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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우선 작가부터 소설도 아니고 독서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악 에세이도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도 그녀처럼 리뷰를 끄적거려 본다고 해서 뭐라 그러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읽으면서 과연 이 글이 '당나귀들'에 대한 리뷰가 맞냐고 불평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지금 자유로운 형식의 에세이적인 리뷰를 지향하노라고 감히 대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도 잠깐 나오는 거처럼 우리에게 '타인의 책장이란 타인의 정원'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연인과 함께 잘 가꿔진 프랑스식 정원을 산책할 수도 있고 이른 아침 일어나 이슬 맺힌 영국 장미에 대한 찬사의 詩를 바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 아름다운 정원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얼마전 읽은 마티아스 반 복셀의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을 보면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럽에서는 정원을 보호하는 담 대신 보이지 않는 담, 도랑을 파서 그 것을 '은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도랑을 팠지만 프랑스식 정원은 '아하 은장'으로 영국식 정원은 '하하 은장'으로 달리 불린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책에 따르면 정원과 바깥 들판이 한데 섞여 제2의 자연같은 공원을 만들어 낸 영국식 정원에서 '하하 은장'은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그와 달리 인공적인 프랑스식 정원에서 아하 은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이라는 환상은 깨어지고 얼마나 큰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도 선도적인 업적은 경계를 가르기 위해 존재하던 담을 없애고, 그 자리에 도랑을 판 것이다. 사람들은 이걸 '하하!'라 불렀다.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발아래 나타나는 이걸 보고 깜짝 놀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 마티아스 반 복셀,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
나는 이 책을 꽤 오랫동안 질질 끌면서 그 보이지 않는 담, 은장에 대해 생각해 봤다. 펜을 든 작가에게 있어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를 그리는 지도이고 그 것은 세계관 혹은 문학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뛰어난 정원사가 창조한 완벽한 정원이라 하더라도 신이 만든 자연이 아닌 이상 이 세상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완벽한 지도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되고 그 시도 자체부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식 정원에서 우리가 아무리 멀리 멀리 인간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더라도 결국 만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담, 은장인 것이다. 결국 도랑에 빠져 세상과의 단절을 확인하는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직도 세상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치고 화나는 마음에 처음에는 놀라움, 그 다음에는 실망 뿐인 '아하'라는 감탄사가 따라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같은 도랑을 팠다고 하더라도 영국식 정원은 조금 다르단다. 이 부분이 어려워서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국인이 만든 정원은 전원 풍경 속의 하나가 되었고 따라서 자연도 공원이 되었다. 그 안에서 도랑은 아무런 환상을 깨지 않고 정원과 자연의 경계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오로지 '하하'라는 즐거움만 선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마티아스 반 복셀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 이 책이 말하는 바는 간단하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어리석음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라는 것. 그 건 다른 말로 유머라는 것이다.
그래, 이제 이 글을 끝낼 즈음해서 배수아 소설의 어리석음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자면 (오래 기다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배수아식 정원의 끝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조야한 창조물'인 당나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작중인물 T의 말을 빌어 그 당나귀는 바로 작가,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수한 말들과 뛰어난 인용구와 심오한 철학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그 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깐 그 생경한 차가움에 놀란 거 말고는 깜짝놀랄 만한 어떤 첨단의 문장도 생각도 철학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작가의 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책을 덮은 뒤 남는 거라고는 래드클리프 홀이 누구지, 라는 것 뿐.
생각해보자.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다 말고 그 경치에 눈이 팔리면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도랑에 빠질 수도 있다. 다만 당나귀는 그 상황에서 울음 밖에 터트리지 못하지만 인간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야심만만한 '당나귀들'이 말하는 이 어리석은 몽상에 필요한 것은 너무도 부족한 유머다. 나는 그것이 안타깝다.
작가는 '삶의 마지막을 향해서 가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 궁금하다'고 했던가. 성안토니우스도, 밀란 쿤데라도 비트겐슈타인도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작가지만 C. 부코오스키도 래드클리프 홀도 마찬가일 것이다. 우리가 때로 센티멘털하다고 조롱하는 쇼팽도 자신만의 음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굳이 노벨상 수상작가인 존 쿳시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빌어올 필요도 인터넷 서핑으로 C. 부코오스키의 농담 따먹기 같은 시를 인용할 필요도 없었다. 당신은 세상의 끝을 찾아 가는 순례자에게 약대 말고 다른 짐이 필요하다고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