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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오며가며 간단하게 글을 메모할 수 있다는 게 북플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장문의 글(내 기준 140자 이상-_-;;)을 쓰는 사람들이 신기했는데 버릇을 들여놓고 보니 그리 힘들지도 않군요.
얼마전 뮤지컬 레베카의 무대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고 흥미가 생겨 대프니 듀 모리에가 쓴 원작 소설을 구입해 읽어보았습니다. 댄버스 부인으로 분한 옥주현이 자신의 죽은 여주인, 레베카를 울부짖으며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섬뜩하고 강렬했거든요. 예전에 히치콕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감상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저에겐 큰 재미도 감흥도 없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댄버스 부인이라는 인물이 가진 기괴한 낭만성 정도 뿐이죠. 이에 대해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사실 막시밀리언 드 윈터가 그렇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아니, 이 사람에게 성격이 있기는 했던가요?). 하지만 전 가정부 댄버스 부인은 굉장히 로맨틱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앤 폰테인이 연기한 이름 없는 화자 앞에서 죽은 전 주인의 속옷을 쓰다듬는 부분에서는요. 페티시즘과 네크로필리아가 근사하게 결합된 이 장면에서 전 죽음을 초월한 로맨틱한 사랑을 본답니다.>
(출저: http://www.djuna.kr/movies/scrawl_2001_02_06.html )
소설은 주인공 `나`의 독백과 함께 시작합니다.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last night I dreamt I went to Manderly again...)˝ 으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도입부가 등장하죠. `맨덜리`라는 저택은 여기서 과거의 상징,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짧막한 시절의 유산, 아름답지만 슬프고 기묘한 곳으로 제시됩니다.
뚱뚱하고 무례한 어느 미국 부인의 시종 일을 하던 `나`는, 몬테카를로 휴양지에서 맥시밀리언 드 윈터라는 이름의 영국인 귀족과 사랑에 빠집니다. 맨덜리라는 아름다운 대저택의 소유자인 그는 가엾게도 일년 전 아름다운 부인을 사고로 잃었다고 하는군요. 우울하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맥심은 만난지 2주만에 `나`에게 청혼을 해오고, 가난하고 연고도 없는 `나`는 이를 선뜻 수락합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리고 수줍어요. 경험도 별로 없죠. 맨덜리라는 유서깊은 대저택과 맥심의 아름다운 전부인-레베카의 망령같은 존재감은 계속해서 `나`를 압박해옵니다. 설상가상 저택의 관리인이며 레베카의 몸종이었다던 댄버스 부인은 시종일관 적대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로 `나`를 겁먹게 만들죠.
<레베카>는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읽는 내내, 저는 주인공인 `나`와 맥심의 모습을 안개낀 것 마냥 흐릿하게밖에 연상하지 못했어요. 이 둘은 듀나가 말한 것처럼 `성격이 없습니다`. `나`는 취미로 대단할 것 없는 그림을 그리는 젊고 소심한 여자고, 맥심은 신문에서 크리켓 경기나 찾아 읽는, 조금 예민한 성미의 중년 남자에요. 특별할 것도 없는 이 둘의 관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건 바로 맥심의 전 부인 레베카의 존재감입니다.
`존재감`이란 단어는 퍽 역설적입니다, 왜냐면 레베카는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든요. 레베카는 처음 소설에서 언급된 그 순간부터 이미 죽고 사라진 여자입니다. 마치 꿈 속의 맨덜리처럼. 그러나 레베카는 저택의 모든 곳에서,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큰 키와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굉장한 미모... 레베카는 부재함으로서 소설 전체에 굉장한 존재감을 떨치며 `나`를 위협하는 인물입니다.
특히 이 레베카와 가장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이어져 있는 댄버스 부인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소설로서든, 영화로서든, 뮤지컬로서든, <레베카>는 댄버스 부인으로 기억되는 작품일 수 밖에 없습니다. 레베카를 잊지 못해 매일 그의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의 방식대로 저택을 운영하고, 죽은 여주인의 옷가지를 황홀하게 펼쳐보이며 새로운 안주인에게 살의를 숨기지 않는 댄버스 부인의 병적인 태도는 정말 소름이 끼치고 오싹하죠. 심지어 마지막엔 그 넘치는 격정으로 자신에게는 온 세상과 마찬가지였을 맨덜리 저택에 불을 지르고 자취를 감춰버립니다....-_-;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 둘 다 끝까지 일관성있게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몰개성하고 평면적인 `나`(작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드 윈터 부인`으로만 등장할 뿐이죠)나 역시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않는 맥심과는 정말 대조적이죠. 사실 `나`와 맥심의 로맨스는 너무 지루하고 고리타분해서 답답했습니다. 오히려 이들보다는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의 관계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듀나 말을 빌려 쓰자면, 진짜 미치광이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로맨틱하기 때문이겠죠.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 본인이 이런 대비를 의도했을 것이 확실한데, 그래서인지 행간을 읽으며 (레베카와 댄버스 부인에 대해) 여러가지를 상상하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https://youtu.be/ttmTnMF3okg
(옥주현이 노래하는 `레베카`.)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섬뜩하게 로맨틱한 작품이었습니다.
덤1) `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시종일관 자신을 어리고 미숙한 존재로 묘사하는데요. 갓 학교를 졸업한데다 별다른 연애 경험도 없다....고 계속 말하길래 정말 한 열 여덟살쯤 된 줄 알았습니다ㅍ_ㅍ; 스물 한 살이더군요. 저랑 동갑이던데요. 전 제 나이를 소설속 `나`가 묘사하는 것 마냥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좀 이상했어요.
덤2) 작품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레베카의 사촌인 망나니 알코홀릭 파벨은 우리집 강아지 이름이랑 똑같더군요. 웃겼습니다.
덤3) 시간에 대한 소설의 묘사도 인상적었어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에서와 달리, 원작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맨덜리 저택으로 상징되는 과거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젊은 아가씨가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도록, 드 윈터 부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럽을 방랑하는 대목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스물 한 살의 `나`가 빨리 어른이 되기를 소망하면서도 강박적으로 기억한 사소한 순간 순간들은 악령처럼 집요하게 둘을 따라다닙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여주인의 방식이 유효한 맨덜리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기묘하게 뒤섞이지요. 레베카의 취향대로 꾸며진 정원과 침실에서, 그의 흔적이 역력한 머리빗과 사무용품 사이에서, `나`는 레베카와 그가 살아 숨쉬던 과거를 느낍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오히려 자신이 유령이 아닐까, 이 대저택의 손님이 아닐까 걱정하면서요. 아! 너무 소심한 성격 아닙니까? `나`같은 사람이 제 옆에 있으면 너무 답답해사 엉덩이를 걷어 차 주고 싶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