가 한 짓이겠죠.'라는 어쩐지 얄미운 감정마저 드는 느긋한 영국신사의 전형같은 서점지배인 프랭크 도엘이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다.

만일 헬렌 한프가 역사적으로만 의의가 있을 거 같은 아주아주 희귀한 고문서들만 주문하는 학자였다면 이 편지는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그 책들처럼 세월의 먼지만을 우리에게 날렸을 것이다. 그 반대로 그녀가 명성이 휘황찬란한 유명 작가의 책들만 주문하는 평범한 헌책 마니아였다면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한결같은 사랑을 받는 건 어렵지 않았을까.

현재 우리가 대하는 뉴요커의 전신같은 그녀의 까탈스러운 책 취향을 한번 들여다 보자. '봄날도 다가오고 해서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합니다. 키츠나 셸리는 사양이고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그녀는 서슴없이 이런 극악무도한 말도 내뱉는다. '소설만 빼고요. 저는 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마침내 제가(소설을 싫어하는 이 제가) 제인 오스틴에 착수하여 오만과 편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소식에 즐거워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다시 말하면 그녀가 가진 편견으로 가득찬 특이한 취향이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이 헌책 사랑에 독특한 유머와 생기를 불어넣는게 아닐까. 이 편지들은 규격봉투를 닮은 하드커버 장정 속에 책깔피 실, 페이지마다 런던 소인을 찍고 우리를 한달음에 채링크로스 84번지 헌책방으로 안내한다. 타인의 편지를 훔쳐본다는 건 언제나 짜릿한 일이다.

드라마 '봄날'은 끝났지만 나도 다가오는 '봄날'에는 연애시집 한 권을 주문하고 싶은데, 제발 '귀여니가 뽑은 예쁜 사랑시'에 나오는 시인들 말구요. 넋두리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시인으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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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3-17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로드무비 2005-03-2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제야 봤어요.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