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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근영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한심한 일이지만 특기가 독서인 사람치고 무라카미 하루키나 미루야마 겐지도 그 흔한 요시모토 바나나도 별로 읽어본 적 없는 나는 일본문학에 대해 잘 모른다. 그나마 좋아했던 시마다 마사히코는 요즘 찾아볼 수가 없고.
그런데 얼마전 중세 시대의 음유시인이나 할리퀸 무리들이 들려주었을 법한 지극히 낭만적인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이라, 머리 아픈 연애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가벼운 읽을거리가 필요한 터라 '모험'이라는 두 글자에 기대를 걸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침 벚꽃도 비바람에 떨어지면서 덧없이 어렴풋한 봄날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 니시노 유키히코라는 플레이보이가 있다. 그러나 마초 타입은 아니다. 단지 여자를 동시다발적으로 좋아하는 그 자신의 본능에 충실할 따름이다. '여자 자신도 모르는 여자의 바람을 어느새 여자의 깊은 내면에서 끌어내 받아 주는' 그런 남자. 여자들이 가만 놔둘리 없다. 이 책은 10대 때부터 죽기 직전인 50대 중반까지 그와 연애를 주고 받았던 각기 다른 타입의 여자들 10명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에서 나는 당연히 여자 편이다. 사건의 추이를 여자의 입장에서 지켜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10편의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니시노 유키히코라는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성별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나는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와 같은.
그는 비록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충실하지는 못했지만 현재의 연애 파트너라면 모두 사랑하고 싶어했다. 사랑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은 한결같았다. 그러나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을 되돌려 받지는 못했다. 적어도 끝에는 여자들이 먼저 돌아섰다. 장난 같은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훗날 '이상한 남자였어'라고 가볍게 추억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니시노 유키히코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아프다. '아아,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나 혼자일 거야(나도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나 혼자일 거야)' '니시노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부드러운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아마 없을 것이다 (나를 사랑할 수 있을만큼 강하고 부드러운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인 '밤인사'에서 '어째서 나는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니시노 유키히코의 질문에 마나미 에노모토라는 현명한 여자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체질이라서 그래' 물론 그가 이렇게 부질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게 된 데는 자신만의 트라우마가 있지만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을 비롯해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읽은 소설 속에서 좋아하는 '죽음'이 몇 가지 있다. '니시노 유키히코노의 연애와 모험'을 다 읽은 지금 과연 이 소설을 좋아하고 있는 지 아닌 지는 알 수 없어도 여기 나오는 이 남자의 죽음만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가슴 아프다. 어느날 교통 사고가 나고 자신의 딸같은 아이와 사귀고 있던 니시노 유키히코는 전화기 너머로 죽기 직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아이, 나 사랑하지 않았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에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는 소리를 내며 이렇게 울 수 밖에 없다. '노조미 씨 나 슬퍼요. 어째서 이 세상은 이렇게 끝이 없는 겁니까? 끝이 없어서 난 견딜 수가 없어요' 어쩌면 니시노 유키히코 이 남자는 모래 사막같은 이 생에서 그에게 부여된 지리멸렬한 숱한 모험을 마친 다음, 죽은 뒤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안식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