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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초 신타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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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베가 구덩이에 빠졌다!
모두 1학년들이라 꺼낼 수 없고,
형 누나들은 학교에,
아빠들도 회사에,
그래 엄마한테 부탁하자! 엄마들이 와서 시끌시끌.
그런데 '안 되겠네.' '남자가 있어야겠다.' 라니...
골프채를 흘들며(?) 지나가던 아저씨가 왔다.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라니...
에잇, 그럼 비겁한 어른들의 힘 따위 빌리지 않고 우리들이 하겠어!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노래를 불러서 기운을 돋우고, 로쿠베가 좋아하는 비누방울을 불어주고...
그래도 로쿠베는 기운이 없네.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 어떻게 할까?

  처음 서평단 이벤트를 신청하고 아이들 읽는 책을 괜히 신청한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책을 읽어보니 역시 걱정은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 1975년에 나온 책이 아직도 팔리는 걸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초 신타 선생의 그림은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린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삽화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아이들이 수채물감으로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인물의 감정을 싣고 있는 게 그렇다. 거기에다 표지를 넘기면 보이는 첫 장면의 어둠과 마지막 장면의 밝음의 대비를 보면 선생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 돌아가셨지만.

  아이들에 대한 책을 많이 펴낸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의 글은 짧은 동화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과 '그 밖의 것들'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을 가진 '비겁한' 어른들과, 구덩이에 빠진 개 한 마리도 똑같은 친구로 생각하고 구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 좀 더 비유를 넓혀 본다면, 로쿠베를 절망에 빠진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그런 사람들을 저 아이들과 똑같이 안타깝게 여기고,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그림도 좋고 글도 좋다. 주위에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있다면 당장 선물해 주고 싶을 정도.

  원문과 대조해 본 결과 번역도 나쁘지 않다. 예를 들면, 직역하면 "모두들 절반은 울 것 같은 얼굴입니다みんな、はんぶん、なきそうなかおをしています。"를 "모두들 울먹울먹 울상을 지었습니다"로 번역한다든가, 직역하면 "모두들 큰 기쁨으로 로프를 끌어올렸습니다みんな、おおよろこびで、ロープをひきました。"를 "모두들 굉장히 기뻐하며 이영차, 이영차 줄을 끌어올렸습니다."로 번역했다든가.

  꼭 흠을 잡아보자면, 골프채를 든 아저씨가 지나간 다음에 칸과 에지가 "바보"하고 소리치는 장면이 빠졌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작가도 어머니들이 그냥 가버린 다음에 칸과 에지가 "비겁해" 했던 것과 아귀를 맞추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미스즈가 쿠키를 데려오기 전에, 로쿠베는 잡종이고 쿠키는 코커스파니엘이기 때문에 미스즈의 어머니가 두 마리의 개를 만나게 하지 않는다는 부분도 없다. 이런 부분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도 별 하나를 깎아먹을 정도의 흠결은 아닌 것 같다. 그만큼 내용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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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4-0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페일레스 2006-04-0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헉 '로드무비 현상'의 로드무비님께서 몸소 추천해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ㅠ0ㅠ
 
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구판절판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뇌수의 한구석에서, 기도란 반복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이 번갯불처럼 번득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성교와 마찬가지로 반복이 기도의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이건 나무관세음보살이건 상관없다. 모든 쾌감의 본질은 반복이다. 기도와 성행위가 바로 그런 점에서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종교의 진정한 쾌락을 이해해가고 있었다. 자아 없는 반복. 그것이 최고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을 혐오하고 기피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불에 데인 것 같은 짜릿한 쾌락으로 사람을 매혹시키며, 기도보다 더 알기 쉽게 자아 없는 반복의 경지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인내를 요하는 자발적 행위의 결과로 달성되는 자아 없는 반복보다도, 본능에 따를 뿐인 성적 반복의 결과로 달성되는 자아 상실 쪽이 더 알기 쉽고, 실천하기 쉽고, 생과 사의 단순 모델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41쪽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면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도 그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으면 당신의 아버지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건 인간이 하는 방식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당연한 일이야. 신이 인간을 창조하신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신을 만들게 한 데 있는 게야. 창조주이신 신이 인간을 만들었으므로, 인간은 인간에 지나지 않아. 신을 알 수가 없지.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 신은 인간의 척도에 맞게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언어일 뿐이지. 알겠느냐, 로오. 일본어로 번역된 소설은 당연히 일본어 소설이라는 사실을."
  "선생님답지 않은 말장난이군요."
-77쪽

  부패한 살덩이의 냄새를 기피하는 것은 아마도 동물인 인간의 본능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에서 피어날 냄새와 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주간지의 사체 사진을 감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긴 하나 그건 정말 평화로운 풍경이다. 인쇄 잉크에서 풍겨나는 석유 냄새를 맡는 게 고작이니까. 썩어 뭉그러진 살코기가 형체를 잃으면서 뿜어내는 냄새. 식물이 썩어가는 향기에서 멋과 미를 발견하고 사랑하는 감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족이 썩어가는 냄새이기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것이다. 세포가 거부하기 때문이다.
-107쪽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한다. 발로 차면서 주먹을 끌어당겨 다음 동작을 준비한다. 그 팔의 움직임은 성교 행위와 같지 않은가. 나의 폭력은 성교의 보상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식의 이런 해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상 행위. 신이라는 개념에 필적하는 편리한 말이다. 이 말만 있으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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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구판절판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들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게 되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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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06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흔으로 산다는 것을 읽어볼 참인데...
세대차이가 느껴지는군요.

페일레스 2006-01-0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개비님/ 아니 누님도 참. *-_-* 누님도 아직 젊으십니다.
 
몬스터 18 -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세주문화 / 2002년 6월
절판


  "잘 들어……"
  "방금 봤던 건 다 잊는 거야."
  "멀리 도망쳐……"
  "가능한 한 멀리……."
  "사람은 말야……"
  "뭐든지 될 수 있단다."
  "너흰 아름다운 보석이야……."
  "그러니까 괴물 따윈 돼선 안 돼……."
-165~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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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6-01-2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보면 용두사미의 걸작같지만... 마지막까지 그 비장함은 잃지 않는군요. ㅎ

페일레스 2006-01-27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yonara님/ 용두사미의 걸작이란 말 동감입니다. ㅎㅎ 그래도 참 재미있게 본 작품이지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절판


  나는 프랑스 사회를 '절대선'으로 보고 있지 않다. 프랑스 사회라고 비판할 점이 없을 턱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구실은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선에 관련된 것이지 프랑스 사회를 향한 것이 아니어서 나에겐 프랑스 사회의 진보나 개선을 위해 일할 능력도 없지만 의사도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성숙 단계의 차이는 그럴 여유를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는 "프랑스 사회를 잣대로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는 비판을 기꺼이 감수한다. 선비 같은 인간이 사라진 땅에서 "한국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전통적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또 "오늘날 한국의 사회제도의 기본틀은 모두 서구에서 수입한 것인데 그 틀 속에 들어 있어 마땅한 내용물을 프랑스 사회를 통해 말하려는 것뿐이다"라고 응수하면서 말이다.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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