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팝의 고고학 1960 - 한국 팝의 탄생과 혁명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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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한국 팝의 고고학 1960: 한국 팝의 탄생과 혁명
한길아트, 2005-03-10

2005년 6월 4일 읽기 시작.
2005년 6월 22일 읽기 마침.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책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할 자격이 못 된다. 『한국 팝의 고고학』은 내가 처음으로 경험해 본 '책 만들기'의 결과물이고, 그래서 내가 본문을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절대로 '객관적인' 위치에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물 받은 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이러쿵저러쿵 떠들 망정, 공개적으로는 서평을 쓰지 않는다"(강유원)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늘어놓으려는 것은, 한국 현대사와 한국 대중음악 양쪽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국 '팝'의 '고고학'?

  처음 가제暇題였던 '한국 록의 고고학'이 『한국 팝의 고고학』으로 바뀐 데에는 신현준씨가 서문에 쓴 것처럼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생각할수록 『한국 팝의 고고학』이란 제목이 더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신중현, 키 보이스, 히 식스, 한대수 등의 음악들이 현재는 '록'이라는 장르('포크 록'을 포함해서)로 수렴되지만, 이 당시 듣던 사람들에게는 '팝', 말 그대로 대중음악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유행곡이었고, 모든 대중이 듣는 음악이었다.
  그 이외에도 신현준씨가 서문에 쓴 몇 가지 이유를 통해 왜 이 책의 방법론이 '고고학'인지 알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평론가들은 사실의 '발굴'에 소홀한 채 있지도 않은 한국 록의 이데아를 찾아 헤매었다. 이는 '신중현-한대수/김민기-들국화'로 이어지는 '계보'를 낳았다. 반면에 그런 작업을 통해 계보를 이루는 신화적 인물들 사이를 잇는 다른 뛰어난 뮤지션들은 잠깐 화제에 올랐다 다시 역사 속으로 묻혔다. 이 책은 그렇게 묻힌 이들과, 거기에 관련된 사실들을 '발굴'해 냈다. 관련된 연구자도 거의 없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도처에 숨어있는 자료들"을 찾는 것은 '발굴'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이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유행했던 '록 담론', '한국 록의 계보학' 따위와 다르게 '고고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이다.

신화와 사실과 발굴

  이 책은 지금은 신화화되었고 그나마 알려진 사실조차도 막연하고 관계가 엇갈리는 한국 팝의 태동을 살피는 일부터 시작된다. 식민지 시대 재즈를 거쳐 한국전쟁 후 미8군 무대, 보컬 그룹, 살롱가, 소울 가요, 그룹 사운드, 포크에 이르는 40여년의 시간을 꼼꼼히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흰 장갑을 끼고 먼지를 털어낸다. 표지부터 본문까지 가득 채워져 있는 LP 자켓들과 당시의 사진 자료들은 '발굴'의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기본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집중했기 때문에 나열된 음반과 뮤지션의 이름들이 숨가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중간중간 삽입된 필진의 평가와 당시 대중음악 관계자들의 인터뷰는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쉬어가는 공간을 만든다.
  지금의 평론가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한국 대중음악을 신화화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게으르기 짝이 없었다. 이런 '정밀성'의 문제는 한 한문학자(박희병)가 말한 것처럼 "한국에서 정밀성의 문제는 비단 학문만의 문제"가 아니라, "물건 만들기, 집 짓기, 다리 건설하기, 도로에 줄 긋기 등등 사회경제적 부문에서도 우리를 이류로 만드는 요인이다". 이렇게 "한국학이 안고 있는 이 정밀성의 부족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사실의 발굴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이 책 속에서 각 시대별 음악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나 정당한 평가가 드러나는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 힘들 정도로 일천한 한국 대중음악사 연구에서 - 마찬가지로 일천한 한국 현대문화사 연구에서도 - '신화' 속에 묻혀 막연했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발굴'하고 그 먼지를 털어낸 노력에 이 책은 충분히 값할 것이다.

역사에서 기억으로

  자료 수집에서 책을 찍어내기까지, 내가 이 책을 만드는 모든 작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허나 나는 『한국 팝의 고고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접한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일간스포츠」, 「가요생활」을 비롯한 옛날 자료를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 있던 것들이 구체화되었다.
  자료 수집의 일부분으로, 녹취록 작성에 참여하면서 들을 수 있었던 한국 대중음악의 산 증인들이 남긴 생생한 육성은 내가 즐기는 음악 생활에 하나의 자양분이 되었다. 우리는 이 많은 '팝 작곡가, 연주가'들을 어쩌면 이리도 쉽게 잊고 살 수 있는지, 그게 안타깝긴 했지만.
  지직거리는, 그러나 따뜻한 아날로그 질감의 옛날 LP 소리. 그 속에 담겨있는 지금 들어도 놀라운 음악. 그 LP들을 찾아내고 자켓들을 스캔하는 작업을 하면서 필진들은 많은 고생을 했다. 묻혀있던 '역사'에서 나의 '기억'이 되는 그 음악들을 들으면서 기쁘기도 했지만, 이런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는 지금의 '한국 팝'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밴드와 가수와 작곡가의 이름들을, 지금 내 또래의 젊은 세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저 '가요무대'에 가끔 등장하는 옛 가수의 옛 노래 속에서나 눈에 뜨일 뿐. 하지만 우리 나라가 아무리 격동의 세월을 지내왔고 모든 것을 빨리 빨리 처리하는 곳이라고 해도, 채 50년도 되지 않은 사실들을 기억에서 역사로 묻어버릴 수는 없다.
  너무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어떤 것에 대해 기초적인 사실도 제대로 캐내지 않고 비평하는 건 쓸데없는 짓이다.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게 빠른 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게 묻힌 '역사'를 다시 '기억'으로 발굴하는 작업이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목차

빛바랜 기억의 복원에 대한 변 - 신현준

1960 ~ 63

1. 미8군 무대와 '양악'의 유입
그때 '재즈'가 있었네 / 미군의 진주와 양악의 유입 / 미8군 쇼의 탄생과 정비 / 플러오 쇼.패키지 쇼.하우스 밴드 / 미8군 무대의 공과와 여파
interview : 타악기 솔리스트의 보컬 그룹 드러머 시절 | 김대환

2. 일반 무대와 가요의 서양화
'재즈곡'과 '가요곡' / 한국 팝 최초의 작가 손석우 / 방송무대와 방송가요 / 재즈조와 뽕짝조
interview : 트럼펫 연주, 방송국 악단, 작편곡의 마스터 | 김인배
interview : 재즈 캄보의 조율사 | 이동기

3. 트위스트 시대와 캄보 밴드
트위스트 열풍과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 기타 부기에서 기타 트위스트로? / 캄보 밴드와 앰프 기타리스트 / 음악 학원과 기타 학원
interview : 거물 작곡가의 명기타리스트 시절 | 김희갑
interview : 전기 기타 솔로 연주의 교본 | 이인성

1964 ~ 67

4. 보컬 그룹과 보컬 캄보
보컬 그룹, 화목한 자매들과 형제들 / 캄보 밴드에서 보컬 캄보로 / 음악 감상실, 팝 음악의 전파와 수용
interview : 히트곡 제조기, 한국 록의 거장 | 신중현
interview : 한국 그룹 사운드의 '키'(key) | 윤항기

5. '네 녀석'의 시대와 생음악 살롱
네 명의 녀석들 / 보컬 그룹, 극장 쇼에 진출하다 / 보컬 그룹과 양아치 클럽 / 생음악 살롱, 그리고 '살롱가'의 형성 / 보컬 그룹의 음반은 있는가
interview : 바보스를 이끌었던 오랜 친구들 | 김선과 이진
interview : 한 연주인의 망명 | 심형섭

6. 팝 혁명의 조짐
1967년, 사랑의 여름? / 신예 가수와 신예 작곡가의 등장 / 한국의 음반산업계 / 1968년, 팝 혁명
interview : 팝 컬럼니스트의 원형, 그룹 사운드의 막후 지원자 | 서병후
interview : 매혹의 하이 보이스 | 황규현

1968 ~ 70

7. 소울 가요, 그리고 1960년대 말의 팝 혁명
60년대 말을 섹시하게 장식한 펄 시스터스 / 신중현 사단 혹은 서병후 사단 / 킹 레코드 혹은 킹 프로덕션 / 소울.사이키 가요, 그 빛과 그림자 / 신중현의 '진짜' 소울.사이키델릭 사운드
interview : 레슬러 출신의 '황소 가수'겸 매니저 | 소윤석
interview : 신중현 사단의 좌장, 일렉트릭 베이시스트의 선구자 | 이태현

8. 그룹 사운드의 사이키 광란
그룹 사운드, 서울 시민회관을 점령하다! / 키 보이스 대 히 파이브/히 식스 / 오비스 캐빈과 조용호 사단
interview : 록 기타리스트의 선구자 | 김홍탁
interview : 검은 선글라스의 카리스마 | 비스의 보컬 이상만

9. 명동 살롱가의 전성시대
살롱가의 후원자들 / 박영걸 사단, 기지촌 소울과 기지촌 사이키 / 소울.사이키델릭 음반들 / 사이키 사운드의 문화 충격
interview : '소울 악마들'의 후일담 | 김명길.최성근.홍필주
interview : '라스트 찬스'의 잃어버린 기회들 | 김태일

10. 포크송, 이지 리스닝에서 싱어송라이터까지
한국 팝, 소울.사이키와 포크송으로 갈라지다? / 쎄시봉 그룹 혹은 무교동파의 낭만의 시대 / 그랜드 레코드 혹은 황우루 사단의 격조의 시대 / 60년대의 종언, 70년대의 시작
interview :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의 회고담 | 한대수

참고문헌
참고음반
찾아보기


책 속에서

  1960년대 정치문화의 특징이 여촌야도(與村野都)였다면, 음악문화의 특징은 '뽕촌팝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는 품격은 덜 했고, 후자는 인기는 있었지만 품격이 덜했다고나 할까.
  한편 이런 대립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팝 계열의 음악인들도 방송 출연만으로 먹고 살 수는 없었고, 극장 쇼나 나이트클럽 같은 '일반 무대'의 쇼에서 주 수입원을 찾는 이중생활을 해야 했다. 그 가운데 박춘석이나 김영광 같이 아예 뽕짝 작곡가로 전업하다시피 한 사람도 등장했다. 돈의 흐름을 따라 재능을 소비하는 관행은 이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 60쪽

  현재의 대중문화를 비롯한 저널리즘에 대해 한 말씀 한다면.
  위대한 스타가 태어나려면, 위대한 기획자와 글을 쓰는 사람, 그리고 위대한 팬들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의 글을 보니 음악 언론은 고사해버렸더군요. 음악 언론이 아닌, 사진 언론, 포토그래픽 저널리즘이 연예계에서 득세하고 있는데, 진짜 평론다운 평론들이 사라지지 않게 좋은 매거진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206~207쪽, 서병후와의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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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10-01-26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에서'에 인용한 인터뷰의 인터뷰이 서병후는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 서정권의 아버지이다.
 
나이트 워치 - 상 밀리언셀러 클럽 26
세르게이 루키야넨코 지음, 이수연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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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루키야넨코
나이트 워치 (상)
황금가지, 2005-10-25

2005년 11월 4일 읽기 시작.
2005년 11월 11일 읽기 마침.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빛과 어둠의 이야기

  나는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종교, 혹은 이념은 각각 얼마나 많은 신도가 있느냐에 따라 그 힘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모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좀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여러 이념의 수호자들이 그 '힘'을 이용해서 싸운다. 그런 충돌은 현실에도 영향을 갖고 온다. 한 이념의 수호자가 다른 이념의 수호자를 쓰러뜨린다.

  쿵.

  그 순간 현실에서도 총소리가 울려퍼진다.

  탕.

  슬라브족 해방의 '이념'으로 무장한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한다. 나는 이런 환상 소설 같은 일들을 상상하고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책을 처음 집어들 때 역시 그런 기대가 있었다. '<반지의 제왕>을 압도한' 소설이라는 뻔한 광고보다는(사실 소설은 <다 빈치 코드>에 밀리지 않았는가?), '다른 존재들'의 싸움과 '어스름의 세계'의 그 기묘한 분위기가 날 끌어당긴 것이다. 빛과 어둠의 존재라는 설정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뻔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게 되면 반드시 빛과 어둠 사이의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것은 과연 이분법적 사고이지만, 빛과 어둠의 세력이 서로를 절대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한쪽이 이기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서로 대협약을 체결하고 빛의 세력은 야간 경비대를, 어둠의 세력은 주간 경비대를 만들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정신과 의사 출신이라는 작가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현실 세계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다. 현대 러시아의 모스크바가 주무대인데, 이 거대하고 유서 깊은 도시는 컴퓨터와 인터넷과 휴대 전화, 거대한 마천루와 유흥가가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옛 건축물과 급격한 개혁·개방으로 인한 과거의 흔적도 갖고 있는 곳이다.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 허름한 아파트, 만원 지하철과 같은 주위 배경은 소설에 현실감을 더해준다.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대부분의 환상 소설들은 그 자체로 현실적이고 완결된 세계를 그렸거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교묘하게 환상의 세계를 끼워넣는 경우가 많다. 그 묘사가 뛰어나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적인 현실 묘사'는 이 작품의 영화화에도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위의 세계가 색깔을 획득했다. 비디오카메라의 세피아 또는 옛날 영화 모드에서 일반 촬영 모드로 전환할 때 일어나는 화면의 변화와 흡사하다. 정확하게 똑같다. - 81쪽

와 같은 문장을 보면서 동시에 그 영상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이다. 좋은 시나리오의 조건 중 하나는 읽으면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라는데, 이 작품의 묘사는 그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영화를 만드는 데 시나리오가 다는 아니지만, 확실히 이런 묘사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러시아에서 50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에 주는 별을 하나 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작품 자체에 있지 않다. 문장의 내용이 흡인력있게 독자를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눈에 걸리는 문체와 오타가 독자를 현실로 끌어낸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우린 아무 문제없이 여자를 찾아낼 수 있다. 벌써 다닐라와 파라드가 거의 찾아낸 듯하다. 5분에서 6분 정도 더 소요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쨌든 적군은 우리 편에 최후 통첩을 띄운 상태다." - 93쪽

와 같은 문장을 보면 이게 정말 사람의 말투인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 배경 묘사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의 개성을 살린 문체인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투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 이외에도 번역된 문장 중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많다. 아래 몇 가지만 예를 들었지만,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온전히 번역자의 탓으로 돌아가는 것은 잘못이다. 출판사에서는 책을 내는 이상 교정을 보는 것이 정상이고, 편집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허나 그렇게 치부해 버리기에는 눈에 너무 많이 띄는 비문들은 읽는 이를 피곤하게 한다. 문장을 통째로 바꿔야 할 정도의 오류가 아니라면 다음 판에서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여자는 특유의 마녀다운 눈초리로 나를 천공해 보았다. - 76쪽

- 우리말에 '천공하다'라는 동사가 있는가? 내가 배움이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꿰뚫다'라는 뜻인가?

  "로컬 네트워크라는 랜 관련 업무를 해봤소?" - 89쪽

- '랜'이라는 말 자체가 근거리 통신망(Local Area Network)의 약자이다.

  곧 모든 게 뒤엉켰고 너무 빨리 일이 벌어졌다. 무슨 경비대와 무슨 어스름의 세계를 두고 고함이 오갔다. - 119쪽

- 할 말 없음. '무슨 경비대와 무슨 어스름의 세계'? 이 문장은 대체 '무슨' 뜻인가?

  "평행의 세계인가요?" - 135쪽

- 환상소설이나 SF를 많이 읽었다면 대체로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로 번역할 것이다. 이 책의 번역에 의심이 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최근 10년 전까지 소련방 공산당 지구 위원회 서기로 근무했다. - 176쪽

-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대개 '소련' 아니면 '소비에트 연방'으로 쓰지 않는가?

  아가씨의 머리 위에서 돌고 있는 줄기부터 30미터 줄기로 쭉 뻗은 총상화까지 전부를 보았다. - 197쪽

- 국어사전에는 총상화가 "총상 꽃차례의 꽃"이라고 되어 있고 총상 꽃차례는 "무한 꽃차례의 하나. 긴 꽃대에 꽃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끝까지 핀다. 꼬리풀, 투구꽃, 싸리나무, 아카시아의 꽃 따위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이 아가씨의 머리 위 인페르노의 기둥의 끝부분은 꽃 모양이란 것 같은데…… 해석이 좀 찜찜하다.

  꼬리는 재량 있게 좌우로 채찍질 치고 오른쪽 앞발은 바닥에 발린 역청을 긁어대고 있었다. - 236쪽

- 재량 있게 흔드는 꼬리는 어떤 것일까? '이번에는 왼쪽 위로 30도, 다음 번에는 오른쪽 아래도 45도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흔드는 꼬리?

  코스차는 아무것도 이해 못하고 신음하는 여자 흡혈귀를 양 팔에 앉고 갔으며 시몬과 호랑이는 조용히 그들 뒤를 따랐다. - 272쪽

- '안고'가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소설이 주는 재미가 저런 문제점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장르 문학에 있어 읽고 나서도 계속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재미가 있다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 아닌가? 약간의 주저가 있겠지만, 결국 나는 읽지 않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할 것이다.

  어스름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목차

나만의 운명
아군 속의 아군 (상)


책 속에서

  60년대를 겪은 부모 세대가 길러낸 '불특정 연령'의 소년 소녀들이 아직까지도 이 얼마나 많은가. 행복해지는 법을 모르는 불운한 인간들이 이 얼마나 많은가. 너무나 당신들을 동정하고 싶다. 너무나 당신들을 돕고 싶다. - 198쪽

  그러나 절대로 안 된다.
  선과 관련된 온갖 행동은 악의 활성화에 대한 허가 행위다. 협약! 경비대들! 세계의 균형? -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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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zFire 2005-11-14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문제... -_-;;
저번, 반지의 제왕 황금가지판과 거의 비슷한 포스가 느껴지는군요...

외톨이 2005-11-1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괜찮은 것 같은데요.... 막상 자세히 따지고 들자면 이정도는 어느책이든 다 있지 않나요?

페일레스 2005-11-1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rozen Fire/ 재미는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너무 서둘러서 낸 듯한 느낌이...
안티세력/ 사실 요즘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대부분의 장르소설의 번역과 비교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번역도 번역이지만 편집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 오타도 눈에 자주 띄고, 이 정도는 문맥에 맞게 고쳤으면 하는 단어들도 보이고 말이죠.

사또 2005-11-17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당신의 리뷰에 딴지를 걸어도 될까요?
일단 번역문제에 지적하신 부분은 페일레스님의 주관적인 지적같군요
제가 보기에 오타만 빼면 그리 거슬리는것 없는데요
소련방이란 말도 전 많이 들어봤구... 예전 뉴스에서 거의 이렇게 말하던데...
랜관련 지적도 앞의 수식어는 부연설명이지 중복된 표현이 아니라 보입니다
천공하다 라는 표현은 영혼이나 영적세계를 관통해 보는상황이라 적절한 표현을
만들어낸거라 봅니다 제가 보기엔 신선하고 창조적으로 느껴지느데요
만약 노려본다나 뚫어보다는 영적세계가 아닌 민간인들한테나 어울립니다..
그리고 재랑있게... 딱 감이 오는데요 지나치지 않고 적당하게 절도있고...
딱 간단하게 재랑있게가 어울리는데...
어떻게 표할까요?
번역도 어느정도 창조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재밌지!!

페일레스 2005-11-17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또/ 소련방이란 단어를 많이 들어보셨다고 하셨으니 그 역어는 별 문제가 아닐 수 있겠습니다. 제가 예전 뉴스를 별로 보지 못한 탓이겠죠. 그리고 재량있게(재랑있게가 아닙니다), 천공하다 같은 표현은 뭐 창조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로컬 네트워크라는 랜 관련 업무'가 부연설명이라는 얘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랜이라는 네트워크 관련 업무'라고 했으면 말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사또님 지적을 듣고 나니 제가 쓸데없는 걸 갖고 딴지를 걸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장르문학에서는 그 작품 내에서 다루는 특수한 개념(어스름의 세계)나 배경지식(러시아의 문화적 배경이라던가) 외의 묘사는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총상화'라는 역어는 좀 심한 거 아닙니까?

sayonara 2005-12-0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편가르기 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전 페일레스 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소련방이라는 말을 예전에는 많이 썼는지 몰라도 제 주변 사람들은 전부 처음듣는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웬만큼 이런저런 문자매체들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영 어색하네요. ^^;
통속적인 문학작품에서 '천공'이라는 표현은 창조라기 보다는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예술적 잔재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쉽게도 평범한 독자들이 보기에는 신선하다기보다는 그저 정교한 한자어 정도로만 보이네요. ^^;;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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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06-09

2005년 8월 13일 읽기 시작.
2005년 8월 15일 읽기 마침.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이보게, 세상은 자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일세.
  그럼 어떤 곳이죠?
  <스테이지 23>. 이 세상의 실제 이름이지.

  -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中

㉿, 코리언 스텐더즈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골프…… 비단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어느 분야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 일등만이 살아남는 그야말로 프로, 의 세계다. "국제사회가 다 엉망이" 되도록 폭력을 써서라도 제압해야 한다. 결국 폭력은 "지양止揚해서, 지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강좌, 세미나, 부흥회, 워크샵, 클리닉……을 통해서 권장된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계를 조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경제학이 있는 한" 폭력을 조장하는 "시장市場은 이미,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런 사회에서 "한 마리의 도도새처럼 태평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잡수셔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지금 우리는 후기산업사회를 살고 있"으니까.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당신도 군대를 다녀오면, "매사가 긍정적으로 여겨"지고, "짜증은 눈 녹듯 사라지고", "취업을 준비하는 성실한 학생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이 들어도 세상에는 '산수'라는 게 있다. 그 산수를 맞추기 위해 사우나에서 부장에게 거시기도 대 주고, 아침에는 푸시맨, 저녁에는 주유소 알바, 밤엔 편의점 알바를 뛰어야 한다. 친구 집에서 빌붙는 아침 식탁에서 나만 계란후라이가 빠질 수도 있다. 냉장고 위에 계란 두 판이 있어도 말이다. 아, 예예. 라는

  대답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지만, 이렇게 산수를 맞추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니까.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그렇게" 물어도 소용없다. "참치도 인간도, 결국은 밀실에서 살아"가고, 죽어간다. "세상에 뭐 이딴 게 다 있지?" 어쩌면 "너무 그렇고 그"런 이

세계는, 이미 한 마리의 괴수일지도 모른다

  별 수 있겠나. 일단 적응해 본다. '방'이 아닌 '관' 같은 곳에서 "온순한 한 마리의 열대어와 같은 가스를" 방류하고, 우아하게 걸으며, 오래된 밥을 먹는 방법을 터득하고, 웅크린 채 잠든다. 헤드락을 피하기 위해 바벨을 들어올리고, 프레스를 하고, 푸시업을 하고, 신경안정제를 주식으로 삼는다 - 그리고, "한 마리의 도도새처럼 태평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헤드락을 돌려준다. 아침의 러시아워, 넘치다 못해 터지는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의 "머릴 누르고, 막, 등을 팔굽으로 찧고, 밀고, 그"래 본다. 그러면 "경제도 차차 좋아질 거"고, "무디슨가 어디서 우리의 신용등급이 또 한 단계 올라"설테니까. 그래도 들리는 대답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환장할 노릇이군". 여기 저기로 가 본다. 먼저 모습은 있지만 모습을 잃은失像,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농촌'으로. 그런데 그곳엔 "우릴 너무 잘" 아는 UFO가 이삭을 쏙쏙, 빼가고 있었다. 이런 젠장. 그럼 오리배 '라-47호'를 타고 퐁당퐁당, 미국으로 캐나다로 브라질로 다시 미국으로, 페달을 밟아 건너가 본다. 그런데 거기 역시 "춥기도 하고, 또 수납공간도 많이 필요"하고, 살 것도 많다. 아, 정말 뭐란 말인가. 이놈의 세상은. 이놈의

  세상이 개복치인지 세상이 대왕오징어인지 세상이 거북이 위에 놓여 있는지. 코스모를 느끼고 싶다. 정말로, 궁금하다. 그래서 '9호 구름'을 타고 우주로 나가보지만,

  "다른 행성의 존재에게 알려주기엔, 인류의 몽따주는 얼마나 슬픈가". 그래서,

  화성인들은 좋겠다. 금성인들은 참, 좋겠다.

  이제, 카스테라를 구울 때"다. "어렴풋이,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카스테라

  의 재료를 고르는 "원칙은 둘 중 하나 - 소중하거나, 세상의 해악인 것". 그 모든 것을 "반죽한 후 빛이 나올 때까지 오븐에서 굽는다 - 인류를 위한 마음으로", 아니 꼭 인류가 아니어도 좋다. 아무튼 중요한 건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의 지구는 전구電球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니까.

  지미 헨드릭스가 데뷔작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했을 때, 그건 '프로'의 세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비틀즈가 <She Loves You>를 들고 나왔을 때도, '프로'는 아니었다. 무라카미 류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발표했을 때 역시, '프로'의 세계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박민규의 <카스테라> 역시, 그렇다. 그들은 아마,

  1. 계란과 밀가루를 반죽한다.
  2. (지구라는 오븐의) 문을 연다.
  3. 반죽을 넣는다.
  4. 문을 닫는다.

  의 과정을 통해 카스테라를 구웠을 것이다. 이 카스테라를 구울 수 있다면, 프로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돈 받고 파는 카스테라를 사는 게 아니라 직접 제대로 된 '아마' 카스테라를 구울 수 있다면, "우리의 지구는 전구가 될 수도 있다".

  내일부터, 나도 카스테라를 구울 생각이다.


목차

카스테라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아, 하세요 펠리컨
야쿠르트 아줌마
코리언 스텐더즈
대왕오징어의 기습
헤드락
갑을고시원 체류기


책 속에서

  원칙은 둘 중 하나 - 소중하거나, 세상의 해악인 것. - 29쪽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 91쪽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다. 인류의 나이는 300만 년이고, 나는 스무 살이다. 누가 뭐래도 세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한다면 자본주의의 나이는 고작 400년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래도 그쪽이 편했다. …… 그런 이유로, 나는 지구와 인류보다는 자본주의와 함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늙어간다. -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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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외롭구나 - 김형태의 청춘 카운슬링
김형태 지음 / 예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형태
너, 외롭구나
예담, 2004-08-05

2004년 12월 30일 읽기 시작.
2005년 1월 2일 읽기 마침.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지난 세기 말부터인가, 소위 '홍대 앞'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서울 변두리'의 문화도 아니고 비상구 없는 '압구정동'의 문화도 아닌, 돌연변이 같은 문화가 태어난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며 갈 곳 없는 청춘들의 해방구가 되었던 홍대 앞, 그곳의 거품도 걷힌 지 오래다. 그렇게 홍대 앞은 수많은 엉터리 밴드와 몇 안되는 제대로 된 뮤지션(혹은 아티스트), 그리고 수많은 클럽을 남겼다.
  홍대 앞 문화가 남긴 사람들 중에는 앞서 언급한 '엉터리 밴드'의 리더일 수도, 몇 안되는 '아티스트'일 수도 있는 김형태가 있다. 스스로를 '무규칙이종예술가'라고 부르는 그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바라는 것은 소비를 위한 돈과 안정된 직장" 뿐인 21세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홈페이지(www.thegim.com)를 열고 카운슬링을 시작했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총 쉰 건의 카운슬링과 김형태가 각 장 끝에 쓴 다섯 편의 글을 읽으면서, '이건 내 얘기잖아'하면서 부끄럽기도 했고 그런 스스로를 변명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답변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사실이다. 글쓴이가 "부모님 세대의 삶의 경험을 자식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은 정말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먹고살기에 급급한 직업관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생 불변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썼듯이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과 그걸 움켜쥘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10대 학생에서 50대 아줌마까지, 정말 다양한 고민을 가진 이 책의 질문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세대는 '이태백'으로 대표되는 20대 청년들일 것이다. 이들에겐 충고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고슴도치처럼 제 자식 감싸기 바쁘고, 선생들도 좋은 대학 가라는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고, 도대체가 '인생의 선배'가 없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운 글쓴이는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주는 선배처럼 때론 따뜻한, 때론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것조차 이 사회가 청년들을 '일하게 만들려는' 수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그런 마음은 간 곳조차 없다. 컴퓨터와 핸드폰 같은 기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변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믿음. 글쓴이는 그런 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문득 김형태야말로 "예상문제와 자격증 얘기 말고 진짜 인생 이야기를 해줄" 인생의 선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차

프롤로그 - 청춘 카운슬러가 된 어느 예술가의 진심과 진담 그리고 진실

1. 이, 태, 백, 시대. 그래도 지구는 돈다

2. 분노의 에너지로 날아오르기

3. 행복 자격증을 향하여

4. 박제된 청춘에도 날개가 있다

5. 외로움, 청춘의 쓰디쓴 자양분

덧붙이는 말 - 김형태에 대해서 나에게 묻지 말라 / 이외수(소설가)
카운슬링 그 후


책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김수철 씨는 아주 오래전 그이 나이 20대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김수철 씨는 기타를 참 잘 치시네요?"
  "네…… 남들 공부할 때 기타만 쳤습니다. 그리고 또 남들 놀 때 기타쳤고요."
- 156-157쪽

  나의 20대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을 더 멋지게 바꾼다고 생각하니 심장에서 열이 펄펄 났더랬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 203쪽

  그것은 내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께서 가난했던 것이므로, 나의 가난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가난한 것을 자신의 인생과 연결해서 자기까지 가난한 인생으로 규정 짓는 사고는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 241쪽

  "형태야, 너 요즘은 날계란에 흰 우유 안 먹지?"
  "에? 그게 뭐예요. 우유는 안 먹어도 계란은 먹는데……."
  "그게 아니고, 너 옛날에 그거 먹고 살았잖니."
  난 기억이 안 나서 뭔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 형이 얘기해 줍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시간이었는데, 내가 캠퍼스 벤치에 앉아 흰 우유와 날계란을 들고 홀짝홀짝 먹고 있더랍니다. 그 형은 제게로 와서 뭘 그런 걸 먹냐고 물었더니 김형태 왈, "형, 이렇게 날계란하고 흰 우유를 먹으면요, 200원이면 되는데, 소화가 잘 안 돼서 하루 종일 배가 안 고파요. 헤헤"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그 10년은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자랑스러운 시간들이지요. 한 번도 현실 문제 때문에 내 꿈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난한 것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 245-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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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최근에 재밌게 읽었어요.
곳곳 따끔한 일성이 속이 시원하던데요?^^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2002-02-20

2004년 12월 19일 읽기 시작.
2004년 12월 27일 읽기 마침.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이 책을 쓴 사람은 영화 <미저리>, <그린 마일>, <캐리> 등의 원작을 쓴 소설가로 잘 알려진 스티븐 킹이다. 그가 쓴 작품의 성격이나 대중적 인지도, 판매량 따위를 고려했을 때 스티븐 킹은 '블록버스터급' 소설가이며, 우리식으로 구분하자면 '대중'소설가에 들어갈 사람이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대중소설가(누가 있을까? 김진명? 하하.)가 글쓰기에 대한 책을 썼다면 아마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유치한 짓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쓰기로 소문난 스티븐 킹은 '글쓰기에 대해'(이 책의 원제가 <On Writing>이다)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의 시작부터 그는 읽는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으로 담담하게 자신이 자라온 과정과 일상을 풀어놓는다. 이렇게 읽는이의 마음을 풀어놓은 뒤 그는 자상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글쓰기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건질 만한 이야기들은 많다. 자기만의 연장통(낱말, 문단 구조, 문체)을 마련하라, 많이 읽고 많이 써라, 즐겁게 써라, 수동태와 부사를 쓰지 마라 등. 하지만 그 무엇보다 스티븐 킹이 강조하는 창작의 자세는 꾸준한 글쓰기의 노력이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면 자신만의 뮤즈(예술의 신)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글쓰기를 돕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글쓴이가 위대한 작가, 좋은 작가, 그냥 그런 작가 사이의 금을 확실히 그어놓은 부분이었다. 글쓴이는 천재적인 재능이 없다면 노력해봐야 위대한 작가(헤밍웨이나 디킨스 같은)는 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좋은 작가는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선천적 재능'의 문제와 맞물려 잠시 생각에 빠지게 하는 부분이었다.
  미사여구로 치장된 잔가지를 치고 나면, 대부분의 '~법 강의'는 기본으로 돌아간다. 이 책 역시 그렇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想量. 기본에 충실하자.


목차

일러두기

머리말 하나
머리말 둘
머리말 셋

이력서

글쓰기란 무엇인가

연장통

창작론

인생론 : 후기를 대신하여

그리고 한 걸음 더 : 닫힌 문과 열린 문
그리고 두 걸음 더 : 도서목록

옮긴이의 말


책 속에서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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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2005-08-1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본 게 아니라 스티븐 킹의 생애가 궁금해서 봤죠.-_-;; 글쓰기 관련 이야기는 패스~

2006-01-23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