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토드 헤인즈의 영화 <캐롤>이 얼마전 한국에서 개봉했다. 해외에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이 이어졌던 만큼 나 역시 기대가 큰 작품이다. 허나 조금은 뜬금없게도 이 영화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웹상에서 논란이 되었다. “이 장면은 제가 느끼기에, 그냥 제가 느낀 겁니다. 제가 느끼기엔,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고 캐롤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라는 거죠”. 분명 토드 헤인즈는 자신의 영화가 여성과 여성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게이인 감독과 레즈비언 극본가, 제작자들이 영화에 참여한데다, 이미 영국과 미국에선 동성결혼이 법제화 되어 있을 만큼 게이 이슈가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헤인즈의 해당 발언은 캐롤과 테레즈의 성적 지향과 퀴어스러움을 거세시키고 영화를 보아달라는 요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건 오히려 동성애라는 특수성과 더불어 이 둘의 관계가 가진 보편성도 놓치지 말고 보아달라는 부탁이었을 것이다. 이에 관해 듀나가 <허핑턴 포스트>에 올린 다음과 같은 지적은 무척 날카롭다.

˝훌륭한 예술작품 안에서 보편성과 특별함은 조화를 이룬다. 보편성은 우리의 공감을 끌어내고, 특별함은 우리에게 다양성의 인식과 발견의 기쁨을 준다. 그리고 대부분 훌륭한 작품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 특별함이다. 엠마 보바리와 안나 카레니나가 모두의 공감을 사는 보편적이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기억될 수 있을까?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이전부터 이해했고 공감했던 것만 받아들인다면 그 체험이 무슨 소용인가?

[캐롤]이 보편적인 로맨스인 건 맞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훌륭한 로맨스 작품에는 모두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다. 우린 결국 같은 호모 사피엔스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두 주인공에게서 1950년대 미국에서 살았던 여성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을 지우고 `인간과 인간`만 남겨놓는 건 [안나 카레니나]에서 19세기, 제정 러시아, 이성애, 여성을 모두 지우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제발 그러지 좀 말자.˝

https://t.co/ZU8dxRuRis

레즈비언 로맨스를 레즈비언 로맨스라 부르지 못하는 이 촌극 앞에서 몇년 전 읽은 이셔우드의 <싱글맨>이 떠올랐다.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 조지의 입을 빌려 쿨한 척 하는 pc한 이성애자-지식인-자유주의자들을 사정없이 공격한다.

퀴어 퍼레이드를 둘러싼 선정성 논란을 보라. 사람들은 성소수자들의 `성소수자스러움`을 도무지 견뎌내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존재감을 희석시키려고 갖은 애를 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똑같다˝는 주장은 인권의 차원에서는 맞지만 정체성의 차원에서는 틀리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과 다른 문화속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한 `다름`이 가시화 될 때 사람들은 불편함과 혐오감을 숨기지 못한다. 소수자 당사자가 이런 이성애 중심주의를 내면화하며 자기검열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일은 1960년대 미국에도 있었고 이셔우드는 그게 무척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자, 예를 들어서, 주근깨가 있다고 해서 주근깨 없는 사람에게 소수집단으로 여겨지지는 않죠. 그러므로 주근깨 있는 사람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는 소수집단이 아니죠. 왜 아닐까요? 왜냐하면 소수집단은,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다수에게 위협이 될 때에만 소수집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위협 중에서 상상에만 머무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소수집단이 밤사이 갑자기 다수가 되면 어떨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모르겠다면, 더 깊이 생각하세요!˝

˝좋습니다. 이제 자유주의자를 떠올립시다. 이 강의실 안에 있는 모두가 자유주의자일 겁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말하죠. `소수집단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물론 소수집단도 사람입니다. 사람이죠. 천사가 아니라. 물론 소수지단도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자유주의자의 히스테릭한 모습은 아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자의 생각에 빠지면, 흑인과 스웨덴 사람 사이에 아무 차이도 볼 수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중략)

˝자, 이제 똑바로 봅시다. 소수집단은 우리와는 다르게 보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우리에게 없는 결함을 가진 사람일 겁니다. 우리는 소수집단이 보고 행동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소수집단의 결함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짜 자유주의 감상주의로 우리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면, 안전밸브가 생깁니다. 안전밸브가 있으면, 박해를 덜하게 됩니다. 이런 이론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믿으려고 애쓰는 바는, 무엇을 오래 무시하면 그냥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인데....˝>

정작 이렇게 말하는 조지도 줄곧 벽장에 처박혀 살다가 죽어버린다는 점이 이 소설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어쨌거나 배경은 냉전이 한창인 1960년대의 미국이고 주인공인 조지 역시 중상류층 백인 남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5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당시 미국보다 나은가하면 그렇지도 않다는게 진정한 비극이다. ˝동성애자가 아니라 사랑한 사람이 우연히 동성일뿐˝따위의 변명은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울 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성애적인 욕구들을 애써 무화시킨다. 이에 당당히 `좆 까`라고 외치는 소수자들의 불온한 목소리가 한국 사회에서 많이 들렸으면 한다. 결국엔 그런 다양성이 우리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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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0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심한 탓에 훌륭한 레즈비언 로맨스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프랑스 여성 작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보부아르, 사강 못지않게 인정을 받았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작가로 분류됩니다. 보부아르와 사강의 작품이 70, 80년대에 알려진 것에 비하면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녀 인생 자체가 레즈비언이었고, 작품 속에 레즈비언 로맨스 풍이 남아 있어요.

남은 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csp 2016-02-09 22:10   좋아요 0 | URL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라는 이름을 기억해 둬야 겠군요. 외국의 퀴어 문학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것도 좋지만, 이제 한국에서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성소수자 작가들이 나와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cyrus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 ^^