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루키야넨코
나이트 워치 (상)황금가지, 2005-10-25
2005년 11월 4일 읽기 시작.
2005년 11월 11일 읽기 마침.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빛과 어둠의 이야기
나는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종교, 혹은 이념은 각각 얼마나 많은 신도가 있느냐에 따라 그 힘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모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좀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여러 이념의 수호자들이 그 '힘'을 이용해서 싸운다. 그런 충돌은 현실에도 영향을 갖고 온다. 한 이념의 수호자가 다른 이념의 수호자를 쓰러뜨린다.
쿵.
그 순간 현실에서도 총소리가 울려퍼진다.
탕.
슬라브족 해방의 '이념'으로 무장한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한다. 나는 이런 환상 소설 같은 일들을 상상하고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책을 처음 집어들 때 역시 그런 기대가 있었다. '<반지의 제왕>을 압도한' 소설이라는 뻔한 광고보다는(사실 소설은 <다 빈치 코드>에 밀리지 않았는가?), '다른 존재들'의 싸움과 '어스름의 세계'의 그 기묘한 분위기가 날 끌어당긴 것이다. 빛과 어둠의 존재라는 설정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뻔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이 되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게 되면 반드시 빛과 어둠 사이의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하는 것은 과연 이분법적 사고이지만, 빛과 어둠의 세력이 서로를 절대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한쪽이 이기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서로 대협약을 체결하고 빛의 세력은 야간 경비대를, 어둠의 세력은 주간 경비대를 만들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정신과 의사 출신이라는 작가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현실 세계에 대한 묘사도 매력적이다. 현대 러시아의 모스크바가 주무대인데, 이 거대하고 유서 깊은 도시는 컴퓨터와 인터넷과 휴대 전화, 거대한 마천루와 유흥가가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옛 건축물과 급격한 개혁·개방으로 인한 과거의 흔적도 갖고 있는 곳이다.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 허름한 아파트, 만원 지하철과 같은 주위 배경은 소설에 현실감을 더해준다.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대부분의 환상 소설들은 그 자체로 현실적이고 완결된 세계를 그렸거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교묘하게 환상의 세계를 끼워넣는 경우가 많다. 그 묘사가 뛰어나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적인 현실 묘사'는 이 작품의 영화화에도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위의 세계가 색깔을 획득했다. 비디오카메라의 세피아 또는 옛날 영화 모드에서 일반 촬영 모드로 전환할 때 일어나는 화면의 변화와 흡사하다. 정확하게 똑같다. - 81쪽
와 같은 문장을 보면서 동시에 그 영상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이다. 좋은 시나리오의 조건 중 하나는 읽으면서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라는데, 이 작품의 묘사는 그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영화를 만드는 데 시나리오가 다는 아니지만, 확실히 이런 묘사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러시아에서 500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에 주는 별을 하나 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작품 자체에 있지 않다. 문장의 내용이 흡인력있게 독자를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눈에 걸리는 문체와 오타가 독자를 현실로 끌어낸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우린 아무 문제없이 여자를 찾아낼 수 있다. 벌써 다닐라와 파라드가 거의 찾아낸 듯하다. 5분에서 6분 정도 더 소요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쨌든 적군은 우리 편에 최후 통첩을 띄운 상태다." - 93쪽
와 같은 문장을 보면 이게 정말 사람의 말투인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 배경 묘사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의 개성을 살린 문체인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투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 이외에도 번역된 문장 중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많다. 아래 몇 가지만 예를 들었지만,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온전히 번역자의 탓으로 돌아가는 것은 잘못이다. 출판사에서는 책을 내는 이상 교정을 보는 것이 정상이고, 편집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허나 그렇게 치부해 버리기에는 눈에 너무 많이 띄는 비문들은 읽는 이를 피곤하게 한다. 문장을 통째로 바꿔야 할 정도의 오류가 아니라면 다음 판에서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여자는 특유의 마녀다운 눈초리로 나를 천공해 보았다. - 76쪽
- 우리말에 '천공하다'라는 동사가 있는가? 내가 배움이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 들어보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꿰뚫다'라는 뜻인가?
"로컬 네트워크라는 랜 관련 업무를 해봤소?" - 89쪽
- '랜'이라는 말 자체가 근거리 통신망(Local Area Network)의 약자이다.
곧 모든 게 뒤엉켰고 너무 빨리 일이 벌어졌다. 무슨 경비대와 무슨 어스름의 세계를 두고 고함이 오갔다. - 119쪽
- 할 말 없음. '무슨 경비대와 무슨 어스름의 세계'? 이 문장은 대체 '무슨' 뜻인가?
"평행의 세계인가요?" - 135쪽
- 환상소설이나 SF를 많이 읽었다면 대체로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로 번역할 것이다. 이 책의 번역에 의심이 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최근 10년 전까지 소련방 공산당 지구 위원회 서기로 근무했다. - 176쪽
-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대개 '소련' 아니면 '소비에트 연방'으로 쓰지 않는가?
아가씨의 머리 위에서 돌고 있는 줄기부터 30미터 줄기로 쭉 뻗은 총상화까지 전부를 보았다. - 197쪽
- 국어사전에는 총상화가 "총상 꽃차례의 꽃"이라고 되어 있고 총상 꽃차례는 "무한 꽃차례의 하나. 긴 꽃대에 꽃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끝까지 핀다. 꼬리풀, 투구꽃, 싸리나무, 아카시아의 꽃 따위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이 아가씨의 머리 위 인페르노의 기둥의 끝부분은 꽃 모양이란 것 같은데…… 해석이 좀 찜찜하다.
꼬리는 재량 있게 좌우로 채찍질 치고 오른쪽 앞발은 바닥에 발린 역청을 긁어대고 있었다. - 236쪽
- 재량 있게 흔드는 꼬리는 어떤 것일까? '이번에는 왼쪽 위로 30도, 다음 번에는 오른쪽 아래도 45도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흔드는 꼬리?
코스차는 아무것도 이해 못하고 신음하는 여자 흡혈귀를 양 팔에 앉고 갔으며 시몬과 호랑이는 조용히 그들 뒤를 따랐다. - 272쪽
- '안고'가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소설이 주는 재미가 저런 문제점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장르 문학에 있어 읽고 나서도 계속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재미가 있다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 아닌가? 약간의 주저가 있겠지만, 결국 나는 읽지 않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할 것이다.
어스름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 목차
나만의 운명
아군 속의 아군 (상)
▒ 책 속에서
60년대를 겪은 부모 세대가 길러낸 '불특정 연령'의 소년 소녀들이 아직까지도 이 얼마나 많은가. 행복해지는 법을 모르는 불운한 인간들이 이 얼마나 많은가. 너무나 당신들을 동정하고 싶다. 너무나 당신들을 돕고 싶다. - 198쪽
그러나 절대로 안 된다.
선과 관련된 온갖 행동은 악의 활성화에 대한 허가 행위다. 협약! 경비대들! 세계의 균형? -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